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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변명을 덮는 순종’의 자리에 있는가?
by 정갑신2022-05-03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명하신 예수는 아버지께 순종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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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주제: 공동체, 그 회복을 위하여]


• 있게 하신 자리_정갑신


가정 공동체의 회복_정갑신

• 나는 ‘피차 복종’의 자리에 있는가?

• 나는 ‘변명을 덮는 순종’의 자리에 있는가?


포용 공동체의 회복_박삼영

•  “그리스도를 본받아 왕의 자리에서 내려오라”  

• 교회는 어떻게 세상을 포용할 수 있는가?


공감 공동체의 회복_권성찬

• 교회는 세상에서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 교회는 세상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생명 공동체의 회복_정민영

• 세상은 교회로부터 생명을 기대할 수 있는가? 

•  어떤 교회라야 세상이 생명을 기대할 수 있는가?


5월 한 달 동안 매주 이어질 위의 글들은 2021년 1월 예수향남교회 제1차 ‘열린 말씀 집회’의 설교를 간추린 것입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에베소서 6:1-4.


모두가 순종을 싫어한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여러 일상 중에서도 가장 밀착해 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가 잘 모르고, 또 잘하지도 못하면서 잘 안다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잘하지 않는 것은 잘 모른다는 거다. 진짜로 잘 안다면 무슨 대가를 치러서라도 하고야 만다. 따라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다루는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잘 살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을 새겼으면 한다. 1절은 여러 가지로 질문하게 만드는 말씀인데, 여기서 끄집어 낸 다음 세 가지 새로운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말씀을 묵상해 보도록 하겠다.


•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말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연령대는 언제인가?

• 순종하라는 말은 누가 누구에게 할 수 있는 말인가?

• 부모에 대한 자녀의 순종 여부는 자녀의 문제인가 부모의 문제인가?


이런 질문들에 대해 복음의 관점에서 어떻게 대답할 수 있는지, 우리의 삶의 경험에 비추어 함께 생각하면서 다뤄 보겠다. 첫 번째 질문―부모에게 순종하라는 말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연령대는 언제인가?―과 함께 생각해 볼 다른 질문들이 있다. 미취학 아가들이나 초등 어린이들에게 순종하라는 말을 지속해서 하는 건 정당한가? 순종의 의미를 이해하지도 못하는 아이에게 순종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감화나 감동이 아니라 세뇌가 아닐까? 사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게 순종하라는 말로만 가능한 것인가? 순종이 자발적 행동이라기보다 세뇌와 강요로 열매를 볼 수 있는 건가? 몇 살쯤 되어야 순종하라는 말을 해도 될 만큼 알아들을 수 있는 건가?


질문을 거듭하며 순종을 생각할수록 부정적인 생각이 많아지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누구보다도 우리에게 순종을 강조하신 분은 정작 하나님이시다. 구약의 첫 단계부터 신약의 마지막까지 하나님은 순종을 강조하신다. 아담에게 처음 하신 말씀도 순종하라는 것이었고, 성경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교회에게도 복음의 순종을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어린아이에게나 어른에게나 순종을 강조하신다. 물론 하나님께서도 우리더러 순종하라고 명령하신다고 해서 우리가 당연히 순종할 거라고 순진하게 생각하신 건 아닐 것이다. 우리가 제대로 순종하지 못할 걸 아시면서도 강조하신 게 분명하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무엇보다도 순종이란 것이 순종하겠다고 생각하기만 해도 순종할 수 있게 은혜를 부어 주시겠다는 약속의 범주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순종은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순종은 ‘되는’ 것이다.


나 자신의 개인적인 인생에서 참 잘했다고 생각하게 되는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아버지를 용서하라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아버지를 찾아갔던 것이다. 그때 나는 용서가 되는 신비로운 은혜를 경험했다. 물론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길 떠나는 것부터가 은혜였다. 어쨌거나 순종하는 게 아니라 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연령대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순종하라고 논리적으로 설득하고 이치적으로 납득이 되어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어리다고 순종이 안 되는 것이 아니다. 나이 많고 많이 배웠다고 순종이 다 되는 것도 아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철들었다고 순종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순종이란 말과 더불어 항상 깔려 있는 말씀이 “주께 하듯 하라”이다. 순종은 결국 믿음과 은혜의 이야기이다. 순종은 윤리도덕의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윤리도덕을 포함하기도 하지만, 그 이상의 복음과 은혜에 관한 이야기다.


하나님께서 순종하라고 명령하시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순종이 아름다운 열매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순종은 그 대상이 독재적 선동가 같은 아주 사악한 자가 아닌 경우라면 대부분이 놀라운 삶의 열매를 맺는다. 예를 들어, 회사나 나라 자체가 불의와 불공정과 불법과 왜곡을 조장하고 추구한다면, 직원이나 국민은 회사와 나라에 충성할수록 불의에 기여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셈이다. 이와 비슷한 주제를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가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다뤘다.[1] 그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불의하고 또한 그 불의를 가중시키는 어떤 사회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인도 도덕적이지는 않지만, 사회는 훨씬 더 부도덕하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마찬가지로 부모에게 순종할수록 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고, 순종이 오히려 부도덕과 악행을 이루는 경우가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특이한 케이스가 아니라면, 대체로 부모님에 대한 순종은 불순종과는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이다. 권위자에 대해 불순종하는 것은 대체로 내 생각이 권위자의 판단보다 옳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정상적인 권위자에 대한 그런 불순종은 결국 불순종한 자가 섣부르게 판단했다는 것으로 드러나곤 한다. 나 역시 젊은 2,30대 때, 나 스스로 꽤나 똑똑한 줄 알고 권위자에게 대들고 싸운 적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내 생각도 거기서 거기인 걸 알게 되곤 했다. 남는 것은 오로지 내가 불순종했다는 것만 남았다. 내가 섣불렀다는 사실만 남아 나 자신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 뿐이었다. 나만 정의롭고, 나만 옳고, 내 생각이 더 명석하다고 확신에 가득 찼던 게 섣부르고 어색하고 유치하고 조급하기만 했다는 것을 뼈저리게 후회한 적도 있다. 내 생각대로 하건 권위자의 뜻을 따르건, 사실 큰 차이가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 권위자의 뜻을 따르므로 공동체 전체를 돕는 것이 훨씬 더 나은 선택이라는 게 중론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어떤 습관이 있느냐면, 이 권위자는 특별히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도 내 성급한 행동을 합리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진정한 순종의 본질을 보이셨다. 그런데 그 길이 어떤 길이었냐 하면 불법자들에게 넘겨지고 불의하고 억울하고 처참하게 죽임당하는 길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순종하셨다. 그리고 결국에는 예수님의 순종이 가져오는 그 영광스러운 결과를 가져왔는데, 결국 주님은 이 모든 혜택을 고스란히 우리에게 넘겨주셨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을 통해 임한 영광스런 혜택을 충분히 받은 자로서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 서야 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영원토록 잃지 않을 영원한 생명과 부요함을 다 주셨다. 그러고 나서 주님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더 이상 손해 볼 것도 없고 뭔가 더 바랄 것도 없을 만큼 전부를 다 내주신 주님을 기억함으로서만 순종할 가능성이 열린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그렇게 순종했다간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순종을 못한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순종하는 것은 주님 안에서 우리가 모든 걸 받았기 때문에 이미 우리는 더 이상 망할 수 없는 자들이 되었다는 걸을 기억해야 한다. 이 복음을 확실히 믿는다면 우리는 순종할 수 있다.


결국,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말씀은 주님을 향한 믿음의 이야기다. 주님을 믿지 않으면 순종할 수 없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부모에게 순종하지 못하면서 여러 그럴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고 순종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잊어버리려고 하는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되면 순종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다 제거하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부모에게 순종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부모의 상태나 말이 순종할 만한 상태나 말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상태나 내 생각이 훨씬 더 낫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상황에서 육신의 부모를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다.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부모의 말을 믿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순종하려면 무엇보다 나에게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만큼 다 주신 후에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말씀하신 주님을 믿어야만 한다. 현실은 우리 주변을 돌아볼 때 훨씬 더 순종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순종할 만한데도 불구하고 순종하지 않는 경우를 보게 되기도 한다. 그러니 순종에 대해 자기합리화를 해서는 안 된다. 순종하려면 무엇보다도 주님이 내게 행하신 일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 내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모든 결과의 보증이 된다. 내가 순종하면 어떤 결과가 오게 된다는 것을 미리 짐작하며 순종하지 말고, 오늘 나의 순종의 결과는 오직 주님이시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주님이 내 모든 순종의 보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 자녀에게 순종을 가르칠 때 비록 그들이 순종하라는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연령이라고 해도, 이런 순종의 비밀을 지혜롭게 가르칠 수 있는 은혜를 구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내 감정과 고집을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는 법을 배워야 한다(4절). 그렇지 않을 때 우리가 자녀를 노엽게 만들기도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부모는 부모대로 자녀에 대해 답답한 심정을 가진 사람이 많지만, 자녀는 자녀대로 자기 부모와 대화도 안 되어 자기네 생각과 고민을 이해받지 못해 아픔을 느끼며 부모와 깊은 괴리감을 만들어 지내는 경우가 많다. 이는 부모에 의해 거듭해서 노여움이 쌓여 생겨난 결과다. 가장 가깝고 믿고 의지하는 부모에게 가장 많은 상처를 받는 경우도 흔하다. 자녀마다 이런 상처와 노여움에 대한 반응은 다양하게 표출되는데, 어떤 자녀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억누르며 참고 살다가 청소년기에 폭발하거나 빗나가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는 어른이 되어서도 생각과 역할을 제대로 못하게 될 수 있다. 또 어떤 자녀는 부모와의 관계에서 겪는 고통스런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반발하느라 일탈을 시도하여 가출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가정에서 부모에게서 편애를 상처를 입거나 성차별을 받으며 자랐다거나 구박받고 자랄 때 자녀는 노여움을 경험하는 것이다. 특히나 자기가 분명히 잘못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부당하게 야단을 맞거나 매를 맞는다면 비록 성경이 부모에게 매로 훈육하고 징계할 것을 가르친다고 하더라도 자녀는 노여움을 타는 게 정상이다. 아무리 부모라 해도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행한다고 혼자서만 믿으며 자녀에게 상처만 준다면 그 도가 지나칠 때 자녀는 사무친 분노와 슬픔이 쌓여갈 것이다. 하지만, 부모가 자녀를 일방적으로 사랑하기보다 대화하며 소통의 창구를 유지하되 주의 교양과 훈계의 축으로 붙들고 양육하는 것이 필요하다.


바울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권고를 훈계하기 전에 말했는데, 왜냐하면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면 자녀가 낙심하기 때문이다. 또 자녀가 그렇게 낙심하면 기가 꺾이고 용기가 꺾이고 의욕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녀를 주의 교훈과 훈계로 가르쳐야 한다는 말은 그냥 성경을 가르치라는 말과는 좀 다른 말이다. 여기서 교훈이란 부모로서 내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보니 이런 걸 깨닫게 되었더라는 결과를 가지고 가르치라는 뜻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부모는 신앙생활을 잘하는데 자녀는 탈선하고 가출하는 경우라면 부모가 무턱대고 자녀에게 신앙과 성경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신앙교육을 시켰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자녀는 그런 부모의 가르침을 가르침으로 받기보다 강요와 억압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반발심만 더 커질 수가 있다. 오히려 부모가 먼저 삶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으며, 자신도 행하지 못하는 것을 가르치려 들면 안 된다. 살다 보면 어느 한 순간 자녀가 자라는 걸 보게 되는데, 짧은 기간 우리에게 맡겨 주신 선물인 우리 자녀를 마음 다해 양육하되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한다. 


순종, 말이냐 행동이냐?


두 번째 질문―순종하라는 말은 누가 누구에게 할 수 있는 말인가?―에 대해 살펴보자. 자녀에게 순종의 비밀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할아버지 할머니도 아니고 부모가 앞뒤도 못 가리고 순종의 의미도 제대로 알기 어려운 어린 자녀를 앉혀 놓고 ‘순종하라’고 가르치는 모습은 자칫 유치해 보일 수 있다. 그렇다고 아이가 더 컸을 때는 순종을 가르치는 게 가능한가? 그럼 청소년이라면 어떤가? 청소년 자녀에게 순종하라고 요구하는 건 더 서글프게 또 안쓰럽게 보일 수 있다. 안 되는 걸 억지로 되게 하려는 것 같고, 안 될 걸 뻔히 알면서 되게끔 하려는 몸부림 같게도 보인다. 그러면, 부모가 다 큰 청년이나 장년 자녀를 앞에 두고 순종하라고 가르치는 건 어떤가?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건 부모 자신이 자기 인생을 얼마나 제대로 살지 못했는가를 스스로 선포하는 행위나 마찬가지다. 어떻게 살았기에 그 나이가 되도록 다 큰 자녀에게 순종을 요구해야만 한단 말인가? 그건 순종에 대한 가르침이나 요구라기보다는 구걸 같이 느껴진다.


어쩌면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순종을 말로 가르치기보다 자녀가 순종할 수 있도록 행동과 삶으로 보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렇게 말하는 이들의 말에 훨씬 더 공감하게 된다. 그런 말만으로도 책임이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말보다 행동이 훨씬 더 어렵기 때문에 종종 말만큼이나 행동이 미치지 못할 때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 이유로 말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기회가 주어지면 행동으로 보여주겠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흔치 않게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행동조차도 말과 함께 유보한다면 훨씬 더 위험에 빠지고 말기 때문에 말하고 책임 있게 행동하는 자연스러운 정상성을 회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또 옳은 일이라 생각한다. 평생 말만 남발하는 핫바지 빈대떡 신사가 아니라면 대개의 경우에 먼저 말하는 것은 책임질 일을 스스로 공론화하는 것으로 어떻게 보면 스스로 손해를 자처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적당한 때에 행동과 삶으로 보이자고 생각하는 것은 아직은 아무것도 드러나지도 않았고 그래서 누군가가 내 책임을 거론할 근거도 없기 때문에 훨씬 더 안전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마냥 유보하고 실행을 멀리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우리의 교묘함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일본의 대표적인 경영인이 자기는 말이 앞서는 사람을 더 신뢰한다고 말한 것에 공감이 된다. 물론 우리는 “무릇 군자는 말은 어눌하려고 애쓰고 행동은 민첩해야 한다”는 공자의 말에 길들여져 있는 게 사실이다. 제발 그런 교훈에 맞추어 살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공자의 이 말이 모든 상황에서 진리가 아니라는 걸 절실히 느낀다. 오히려 그 일본 경영인의 생각처럼 말을 앞세우는 자는 책임질 일을 만들어 놓은 셈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말을 아끼는 사람보다는 책임질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생각에 공감한다. 물론 나 자신이 말이 앞서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를 변호하기 위한 자기합리화일 수도 있다. 


또 다른 더 근본적인 이유도 있다. 하나님이야말로 말이 앞서시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항상 먼저 약속하신 후에 그 약속을 성취하시는 방식으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오셨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이렇게 저렇게 하겠다고 먼저 말씀을 하신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행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별명 중 하나가 “말씀하신 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말씀부터 하신다. 이를 테면 말을 앞세우신다. 하나님은 먼저 약속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허물과 잘못에 대해 노여움이 불같이 일어나 하나님께서 앞에서 하신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키시고야 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어릴 때부터 청소년기를 지나 청장년이 되고, 심지어 노년에 이를 때까지도 우리 아버지로서 하나님에게 순종하라고 거듭 거듭 가르치시는데, 심지어 강요하기도 하신다. 왜 그런가? 그렇게 가르치고 강요하셔도 충분히 괜찮을 만큼 우리가 마땅히 순종해야 할 충분한 이유를 친히 보이실 것이기 때문이고, 우리가 순종하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크고 위대한 복인지를 너무나도 잘 아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을 따를 때 순종할 충분한 이유를 생각하며 따르는 것처럼, 우리가 자녀에게 순종을 말할 때도 자녀가 순종할 수 있도록 순종해야 할 충분한 이유를 보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녀가 순종을 잘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동원해서 도와줘야 할 것이다. 


따라서 1절 말씀은 자녀를 향해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그게 마땅하다고 명하는 말씀이지만 그것을 자녀에게 말하고 가르쳐야 하는 사람은 부모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부모는 자녀에게 그렇게 말함으로 자신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만 하고,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자기가 먼저 그렇게 행동해야만 한다. 부모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부모의 부모이신 하나님은 이미 충분히 보여주셨고 풍성하게 행하셨고 또 행하실 것이다. 그리고 부모가 그렇게 하고자 한다면 부모의 삶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바꾸어 가실 게 분명하다. 그래서 마태복음 11:29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기에게 와서 배우라고 하셨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주님은 자기에게 와서 배우라고 요청하실 수 있는 존재시며 또 그렇게 행하실 분이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부모로서 자녀인 우리를 향해 자기에게 순종하라고 가르치신다. 자신에게 배우라고 요청하신다. 자신을 따르라고 강요하신다. 왜 그런가? 그렇게 요청하실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기 때문이고, 우리가 그 요청을 따를 때 얼마나 위대한 영광을 보게 될 것인지를 아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런 자기 자신을 따르라고 하셨다. 왜 그런가? 따르고자 할 때, 우리도 우리 자녀에게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자녀가 순종을 배울 곳은 오직 부모의 품뿐이다. 물론 나 같은 사람처럼 이미 육신의 아버지의 품안에서 순종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경우도 무수히 많을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지금부터 시작하면 된다. 주님은 우리를 이렇게 격려하신다. “괜찮아, 지금부터 시작하면 돼!” “괜찮아, 아직 늦지 않았어!” 우리의 참 아버지는 영원토록 변함없이 우리 앞에서 여전히 기다리신다. 우리가 따르기만 하면, 그때가 언제일지라도 벌떡 일어나 도와주실 준비를 하시고 항상 우리가 다가오기를 기다리신다. 그러니 짝퉁 아버지에게서 못 배웠어도 참 아버지에게서 배우면 되니까 조금도 아쉬워할 필요가 없다.


순종은 아주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상대방의 조건을 넘어서는 행동이다. 물론 이때 우리에게는 “내 경우는 달라, 내 경우는 특수해”라고 생각하며 말하는 각자의 사정이나 상황이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자녀가 부모에게 행하는 순종은 부모에 대한 행동이기 이전에 순종하라고 명하신 하나님에 대한 행동이다. 우리의 부모에 대한 순종은 그 자체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나의 부모를 주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언제나 일정하시고 한결 같으시다. 그러므로 우리의 순종 역시 그래야 하고,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을 상대로 순종한다면 그럴 수밖에 없이 조건을 뛰어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순종하라는 말은 부모가 자녀에게 해야 하는 말이지만 동시에 자녀가 자기 자신에게 해야 하는 말이기도 하다.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아도 될 만한 충분한 이유를 찾는다면 아마도 끝도 없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 그런 이유를 찾아서 순종하지 않더라도 잘 살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경우에 그 사람은 순종하라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자가 되는 것이다. 순종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말로 그 상황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순종의 여지가 있다는 걸 생각하지 않은 변명자가 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에 하나님을 믿기보다 자신의 판단을 믿은 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기보다 자기 현실과 자기 생각과 자기 관심과 동행한 자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도무지 순종할 수 없는 상황인지에 대해 속단하기 전에 물어야 한다. 그 물음은 내 상한 마음에게 묻지 말고 하나님께 묻고, 존경하고 따를 수 있는 공동체나 권위자에게 물어야 한다. 


불순종의 핑계와 책임


이는 바로 세 번째 질문과 연관된다.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느냐 마느냐의 여부는 자녀의 문제인가, 부모의 문제인가? 소위 순종이란 누구의 책임인가? 우리는 종종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되면 자동적으로 핑계거리를 찾는다. “이런 상황에서도 순종해야 돼?” “이런 부모에게도 순종해야 하는 거야?” 이런 한탄스러운 질문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질문에는 근거가 희박한 어떤 전제가 있다. “나는 최선을 다했어.” “나에게는 부모만큼의 문제가 있지는 않아.” “누구라도 이해해 줄 수 없는 내 부모에 비해 나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어.” “나는 내 부모보다 옳고 정당해.” 이런 전제들이다. 물론 이런 전제들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시점이나 어떤 관점에서 맞는다고 다 맞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고 해도 내 부모가 어떤 시대, 어떤 환경, 어떤 상황 속에서 그런 삶을 형성해 왔는지에 대한 사려 깊은 생각이 생략되지 않았는가? 부모가 처했던 사회적, 가정적 환경의 희생양이었을 수 있다는 생각이 생략된 게 아닐까? 그와 동시에 지금 부모를 판단하고 있는 내가 부모 시대나 부모의 상황에 있었더라면 과연 나는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닌가? 우리가 스스로를 정직하게 비추어 보며 부모의 상황에 직면해 보는 것이 생략된 것은 아닐까? 우리가 순종의 문제를 생각할 때 다양한 상황을 보다 입체적으로 숙고할 필요가 있다. 


부모도 나도, 우리는 모두 시대와 상황의 산물이다. 시대와 상황에 적응하고 저항하고 그 시대 상황에 스며들어 순응하기도 하고 반항하기도 하는 자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우리 모두가 다 피해자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두가 피해자라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그래서 우리가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부모는 부모대로 자녀는 자녀대로 시대와 상황에 책임을 전가하기보다 모든 시대와 상황을 넘어서시는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지를 귀 기울여야 한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요청은 수천 년 간 동일하게 유효했던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하나님은 그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기 위해 그 명령에 “그렇게 하면 하는 일이 잘되고 땅에서도 장수할 거라”는 보상의 약속까지 걸어 놓으셨을 정도다. 문제는 우리 쪽이다. 우리는 혹독하고 지독한 현실을 핑계 대며 그런 현실이 우리로 하여금 부모에게 순종하지 못하게 한다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고, 그런 말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어디까지 순종하셨는지를 생각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명하신 예수는 아버지께 순종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극단적인 고통 가운데서도 육신의 모친 마리아를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셨다. 우리에게 그런 모습의 순종을 앞장서서 보이시며 “나를 따르라!”고 하셨던 것이다. 우리가 새로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은 바로 주님 덕분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과 함께 그가 가신 길 위에 함께 서 있도록 초대 받았다. 주님은 틀림없이 우리가 그 길을 따라 가는 동안 형언할 수 없는 신비한 복과 영광과 만족과 평화의 선물을 얻게 하실 것이다.




[주]

1. 라인홀드 니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문예출판사, 2017. 원제: Moral Man and Immoral Society: A Study of Ethics and Politics, New York, 1932.

순종이란 말과 더불어 항상 깔려 있는 말씀이 ‘주께 하듯 하라’이다. 순종은 결국 믿음과 은혜의 이야기이다. 순종은 윤리도덕의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윤리도덕을 포함하기도 하지만, 그 이상의 복음과 은혜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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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정갑신

정갑신 목사는 예수향남교회의 담임목사로 총신대 신학과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원, 총신대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했다. 2009년 8월 예수향남교회를 개척한 후 예수향남기독학교 이사장직을 겸하고 있으며, (사)복음과도시 이사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대답하는 공동체’, ‘사람을 사람으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