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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역사와 지리의 단절을 견뎌내다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철원제일교회

by 이종전 · 장명근2023-06-16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대한 강토에 선 첫 세대 교회들을 찾아 떠납니다. 그 이야기들에서 우리 신앙의 근원과 원형을 찾아보려 합니다.

강원도 지역에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을 보면, 그 루트가 매우 다양하다. 이 지역은 또한 지리적인 요인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서 늦게 복음이 전해졌다. 태백산맥이 북에서 남으로 길게 자리하고 있어서 산맥의 동과 서는 전혀 다른 환경이다. 그뿐 아니라 산악지형이라는 지리적 환경은 같은 지역에 있는 도시와 도시도 단절시켰다. 따라서 복음이 전해지는 루트도 다양하고, 지역 분할 정책을 시행할 때도 지역에 따라서 다른 선교부가 맡기도 했다.


강원도에서 가장 먼저 교회가 세워지는 곳은 철원지방이다. 철원에서 기록상 가장 먼저 설립된 교회는 지경터교회이다. 이 교회는 원산에 자리를 잡고 개인적으로 진료와 선교를 동시에 하던 하디(Robert A. Hardie)가 서울과 원산을 오고 가는 길에 만나게 되는 철원지방에 처음으로 맺은 열매다. 하디는 캐나다장로교회 소속으로 활동하다가 1898년 5월 남감리교회선교부로 적을 옮기면서 원산에 자리를 잡게 되었고, 철원지방에 1901년 3월 김화 지경터에 공동체를 형성시켰다. 이것이 강원도 최초의 교회이다. 이 교회는 하디의 영향으로 시작된 1903년 원산부흥운동, 그리고 이어지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영향으로 함께 성장했다. 하지만 현재 지경터교회의 역사를 잇고 있는 교회는 없다. 정확하게 언제 소멸되었는지, 아니면 언제 다른 교회로 흡수되었는지 찾을 수 없다. 다만 지경터교회가 있었던 인근에 1956년에 설립된 지경장로교회가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철원제일교회도 본래 철원읍교회의 역사를 잇는 것을 전제로 재건된 교회이기 때문에 실제 역사는 단절되었다. 철원읍교회 역사의 무대가 되는 철원은 일제의 박해와 해방 이후 북한 공산당의 탄압이 이어진 곳이었으며, 6.25사변 당시에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현장이었다. 또한 휴전과 함께 민통선 안에 위치하게 됨으로써 본래 철원의 중심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었고, 현재 철원은 동성읍과 신철원 지역으로 옮겨진 셈이다. 따라서 철원읍교회는 역사를 잇지 못한 채 그 흔적만 가지고 있었다.


즉 해방과 함께 38도선 이북의 철원은 북한지역에 속하게 되었고, 북한에 정부를 수립하고자 하는 공산주의 세력은 기독교를 적대시했으며,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실제로 철원읍교회(현, 철원제일교회)에서 직선으로 불과 300미터쯤 떨어진 곳에 노동당사가 있을 만큼  광복 이후 철원지역은 공산당이 활동하는 최전선의 중심지였다. 


또한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그리스도인과 교회에 가해진 박해는 이곳에서 교회 공동체의 모임을 이어가는 걸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더 이상 민간인이 거주할 수 있는 곳도 못되었다. 이 때문에, 무너진 예배당만 폐허 그대로 방치될 수밖에 없었다. 


전후에는 누구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음에도 그러한 틈새를 이용해서 철원읍교회터를 사유화하는 일까지도 있었을 만큼 혼란스러웠고, 교회의 재산을 다시 찾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러니 교회가 그 역사를 잇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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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역경과 시련을 겪은 철원읍교회의 모습은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당시의 교회가 어느 정도 규모였는지 알 수 있을 만큼 튼튼히 세워졌던 벽체의 일부가 증언하고 있다. 아직도 당시 신자들이 드나들던 문지방에는 그들의 발자국이 느껴질 만큼 닳은 흔적이 그대로다. 철원 읍내가 완전히 없어진 상태에서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철원읍교회 앞에서 지금은 확인할 수 없는 옛 읍내를 내려다보면, 이곳에 살면서 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수많은 이들의 발걸음 소리가 교회로 몰려오는 듯하다.


그러면 철원읍교회는 언제 설립되었는가? 이 교회는 1905년 북장로교회의 웰번(Arthur G. Welborn, 1867-1928) 선교사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철원읍교회와 그 교회의 재건을 통해서 역사를 잇고 있는 현재의 철원제일교회의 시작은 장로교회였다는 의미이다. 장로교회 선교사인 웰번에 의해서 설립된 이 교회는 1907년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의 선교지가 분할정책과 그 조정 과정을 거치면서 철원이 남감리교회 지역으로 편입되어서 감리교회로 이관되면서 감리교회 역사로 계승하게 되었다. 따라서 1907년 이후에는 감리교회의 콜리어(Charles T. Collyer) 선교사에 의해서 관리되었으며, 1920년에는 예배당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때부터는 의료선교사였던 앤더슨(Albin Gerfield Anderson) 박사와 여선교사였던 어윈(Cordelia Erwin)이 이곳에 상주하면서 철원지방의 선교를 확대해나갔다. 1920년 철원지방은 남감리교회 선교부에 의해서 선교거점이 만들어지고 강원도 지역의 선교에 큰 역할을 하면서 교회뿐 아니라 병원과 복지시설을 운영하면서 지역사회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이 교회는 단지 양적인 성장만 한 것이 아니고, 사실상 이 지역에 정신적 문화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변화와 발전을 이끄는 데도 크게 역할을 했다. 즉 이 지역의 신교육을 위한 여러 사립학교(배영학교, 정의학교, 영동야학)를 설립하고 운영하면서 지역민들을 깨웠고, 교육을 통해서 국가의 미래를 꿈꾸게 했다. 이러한 일들은 이 지역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는 것은 철원의 역사가 말해 주고 있다. 


이렇게 성장하는 철원읍교회는 예배당이 필요하게 되었다. 1920년 남감리교회가 철원에 선교거점을 만들면서 지은 붉은 벽돌 예배당은 성장과 함께 비좁아졌고, 선교부의 사업도 다양해지면서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해서 1937년에 새 예배당을 마련하게 되는데, 그것이 지금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벽체만 남겨진 석조예배당이다. 이 예배당은 1,200평 대지 위에 건평은 198평이며,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지어진 고딕식 석조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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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터와 함께 무너진 벽체 일부와 자재로 쓰인 돌멩이들 일부가 남아있지만, 1937년 이 예배당이 지어졌을 때 예배당의 모습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 예배당의 설계는 일본과 한국의 근대건축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보리스(W. M. Voris)가 맡아서 했다. 보리스는 일반적으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국 근대건축사를 공부하거나 건축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하는 인물이다. 그는 평신도 선교사로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조선의 근대건축에도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일본 교토 인근의 오미하치만이라는 곳을 중심으로 오미미션이라는 선교거점을 만들어서 평신도 전문인 선교사로 활동했다. 특별히 비교적 자유로운 건축사로서 일본과 조선의 근대건축사에 영향을 크게 미쳤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그의 활동은 많은 건축물로 남겨졌다. 현재는 무너진 채로의 모습이지만 철원읍교회의 예배당도 그의 작품이다. 이 예배당을 비롯하여 당시 조선에 짓거나 그가 관여한 건물이 190채 정도라는 기록을 보아 우리나라 근대건축사에서 지나칠 수 없는 인물임은 분명하다. 현재도 국내에 남아있는 대표적인 건물로는 이화여자대학교 본관, 경북 안동장로교회 예배당, 중앙대학교 등을 들 수 있으며, 이제는 기억에만 남아있는 태화관 건물도 유명하다.


1920년 남감리교회 선교부가 이곳에 선교거점을 만들기 시작한 시점은 1919년 독립만세운동 직후였다. 철원읍교회가 크게 성장한 것은 이때부터였지만, 독립만세운동 당시 이 교회의 박연서 목사를 중심으로 이 지역 만세운동이 전개되었고, 만세운동이 진압되는 시점에 박 목사를 중심으로 철원애국단이라는 비밀청년단체를 결정하여 활동하다가 1920년 발각되어 많은 사람이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 교회와 장흥교회 등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행한 철원지역 독립운동은 이 지역사회에서 기독교를 바라보는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바꿈으로써 교회가 크게 성장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1936년에 이르렀을 때, 이 교회는 500여 명의 신자들이 모이는 상황이 되었고, 그 결과 새로운 예배당이 필요했다. 


예배당을 새롭게 지은 뒤, 이 교회 담임 강종근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일제의 ‘사상범 예비검속’에 걸려 1940년에 구속되었고, 서대문형무소에 복역하던 중인 1942년에 희생당했다. 이렇게 해방 이전에 이 교회는 국가의 현실과 함께 많은 고통을 당해야 했다.


해방 이후 공산당이 장악한 이 지역에서 철원읍교회 예배당은 기독청년들이 비밀리에 신앙을 지키면서 반공 투쟁을 하는 거점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따라서 해방 정국에 이 교회를 중심으로 좌우의 마찰은 불가피한 것이었고, 이 시기에 목회자와 신자 다수가 희생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희생이 구체적인 기록은 물론이고 사람들의 기억에서조차 지워진 상태라 더 많은 생각과 아픔으로 다가온다.


철원읍교회 예배당은 한국전쟁 당시에는 인민군 야전병원으로 사용되고, 그 지하실에서 양민 학살이 자행되기도 했다. 유엔군이 수복하는 과정에서는 예배당에 숨어든 인민군을 소탕하려는 목적으로 연합군이 예배당을 폭격하기도 했다. 그렇게 폭격으로 무너진 채로 세월이 흘러서 이제는 그 터와 흔적만 일부 남아있을 뿐이다. 


그나마 2002년에 이 터는 근대문화유산 국가지정문화재 23호로 지정되었다. 건물의 뼈대조차도 남지 않은 건물임에도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비록 온전한 형태의 건물은 아니지만, 그만큼 이 건물이 우리나라 건축사에서 담아내는 의미가 크다는 것이 아닐지. 


철원읍교회 예배당은 한국전쟁 때 폭격을 받아 무너졌는데, 사실 처음에는 이렇게 무너진 상태는 아니었다. 지붕과 일부 벽체가 무너진 정도였는데, 수복된 후에 주민들이 이 석조건물에서 돌을 모두 빼내어 팔거나 집을 지으려고 가져갔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전쟁 후 아무것도 없는 상황을 이해하지만,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그렇게 방치된 채로 민통선 안에 아무도 돌보는 이 없던 이곳을 이 교회 출신의 동송읍 장흥교회 이금성 장로의 수고로 되찾게 되었다. 수복 이후에 교회의 등기부를 확인하던 이금성 장로는 이곳이 이미 다른 사람의 명의로 되어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장로는 이곳을 다시 찾는 데 3년의 시간과 사재를 들였고, 결국 감리교유지재단에 귀속시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게 2013년 현재의 예배당이 건립되면서, 철원제일교회라는 이름으로 과거 철원읍교회의 역사를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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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이후 이곳은 비무장지대와 민통선이 그어지면서 민간인이 출입할 수 없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본래 철원 읍내는 없어졌다. 바로 옆에 있는 노동당사 앞에 가면 한국전쟁 전의 철원 읍내를 그려놓은 지도가 있다. 관심을 가지고 살펴본다면 이곳을 이해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은 출입이 자유로워져서 재건된 철원제일교회에 모일 수 있게 되었지만, 이전에는 여기도 허가를 받고서야 들어올 수 있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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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종전 · 장명근

글 이종전 

이종전 목사는 고베개혁파신학교(일본), 애쉬랜드신학대학원(미국)에서 수학하고, 1998년부터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역사신학을 가르쳤고, 현재는 은퇴하여 석좌교수와 대신총회신학연구원 원장으로 있다. 인천 어진내교회를 담임하며 인천기독교역사문화연구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C채널 ‘성지가 좋다’ 국내 편에서 역사 탐방 해설을 진행하고 있다.


그림 장명근 

장명근 장로는 토목공학 학부(B.S.)를 마치고 미시간주립대학교에서 환경공학(M.S & Ph.D)을 공부했다. 이후 20년간 수처리 전문 사업체를 경영하였으며 2013년부터는 삼양이앤알의 대표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정동제일교회의 장로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