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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플터치 & 큐티

엄한 진리

10월 23일 와플 QT_주말칼럼

2022-10-23

주말칼럼_엄한 진리 

  

“그렇다면 네가 왕이란 말이냐?” “그렇다. 네 말대로 나는 왕이다. 사실 나는 진리를 증거하려고 났으며 이것을 위해 세상에 왔다. 누구든지 진리의 편에 선 사람은 내 말을 듣는다.” 그때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 하였다. 그리고서 그는 다시 밖으로 나가서 유대인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소(요한복음 18장 37-38절).”


“네가 왕이란 말이냐?”라고 묻는 빌라도에게 “네 말대로 나는 왕이다”라고 대답하시는 예수님, 속이 다 시원한 장면입니다. 예수께서 왕 되신 나라에서 ‘한 자리’를 탐했던 제자들이 그토록 듣고 싶은 ‘말’이었겠지요. 상황이 썩 어울려 보이진 않습니다. ‘왕’이라는 대답이 무색할 만큼 예수님의 처지가 초라하기 짝이 없거든요. 왕이 왕 같아야 왕이라는 소리에 고개가 숙여지는 법입니다. 있던 제자들도 다 떠난 마당에 ‘내가 왕이라’니요. 큰소리도 상황 봐 가며 쳐야지 무턱대고 큰소리 먼저 쳐대면 뒷감당을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그러니 ‘네가 왕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마태복음 27장 40, 42절)고 조롱할 만도 했을 겁니다. 


가야바의 사람들로부터 예수를 넘겨받은 빌라도는 마뜩치 않았습니다. 그러잖아도 성가시기 짝이 없는 게 유대 나라 총독 노릇인데, 새벽부터 우르르 관청으로 몰려든 극성이 달가울 리 없지요. ‘그냥 너희가 알아서 하라’고 물려보기도 했지만 소용없습니다. 자기들에게는 사람 죽

이는 권한이 없다면서 막무가내로 예수를 떠밉니다. 사형을 판결해 달라는 거고, 당신 손으로 죽여 달라는 거지요. 로마의 총독이었던 빌라도에게 ‘사형의 이유’는 정치적이어야 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던 이유입니다. 그 물음의 행간을 다 아시면서 ‘그렇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네 말대로, 내가 유대인의 왕이라’라고.


<히브리서> 묵상을 시작했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모든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노라고, 편지의 첫 구절부터 ‘아들’을 소환합니다. ‘아들-예수’에 대한 수신자들의 ‘믿음’이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이제나 그제나 ‘예수’를 ‘믿는다’라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요. ‘믿음’과 ‘현실’의 충돌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실’이 ‘믿음’에 손 내미는 일 없고, 손을 내민다 하여 냅다 그 손 붙잡는 ‘믿음’도 없으니까요. 왜 꼭 그래야 하냐며 댓글에 대댓글을 달기 시작하면서 휘청, ‘믿음’이 흔들거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그것을 마음에 깊이 간직해야 합니다(히브리서 2장 1절).”


한 번 믿음은 영원한 믿음이고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일 것 같은데, 그게 꼭 그렇지는 않은가 봅니다. 더러는-어쩌면 생각보다 많이 ‘믿음’을 ‘잃고’ 구원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생기는 거지요. 무슨 까닭일까요? ‘진리’ 때문입니다. 복음을 듣고 그게 ‘진리’라고 ‘믿어’ 예수쟁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나다 보니 그게 정말 진리인지 의문이 듭니다. 진리는 왜 그렇게 힘이 없는지, 살아가는 데 큰 쓸모가 없더라는 걸 알게 된 겁니다. 단적으로, 돈 버는 일에 진리는 ‘힘’이 아니라 ‘짐’ 같아 보입니다. 


밥 먹여 주지 않는 진리, 원하는 걸 떡하니 대령해 놓지 않는 진리가 진리일 수 있을까요. 어려운 환경을 뒤바꿔 놓지 못하는 진리, ‘참으라, 견디라’라고만 해 대는 진리를 참고 견뎌 내기가 어려워 ‘들은 것-진리’를 ‘유념’하지 않고 외려 진리로부터 빚어진 ‘구원’을 등한히 여깁니다(히브리서 2장 1, 2절). 밥 먹여 주지 않는 진리가 밥줄까지 끊어 놓을까 두려운 걸까요. 이나저나 ‘진리’가 ‘질리’는 이들이 생겨나고, 많아지고… 그렇게 ‘진리 없는 믿음’, ‘진리 빠진 교회’가 되기도 합니다. 진리 없이는 못 살 것 같았던 처음 믿음은 흘러 떠내려가고, 진리 없이도 얼마든지 교회 생활을 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배웁니다.


‘진리’를 ‘유념’하지 않고 ‘등한히’ 하면 ‘보응’이 있다는 경고(히브리서 2장 3절)가 버젓하지만, 그조차 등한히 여깁니다. ‘말뿐인 보응’이라는 걸 안 거지요. ‘진리’를 등한히 여겨 살아도 당장 무슨 일 안 생기니까요. 멀쩡하니까요. 처음에는 조심스러웠고 일말의 두려움도 있었으나, 한두 번 멀쩡한 걸 경험하면서 조심스러움도 사라집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며, 그 확신을 증거합니다. ‘율법에 매여 살지 말라’고, ‘자유하라’고, ‘그게 성숙한 믿음이라’고, ‘진리’ 떠난 자리에 엄한 진리를 갖다 놓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빌라도의 빈정거림을 우리가 반복하는 건 아닌지 잘 살펴야겠습니다. 샬롬.^^  




작성자 : 이창순 목사(서부침례교회)
출처 : 맛있는 QT 문화예술 매거진 <와플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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