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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가정에서 ‘가장’의 역할
by 장대선
2020-05-02
5월을 가리켜 흔히 ‘가정의 달’이라고 부른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그리고 부부의날 등이 5월에 모여 있기 때문이다. 가정의 중요성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바로 푸르른 5월이라 하겠다. 많은 교회에서도 가정과 관련한 행사를 5월에 기획하고 있다. 그만큼 우리에게 5월은 가정을 떠올리게 하는 달이다.그렇다면 가정의 달인 5월과 관련하여 우리는 성경에서 어떠한 지침 혹은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매년 5월에 교회가 가정과 관련한 행사를 기획할 정도로 가정이 중요하다면, 가정과 관련해서 성경은 어떠한 교훈과 지침을 기록하고 있는지 바르게 알아야 한다. 그때 비로소 5월 행사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가정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구약성경이건 신약성경이건 간에 성경은 가정의 ‘가장’(House Head)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대표적으로 구약성경의 모든 ‘톨레도트’(Toledot, 족보)가 가장인 아버지의 계보로 기록되어 있다. 신약성경에서도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16장 31절에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household)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함으로써 가장을 중심으로 가정을 언급하고 있다.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 즉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에 대하여 언급할 때도 개인보다는 ‘무리’(Flock)로서 다루고 있다. 그 무리가 때로는 ‘군대’(Army)로 표현될 정도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질서 있는 무리의 개념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언급하는 ‘개인’은 대부분 무리를 이끄는 사람, 혹은 무리를 이끌게 될 사람들인 것을 구약성경에서 분명하게 찾아볼 수 있다. 한마디로 성경은 믿음의 무리와 관련하여, 그리고 영적이든 물리적이든 간에 그 무리를 이끄는 인물을 중심으로 모든 교훈과 지침을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 개인화된 사회에서 개인적인 경건을 중심으로 신앙과 생활이 이뤄지는 모습과는 다르게, 성경은 이스라엘의 왕과 사사, 그리고 선지자를 이스라엘 무리(백성들) 가운데 보내어 세우고 질서 있게 이끌도록 하신 것이다. 심지어 신약성경에서도 믿음의 백성들은 사도들과 목사인 감독들의 지도 아래 장로들과 집사 직분의 직무 가운데서 교회공동체가 운영되도록 하셨다. 사무엘 밀러(Samuel Miller, 1769-1850)가 그의 책 ‘장로회 제도’(Presbyterianism, 1835)에서 언급한 것처럼, 장로들을 교회의 치리자로 세우는 장로회(Presbytery)로서의 교회를 신약교회로 세우셨다. 극히 제한적이고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한 통상적인 경우, 이러한 질서의 원리를 깨뜨리지 않는 것이 바로 성경의 맥락인 것이다.이와 관련하여 십계명의 다섯 번째 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 20:12)고 하신 계명이 나타내는 바를 생각해보자.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 계명은 단순히 부모님을 잘 공경하고 효도하라는 것뿐만 아니라, 부모로 대표되는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롬 13:1)는 것을 포함한다.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권세와 권위의 질서에 순종하고 따르도록 요구되고 있는 것이 바로 십계명의 다섯 번째 계명에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찍이 에덴동산에서 남자와 여자의 질서, 즉 남자의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를 지으시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 3:16)고 이르신 때로부터,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신 십계명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세와 그 권위의 질서에 순종하는 것은, 이를 명하신 하나님의 권세와 권위에 순종하는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모범이었다. 십계명의 첫 번째에서 네 번째에 이르는 계명을 준수한다고 하더라도 나머지 여섯 가지 계명, 특히 그 가운데서도 다섯 번째 계명을 따라 위에 있는 권위에 순복하지 않는 것은, 앞에 있는 네 가지 계명들도 지키지 않는 불순종이요 패역이 되는 것이다.하나님의 권위와 질서에 있어서 가정과 그 가정의 부모, 그 가운데서도 ‘가장’에게 순종하고 따르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구체적이고도 가장 기본이 되는 실천의 장이다. 가정에서 가장의 권세와 권위 아래에서 잘 다스림을 받으므로 그 확장된 형태로서 교회의 치리자들(가르치는 자와 다스리는 자)이나 국가의 관원들과 같이 위에 있는 권세와 권위에도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한 순종 가운데서 최종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실천할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는 이러한 권세 혹은 권위의 문제가 갈수록 부정적으로 인식되어, 페미니즘(Feminism)과 소위 성 소수자의 인권 보호와 같은 성 평등(sex equality)의 주장이 갈수록 일반화되기에 이르고 있지만, 그런 것들은 어떤 면으로 하나님의 권위 질서를 깨뜨리는 죄악의 바탕 가운데 있는 문화 현상이 분명하다. 그러한 현상들이 우리 사회에서도 본격적으로 공론화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권위 질서가 이미 심각하게 붕괴하고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가정에 대해서는 가장을 머리로 하는 질서에서 생각해야 한다. 개별적인 구성원들의 역할과 권리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의 다스림과 그 역할 가운데서 생각해야 하는 것이 가정이다. 특별히 신앙에서 가장의 역할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장로교회를 비롯한 대부분 교회에서는 가장을 중심으로 하는 가정의 경건 생활을 권장하며 지도하는 것이다.예컨대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는 ‘가정예배 모범’(The Directory for Family Worship)을 작성했었다. 스코틀랜드 교회에서는 이를 정식으로 채택했었는데, 가정예배 모범의 서문에서 스코틀랜드 교회는 이르기를 “본 총회는 개교회의 목사와 치리 장로들이 개교회에 소속된 각 가정에서 이같이 중요한 의무(가정예배의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닌지 부지런히 살펴보고 돌아보도록 명한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르기를 “만일에 그러한 가정이 발견된다면 그 가정의 가장이 먼저 그 잘못을 시정하도록 사적인 권면이나 경고를 받아야 할 것이며, 그런데도 계속해서 그러한 잘못을 시정하지 않고 그대로 있으려 한다면 당회(a Consistory, 즉 지교회의 치리회)에 의해 엄중한 책망을 받도록 해야 한다.”라고 했다. 바로 그러한 책임과 의무를 전제하기 위해서 가정을 구성하는 첫 관문인 결혼예식과 실질적인 가정을 구성하게 되는 첫 과정인 출산 후의 유아세례가 모두 예배당에서 교회의 회원인 회중 전체가 바라보는 가운데 행해진 것이다.가정에서 가장의 역할, 특히 주일과 관련한 가장의 역할을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신학자로서 참여했던 윌리엄 구지(William Gouge, 1575-1653)의 ‘거룩한 안식일’(The Sabbaths Sanctification, 1641)이라는 글이 잘 설명하고 있는데, 그의 글에 따르면 가장의 역할과 그 수행으로 말미암아 “개인의 집은 하나님의 교회”가 될 수 있다. 사무엘하 6장 12절에 기록된 오벧에돔의 집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시며 복을 주신 것과 같이 주일에 가정에서 행하는 사적인 경건의 의무들이 정당하고 충실하게 이행될 때, 개인의 가정에도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며 복 주시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신약시대에도 여전하여 “두세 사람이” 그러한 목적으로 함께 모일 때, 즉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모여 예배하는 자리에 그리스도 또한 함께하시는 것이다(마 18:20).그뿐만 아니라 구지는 그의 글에서 주일에 행할 사적인 의무로서의 가정예배에 대해 더욱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이러한 의무들을 이행할 때, 그들 중에 능력이 있는 사람은 [구약시대에나 신약시대에나 항상] 그렇게 해왔던 바와 같이, 다른 모인 자들의 입이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교리문답을 시행하고, 설교를 되뇌며 신앙의 기초를 가르치도록 한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또한 “가능한 한 가정의 ‘가장’(구지는 여기서 가장을 가리켜 가정의 ‘다스리는 자’라 칭한다.)이 이러한 의무를 행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라고 말한다. 그런즉 가정예배를 비롯한 사적인 경건의 의무들은 가정의 목회자인 가장의 책임과 의무 가운데 행하는 것이 합당하다.그러나 안타깝게도 현대의 기독교 가정에서 이러한 가장의 역할이 중요하게 여겨지거나, 혹은 중요하게 자리하고 있는 경우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가장이 가족 구성원들, 특히 자녀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보살피는 것은 분명히 필요한 것이며, 또한 요구되는 덕목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가족 구성원들이 가장에 대한 이해와 신뢰, 그리고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분명하게 세워져야 한다. 이것이 성경에 근거하는 교회의 신앙 전통이다.이러한 가정에서 가장의 역할과 의무는 공적인 교회의 틀과 예배가 경건하고 거룩하게 서는 바탕이요 기초이다. 그렇기에 일찍이 웨스트민스터 총회와 스코틀랜드 교회에서는 가정예배 모범을 작성하여 지교회의 치리회가 가정의 가장을 권면하고 지도하는 지침을 마련한 것이다. 이는 구지의 책에서도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다. 구지는 이에 대해 언급하기를 “교회에 가기 전에, 그러한 경건의 의무를 수행함으로 성도는 공적인 예배에 더욱 적합하게 된다. 그리고 교회에 다녀온 후에, 이러한 사적인 의무를 수행함으로 공적인 의무들이 더욱 우리에게 유익하게 된다.”라고 했다. 즉 “이러한 사적인 의무들을 행함으로 우리가 교회에 있지 않을 때도 거룩해질 수가 있는 것”이다.가장의 역할, 특히 주일을 거룩하게 성수함에 있어서 가장의 역할과 의무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고 교회의 지도와 관리를 병행하는 것이야말로, 가정의 달 5월에 교회가 더욱 중점을 두고 강화해야 할 올바른 취지일 것이다. 공적인 회중으로서의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로 세우기 위한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목사와 장로의 직분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정을 사적인 하나님의 교회로 세우는 책임과 의무를 위하여 가장이 있음을 기억하여 더욱 특별하게 실천하는 5월이야말로 진정으로 기독교회가 지향해야 할 가정의 달일 것이다.
가정
가족
어린이날
어버이날
사무엘밀러
페미니즘
가정예배모범
가정의달
톨레도트
디지털 미디어를 사용하는 지혜
by Michael Sacasas
2020-05-01
우리는 앞날을 알 수 없다. 매일 바쁘게 살다 보면 이런 사실을 잊곤 한다. 하지만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 종종 당황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여러 나라가 지난 몇 달 동안 전 세계를 집어삼킨 코로나19 바이러스와 싸우는 데 여념이 없는 지금이 바로 그런 때이다.우리는 갑자기 시간이 정지된 것 같은 세상에 살게 되었고, 일상은 모든 것이 뒤죽박죽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이제는 못쓰게 되어 버린 옛 습관과 일상 대신에 새로운 일상의 습관을 찾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시간도 예상치 못하게 왜곡되는 듯하다. 우리가 당면한 현재의 위기는 우리의 옛 습관이나 행동, 또는 우리가 "정상"이라 부르던 것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볼 기회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일정을 질서 있게 통제하고 시간을 잘 관리해오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토록 오랫동안 우리의 일상이 지장을 받는 일은 전례 없는 것이다. 이 사태로부터 많은 사람이 교훈을 얻을 것이고,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에게 유익이 될 것이다. 지금은 또한 디지털 미디어와 우리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볼 좋은 기회이다. 지난 수년간, 우리 삶에서 디지털 기술이 차지하는 비율이 점점 늘어나는 것을 우려했다. 모바일 기기와 그야말로 없는 곳이 없는 무선 네트워크로 인해, 과거에는 데스크탑 컴퓨터를 켜서 가끔만 사용하던 인터넷이 이제는 우리의 삶 전체 영역으로 확대되어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디지털 미디어가 우리 삶을 뒤덮음으로 말미암아 개인정보의 특성, 시민 사회의 건강성, 노동의 가치, 인공 지능 기술의 발전 상황, 인류 번영의 조건 등에 관한 윤리적, 법적, 철학적, 심지어 신학적인 질문까지 하고 있다. 서로 물리적 간격을 유지해야 한다는 합당하고도 거센 사회적 압력 때문에, 이제 우리 대부분은 사람들과 연락하고 매일의 업무를 지속하기 위해 디지털 도구에 의존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디지털 도구들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것과 해줄 수 없는 것은 무엇인지, 또한 이러한 불확실성과 염려의 시대에 우리가 그것들을 어떻게 하면 지혜롭고도 창의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 깊게 고민해봐야 한다.우리가 쓰는 앱이나 기기에 이미 많이 설치되어 있고, 코로나19 상황을 추적 및 감시하여 그 확산을 저지하려는 목적으로 디지털 감시 장비를 탑재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가 뜨겁다. 이러한 논의를 관심을 갖고 지켜볼 만한 것은 분명하나, 이 글에서는 이러한 위기의 시기에도 우리가 평상시처럼 사용하는 디지털 기술에 좀 더 초점을 둘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대부분은 이제 정보를 취득하고 사람들과 연결하기 위해 평소보다 더욱더 디지털 기술에 의존하리라는 것이다.우리의 건강 문제에 직결된 위기의 때에는 우리 자신, 가족, 그리고 공동체를 돌보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가장 좋은 정보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 디지털 기술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정보를 얻게 해 준다. 적은 노력으로도 우리는 전 세계의 대표적인 전염병 학자들, 바이러스 전문가들, 그리고 전문 의료 인력들의 견해를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다. 여러 나라의 상황이나 국제 보건 기구들, 각 지역의 의료 및 응급 시설에 관련된 상황도 실시간으로 살펴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 몸의 건강과 우리 사회의 건강에 잠재적으로 독이 되는 가짜 정보 역시 쉽게 접할 수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공포감에 사로잡힌 일부 사람들이 검증되지 않은 약을 먹거나 확인되지 않은 치료법을 시도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에 대해 보건 관계자들이 경고하고 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이 바이러스의 기원을 논하거나, 이 바이러스의 치명적 위험성을 과소평가하는 이들도 쉽게 만날 수 있다.이러한 정보의 지형도를 탐색할 때는 당연히 지혜가 필요하다. 디지털 미디어 사용자들은 언제나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위험한 정보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다. 전염병이 창궐한 지금은 더욱더 신중해야 한다. 디지털 미디어로 둘러싸인 이 환경이 우리에게 주는 또 다른 위험은, 우리가 아무리 조심하여 건전하고 믿을 수 있는 정보만 접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디지털 미디어와 우리의 관계가 건강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최신 정보를 찾아 미친 듯이 뉴스피드(news feed)를 확인하고 있을 것이다. 불난 집 구경을 멈추기 힘든 것처럼, 뉴스 확인을 멈추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SNS는 강박적으로 뭔가에 참견하는 것을 조장하도록 고안된 것이다. 의지할만한 지도도 없이 모두가 출구를 찾으려 애쓰는 이런 상황에서는 그 위험이 더 커진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정보를 습득하고자 하는 갈망이 너무 크면 그것이 우리를 마비시키거나 감정적으로 압도해버릴 수도 있다.정보가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것과 해줄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아야 한다. 바이러스의 전파를 늦추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면 당연히 좋은 정보가 있어야 한다. 우리 지자체에서 시민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어떻게 하면 섬길 수 있을 것인지 알아야 한다. 이런 일을 감당키 위해서는 좋은 정보가 필요하다. 하지만 더 많은 정보나 더 좋은 정보가 있다고 해서 염려가 해소되거나 평안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본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사람들은 두려움을 누그러뜨리고 끔찍하리만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할 요량으로 정보를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추구하는 정보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없다. 만일 당신이 지금 그런 식으로 행동하고 있다면 디지털 기기들을 잠시 옆으로 치워두고 기도로 두려움과 염려를 다루도록 해보라. 매일 특정 시간에만 최신 뉴스를 확인한다거나, 필요한 경우 뉴스피드를 완전히 꺼버리는 것도 지혜로운 방법이다. 아침에 믿을만한 몇몇 뉴스를 신속히 훑어본 후 곧바로 일과를 시작하는 것도 좋겠다. 내가 전문 의료인이나 응급 대책반이 아니라면 코로나19 바이러스 환자 수를 세세하고 정확하게 알 필요는 없다. 내가 입법이나 정책 전문가가 아니라면 바이러스 해법에 대해 논쟁하고 싸우는 정치인들에 대한 뉴스를 계속 읽을 필요는 없다. 정보 과잉의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행동할 수 있는 만큼의 정보만 취득하는 지혜이다. 상식에 안 맞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사실 정보를 너무 많이 취득하는 것은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을 방해할 수도 있다. 정보를 얻는 수단으로 디지털 도구를 사용하는 것 외에도 많은 이들이 가족이나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영상(screen)에 의지하고 있다. 많은 교회는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디지털 도구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고, 교제하는 공동체는 우리의 행복을 위해 필수적이다. 지금은 우리에게 익숙해진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말은 사실 ‘물리적 거리 두기’라는 말로 바뀌어야 한다고 누군가가 지적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물리적으로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일정 기간 이를 성공적으로 해내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는(socially)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우리 대부분은 이제 디지털 방식으로 서로 연결하는 일에 아주 익숙하다. 문자, SNS, 또는 페이스타임(FaceTime) 같은 앱은 우리 삶에서 일상적인 부분이 되었고, 과거와 비교했을 때 사용 빈도가 큰 폭으로 증가했다. 상호 격리의 시기인 지금 화상 회의(videoconferencing) 프로그램들은 매우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도구들은 비록 불완전하기는 해도 다른 이들과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도록 해준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의 미소와 목소리를 통해 위안을 느낀다. 그러한 위로를 잘 누리는 것이 필요하다.교제를 위해 오랜 시간 디지털 수단에 의존하게 되면 우리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교제의 중요성을 더욱 깨닫게 된다. 사람은 영과 육의 전인적인 필요가 채워질 때 행복해질 수 있다. 우리는 육체를 지닌 피조물이다. 다른 피조물들처럼 우리에게도 육체가 주어졌다. 이는 태초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일이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참된 소망은 우리가 육신의 감옥에서 영원히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부활에 동참하여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재 우리의 육신은 우리 인성의 핵심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친구나 가족과 얼굴을 맞대어 보는 것을 갈망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영상으로 듣는 설교를 통해서도 기쁨을 누릴 수 있지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형제자매들의 목소리에 둘러싸여 예배드릴 그 날, 서로에게 교제의 악수를 청할 그 날, 다시 한번 성찬의 떡과 잔을 받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수단을 맛볼 그 날을 고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우리는 또한 외로움과 고독의 차이를 재발견하게 된다. 외로움이 사람의 행복을 무너뜨리는 것이라면 고독은 우리의 행복에 꼭 필요한 것이다. 너무 오래, 우리는 서로 피상적으로 연결하는 일에만 관심을 쏟고 진정한 고독을 추구하지 못했다. 만일 이렇게 어려운 시기를 통해 우리가 디지털 소통 기술의 한계를 절감하고 그것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기로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큰 소득이 아닐 수 없다. 출처: www.ligonier.org 원제: Pandemics, Digital Media, and Anxiety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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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지면에 흩으심과 사회적 거리두기
by 정요석
2020-04-30
노아의 때에 사람의 죄악은 세상에 가득하였고, 생각하는 모든 계획은 항상 악하였다. 하나님은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시며 그들을 지면에서 쓸어버리시겠다고 하셨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어 방주를 지음으로써 대홍수에서 살 수 있었다. 하나님은 살아남은 노아 가족 8명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다. 그들이 충만할 수 있도록 모든 동물을 그들의 손에 붙이셨고, 먹을 것으로 주셨다. 그들에게 다시는 땅을 멸할 홍수가 없다는 무지개 언약도 약속하셨다. 이런 축복과 언약을 받은 노아는 세 아들의 출산을 통해 많은 백성을 이루었다. 그때 온 땅의 언어는 하나였다. 이들은 벽돌과 역청으로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고자 하였다. 다시 악해진 것이다. 이들이 건설하는 성읍과 탑을 보신 여호와께서는 이들이 한 족속이고 한 언어를 사용하므로 이런 일을 시작하였고 이후로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다 하시며,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다. 그들은 온 지면에 흩어졌고, 도시 건설은 자연히 멈추었다.언어의 혼잡으로 이들이 온 지면에 흩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거룩하게 살 기회를 다시 주신 것이다. 사람들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내면서 생육하고 번성할 기회를 다시금 주신 것이다. 하지만 흩어짐 이후로도 인류는 죄를 짓기에 바빴다. 하나님은 진노와 격분으로 죄악의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질병의 유행과 유황과 불 등으로 멸하시기에 이른다(신 29:23). 그러나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신지라 부분적으로만 인류를 징계하셨다. 코로나19 대감염으로 세계가 멈춰 섰다. 각국이 국가와 도시를 봉쇄하고, 사회적 거리두기와 자가 격리가 실천되고, 학생의 등교가 멈추고, 산업과 경제 활동의 위축으로 회사가 파산하고 개인이 실직하고 있다. 그런데 그 여파로 생각지 않은 현상들이 발생하고 있다. 무엇보다 항공기와 차량과 선박의 운행 감소로 대기와 수질이 좋아지며 보이지 않던 산들과 물속이 또렷하게 보이고, 맑은 하늘에 구름은 떠다니고, 동물들이 도시에 출몰하고 있다. 코로나19 대감염으로 인류에게 다가온 부정적 현상이 정말 심각하고, 인류의 행복에 큰 지장이 될까? 성경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알라고 말한다. 대감염으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는 사람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비행기를 타고 여행하지 않아도, 프로 스포츠가 열리지 않아도, 여러 모임이 열리지 않아도, 퇴근 후 바로 집으로 돌아와 시간을 보내도, 교회의 여러 모임이 취소되어도 사람의 기쁨과 행복에 큰 지장이 없음을 알게 하고 있다.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져 파멸과 멸망에 빠진다. 부하려 하고 높아지려는 자들이 서로 충돌하며 싸움과 고소와 폭력과 살인이 벌어지고, 국가 간에 전쟁이 벌어진다. 인류가 치열하게 경쟁하며 사는 바쁜 삶이 실은 행복과 평안을 쌓는 것이 아니라,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 돈의 사랑과 자기 높임을 쌓는 측면이 강하게 있는 것이다.전염병이 대감염의 수준에 이르면 어느 한 도시나 국가에 발병의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지구적 현상으로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에 있을 수 있다. 언어를 혼잡하게 하심으로 사람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던 하나님께서 왜 이번에 바이러스의 퍼짐으로 사람들을 흩으시고 격리하시는지 이유를 살펴야 한다.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빠져 바쁘게 돌아다니고, 쓸데없는 자원낭비와 환경오염을 일으키며 욕망의 바벨탑을 쌓는 인류가 그 행위를 스스로 절제하지 못하고, 앞으로 어떤 기형적인 일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게 하심으로 자신의 내면과 인생의 본질을 살피게 하시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한다.스마트폰이 발달되어도 사람간의 소통은 오히려 줄어들고, 교통이 발달하여도 정작 중요한 사랑과 정은 전달되지 않고, 아파트는 날로 진화하여도 가족의 평안은 줄어들고 있다. 과학의 발전이란 평안이 아니라 편리를 가져온 데 지나지 않고, 잠시 즐거운 장난감에 지날 뿐이다. 처음 성을 쌓고 도시를 이룬 일도, 가축 치는 일도, 수금과 퉁소를 잡는 일도, 구리와 쇠로 여러 기구를 만드는 일도 모두 가인 계열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도시와 산업과 예술과 과학의 발달이 사람의 욕망과 이름을 내는 데 사용되기 쉬운 것임을 나타낸다.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을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지만, 혀는 능히 길들일 수 없다. 사람은 길들여지는 존재가 아닌 것이고, 인류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절제하지 않는다. 코로나19 대감염 없이 어떻게 올림픽과 각종 스포츠와 박람회와 축제가 연기 내지 폐지되겠는가? 코로나19 대감염은 외형적으로 많은 사망과 활동의 위축을 가져오지만, 내면적으로 인간 존재의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지 전 인류로 생각하게 한다. 하나님께서 언어의 혼잡을 통해 사람들을 흩으심으로 인류에게 다시 기회를 주셨듯, 코로나19 대감염으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해 과학의 발달과 주요 언어로 다시 하나가 되어 흩어짐을 면하며 자신들의 이름을 높여온 인류에게 다시 기회를 주시는 것일 수 있다. 특히 신자들은 하나님께 영광되지 않는 많은 것들을 내려놓아야 한다. 가인과 같이 성을 쌓고 도시를 건설하며 자신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부르는 짓을 교회와 목회라는 이름으로 교묘하게 할 수 있다. 신자들은 코로나19 대감염이 빨리 종식되기를 기도해야 하겠지만, 동시에 무엇이 사람의 첫째 되는 목적인지를 그리고 우리가 진정 하나님 자체를 즐거워하는지를 숙고해야 한다. 하나님은 구약시대만이 아니라 지금도 질병의 유행을(신 29:22) 통해 경고하시고 징계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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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문제로 힘들어하는 당신에게
by Amy Dimarcangelo
2020-04-29
약 1년 전, 남편은 소매업을 시작했다. 새로 시작하는 많은 벤처기업과 마찬가지로, 불확실성과 재정적인 부담이 있고, 일터에서도 오랜 시간 일해야 했다. 다행히도 점차 자리를 잡아가며 꾸준히 성장했다.코로나19 바이러스가 덮쳤다. 처음엔 매출이 줄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매출은 곤두박질쳤다. 증시가 폭락하자 이미 주문받은 것의 대부분이 취소되었다. 지금은 사업의 미래와 그에 따른 우리의 재정이 암울해 보인다.이 세계적 유행병은 많은 사람에게 재정적으로 타격을 주었다. 직장이 문을 닫은 계약직 직원들,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않아서 출근하지 못하는 부모들, 급격한 재정 감축으로 직장을 잃은 사람들, 우리 같은 중소기업의 경영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우리는 대부분 이런 폭풍을 견뎌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우리는 당장 교회의 보살핌이 필요하다.연락하라위기가 닥치면 우리는 자신의 머릿속에 갇힐 위험이 있다. 미래를 걱정할 때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 교회가 진리와 사랑으로 손을 내밀어 암울한 상황을 벗어나도록 도와주길 바란다. 교회가 사람들의 어려움을 살피고 돌봐준다면 그들은 하나님이 돌보고 계신다고 생각할 것이다. 비록 지금은 우리가 아직은 얼굴을 마주 보고 자유롭게 교제할 수 없지만, 전화나 문자, 이메일은 우리의 잘못된 생각을 중단시키고 다시 하나님께로 향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도움을 주기 위해 항상 진지한 대화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혼란한 상황에서 가장 좋은 위로의 방법은 혼란스러운 상황의 이야기를 멈추는 것이다. 어떻게 힘든 상황에서 행복을 경험하도록 할 수 있을까? 웃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적절한 유머는 영혼을 즐겁게 한다.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잠 15:13)계속 기도하라당신이 도울 방법은 제한적이다. 당신이 건네는 격려의 말이 진실하고 시기적절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성령님만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당신은 우리를 위해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은 사람들의 기도에 귀 기울이신다. 하나님께 우리의 시련을 아뢰며 참된 격려와 평안을 구하고,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기를 기도한다면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것이다.하나님은 우리가 예상한 대로 행하지 않으시지만, 완벽한 지혜로 우리의 기도에 항상 응답하신다. 당신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에게 위로가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누군가를 위해 기도해야겠다고 생각할 것이다.실질적인 도움을 주라교회는 재정적 어려움 속에서도 어려운 사람을 보살피고 도왔던 아름다운 역사가 있다.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받을 만한 증인이었던 초기 교회 성도들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재산을 팔아 나누어 주었다.(행 2:45) 그들은 서로 필요를 채움으로써 값진 사랑을 보여주었다.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섭리와 그 뜻이 무엇인지를 구해야 한다. 특히 지금은 그분의 부르심에 주의하고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좋은 시간이다. 성도 중에 아이를 돌봐줘야만 일을 할 수 있는 부모들이 있다. 집세를 걱정하는 월급쟁이 가정들이 있다. 사업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지만, 월급도 없이 집으로 돌아오는 사업주들이 있다. 따뜻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행동한다면 당신은 누군가의 기도에 응답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자비로운 마음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돕는 믿음을 세울 것이다. 벌벌 떨면서 자기만 살길을 찾는 대신에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할 것이다. 마케도니아 교회는 혹독한 고난의 시험 속에서 기쁨으로 베풀었다(고후 8:1-2). 마케도니아 교회의 이러한 선례를 따라, 지금은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 중 많은 사람이 큰 어려움 속에서도 기쁨으로 베풀 기회이다.당신의 어려움도 함께 나누자시련과 함께 스스로 해결하고자 하는 유혹이 찾아온다. 당신의 고난과 어려움이 우리가 당한 것과 다를지라도 이를 공유한다면, 혼자만 어려운 상황에 있지 않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도 알게 할 수 있다. 시련을 겪는 사람에게 가장 큰 위로는 때로 시련을 겪는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일일 수 있다. 성도 간의 사랑은 양방향이다. 내 짐을 함께 들어줄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 또한 다른 사람의 짐을 짊어지라고 부름을 받았다.몸의 건강을 돌보듯이 우리가 서로 보살필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실 것이다.더 큰 계획을 기억하라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 신실함을 잊곤 한다. 우리는 욥을 깨닫게 하시고, 에스더를 지키시며, 룻에게 공급하신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 여전히 그분은 보좌에 앉아 계시며, 전쟁, 자연재해, 전염병, 그리고 경제 붕괴가 그분의 주권 안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설령 최악의 시나리오가 예상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변치 않으신다. 그분의 계획은 변치 않는다. 하나님은 여전히 잃어버린 영혼을 찾고 계시고, 구원하고 계시며,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도록 일하고 계신다. 우리의 일상이 지금 당장은 다르게 보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앞으로 더 나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궁극적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의 근본적인 안전도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이야기 중 일부이다. 내일, 다음 달, 내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이야기가 승리로 끝난다는 것은 알고 있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Help! Now I’m Financially Stressed번역: 송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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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격변하는 역사 속의 하나님
by 옥성득
2020-04-28
한국 기독교 역사 연구는 1980년대까지 현대사 연구에 투자해야 한다. 1876년 이후 한국 근현대사를 흔히 개항기(1876-1910), 일제 식민지 시대(1910-45), 해방과 건국기(1945-1960), 독재와 경제 개발 시대(1961-87), 민주화 시대(1987-현재)로 구분을 한다. 현재 한국사 연구는 박정희 대통령 시대(1961-79)는 물론 전두환 대통령 시대까지 본격적으로 하고 있다. 41년 전에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었기 때문에 두 세대가 지난 시점이고, 소위 ‘87년 체제’가 끝난 지도 33년이 지났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 기독교 역사는 아직 일제 강점기 연구도 제대로 안 된 상태이며,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연구는 초보 단계이다. 현재 한국 기독교의 여러 문제에 대한 역사적 이해를 위해서는 빨리 해방 이전 시대의 연구에서 60-80년대 연구로 들어서야 한다. 한국 근현대사는 격변의 연속이다. 10년마다 주요 사건이 발생하고 35년마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사회가 되더니, 최근에는 그 변화에 가속도가 붙어 10년에서 20년마다 대위기가 오고 체제가 변하고 있다. 그만큼 교회도 변해야 한다. 하지만 역사적 과제를 정리하지 못한 채 새 시대를 맞아야 하기에 발달 지체와 변화 지체라는 중증에 걸려 있다. 한국 근현대사를 다음과 같이 주요 사건과 위기를 중심으로 변동하는 주기를 그려보았다. 해방 이전에도 위기가 많았으나 해방 이후에도 여러 차례 위기가 찾아왔다. 1910년의 일제 강점, 1929년의 대공황, 이후 계속된 몇 차례의 전쟁, 1950년 6.25 전쟁으로 정착된 냉전 체제, 그로 인한 1961년 5.16 쿠데타와 1972년 10월 유신 체제의 발전, 1980년 5.18 광주의 비극, 1997년 IMF 경제 위기, 2008년 세계 경제 위기, 2020년 코로나19 위기가 왔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위기를 만날 때마다 이를 극복하는 저력을 보였다. 1919년 삼일운동 이후 자주독립을 추구했고, 자유민주 진영의 도움으로 1945년 해방과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을 맞이했다. 1960년 4월 혁명으로 되살린 민주주의 정신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민주화 항쟁, 2017년 촛불 항쟁으로 이어졌다. 이런 한국 사회의 정치 경제적 대위기와 그것들을 극복하려는 민주, 자유, 평등의 정신은 당시를 살았던 세대에게 상징적으로 붙여서 말하기도 한다. 감수성이 강한 20세에 위기를 겪은 세대, 즉 1960년에 4.19 세대, 1980년에 86세대, 1997년에 IMF 세대를 탄생시켰고, 올해 20세는 코로나19 사태를 겪는 코로나19 세대가 형성되고 있다. 이제 그들은 만으로 80세, 60세, 43세, 20세로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네 세대를 대변한다. 현재 70-80대가 민주화로 출발하며 산업화를 이룬 세대라면, 50-60대는 산업화를 완성하고 민주화를 심화했으며, 지금의 30-40대는 한국을 세계화하는 주역이었다. 새롭게 맞는 팬데믹 시대에 10대와 20대가 어떻게 위대한 대한민국을 만들지 기대된다.이런 사회와 세대의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변동 속에서, 한국 교회는 세대별로 어떤 새로운 패러다임의 신학(교회론, 선교론, 정치론 등)을 가지고 살았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깊이 있게 연구하고 토론해야 한다. 그중 하나가 한국 교회 자체의 문제와 씨름한 역사적 자료를 풍성하게 확보할 수 있는 한국 기독교 역사 연구이다. 불확실성의 시대에는 역사가 내비게이션의 역할을 한다. 현재 한국 교회 역사 연구 현황을 보면 안타까운 실정이다. 첫째, 한국교회사를 연구하는 학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신학교에도 전공 교수가 별로 없다. 둘째, 얼마 되지 않는 학자 중 주류는 60대 이상이다. 30대와 40대 학자가 별로 없다. 셋째, 일제 강점기를 연구하거나 연구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넷째,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시대의 한국 교회 역사에 대한 연구물이 별로 없다. 한국 기독교 역사를 공부하려면 한국사와 세계 교회사를 공부하고 이어서 해당 시기의 1차 자료를 읽어야 한다. 해방 이전 시대를 연구하려면 한문과 일본어와 국한문이라는 세 가지 외국어를 해야 하므로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해방 이후도 여전히 영어 자료와 국한문 자료를 읽어야 하므로 어학 실력은 기본적으로 필요하다. 무엇보다 해방 이후는 다양한 1차 자료와 2차 자료가 넘치기 때문에 엄청난 양을 읽고 소화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사회과학과 인문학을 두루 섭렵하지 않으면 좋은 교회사 학자가 되기 어렵다. 한국 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알기 위해서는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 누가 그 어려운 공부를 할 수 있는가? 교회와 독지가는 한국 기독교 역사를 연구하는 여러 연구소를 지원하고, 석박사과정의 학생 장학금을 지원하고, 한국교회사 자료집 시리즈 프로젝트에 기부하고, 논문상과 저술상을 만들어 사학자들을 길러야 한다. 교회 건물 하나에 수백억을 투자해도 교인이 없으면 건물은 이단에 매각될 수도 있다. 그 수백억을 한국교회사 연구에 투자한다면, 한국 교회의 활로가 보일 것이다. 향방 없이 달리기보다는 멈추어 서서 반성하고 생각하는 교회라야 살 수 있다. 박물관 자료를 수집하는 교회사 공부가 아니라, 30년, 50년을 내다보며 교회의 방향을 제시하는 공부가 되기 위해서 해방 이전 70년(1876-1945)의 역사, 해방 이후 70년(1945-2015) 역사를 신학화하는 기독교 역사 공부가 되어야 한다. 한반도와 세계의 격변하는 역사 속에서도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향후 30년의 역사 속에도 인도하실 것이다.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교회를 살리는 한국 교회 역사 연구에 20대와 30대 신진 학도들이 도전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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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시대
혼자여서 좋은 점을 활용하라
by Rusty McKie
2020-04-27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 두기에 대한 반응이 사람마다 약간은 차이가 있는 듯하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너무 힘들어 하며 우울감을 호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 기간이 내향적인 성격의 사람들에게는 꿈에도 그리던 시간일 수도 있다. 이들이 SNS에 올린 우스운 사진도 여러 장 보았다. 다른 사람과 관계하며 유지되던 우리의 삶은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멈춰졌지만, 대인관계를 부담스러워하던 이들에게는 사회적 거리 두기가 오히려 편안한 시간이 된 것이다. 격리 기간이라 해도 아픈 사람들을 위해 계속 기도하고 취약 계층에 있는 이들을 보살피겠지만, 집 안에 머물며 그저 넷플릭스를 보게 되어 아주 신이 난 사람들도 있다. 이해는 한다. 목사로서, 어린 자녀들의 아버지로서, 내 삶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흔치 않은 시간, 그 아름다운 고독(solitude)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그 시간에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꿈꾸게 된다.하지만 혼자서 누리는 자유의 시간, 그 초반의 흥분이 가시고 나면 외로움을 느낀다. 사람들이 그립다. 내 가족, 친구, 그리고 교회처럼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보고 싶다. 이런 패턴이 앞으로 또 얼마나 오래 계속될지 알 수가 없다.복잡한 사회에서 벗어나 혼자 있게 되면 처음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은 자신이 너무도 바쁘게 살아왔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게 될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TV 프로그램을 보며 웃고, 평소에는 결코 사 먹지 않았던 즉석식품을 쌓아 놓고 즐긴다. 고립이라는 햇빛 아래에서 일광욕을 즐긴다.하지만 많은 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슬픔, 늘어난 걱정, 우울, 그리고 인간관계를 더 갈망하는 마음으로 힘들게 될 것이다. 외로움이라는 유행병(epidemic)은 벌써 퍼져가기 시작했다. 우리 문화의 외로움이라는 유행병이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해 대규모 전염병(pandemic)으로 번진 것은 아닐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강요된 외로움많은 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고문 방식은 그냥 홀로 두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음악을 듣거나 보지도 않는 영상을 틀어서 소리가 나도록 한다. 아니면 바삐 움직여서 혼자라는 사실을 잊게 한다. 우리의 일정이 다른 사람과 만남으로 채워지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이런 상황에 질병관리본부에서 장기간 서로 격리된 상태로 지내라고 권고한다면 어떻게 될까?사회적 거리 두기를 언제까지 할 것인가에 대해서 전문가들조차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의 사회적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경제 침체를 다루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 침체”를 다룰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스스로 외로운 곳을 찾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외로운 상황이 되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을 귀하게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악으로 의도된 것을 기적적인 선으로 바꾸신다(창 50:20; 롬 8:28).혼자만의 자리 만들기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는 더욱 전심으로, 또한 더욱 희생적으로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한적한 곳”으로 가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따랐다(눅 5:16). 우리 영혼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듣기 위해서는 고독과 침묵이 꼭 필요하다. 이제 우리가 감당해야 할 날들에 있어 첫 번째 관문은 우리가 만날 고독의 처소를 시끄러운 곳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겪는 이 시간은 하나님과 차분하고 고요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온 세상이 완전히 무너지는 것처럼 느껴질지라도(시 46),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잠잠히 기도하며 그가 우리의 하나님 되심을 깨닫고, 이것이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런 대규모 전염병 뒤에 숨겨져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난관, 염려, 그리고 외로움으로 인해 우울증이 심해질 수 있는 이들의 어려운 상황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니다. 그런 어려움은 실재한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통해 서로의 짐을 나누어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지금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세상과는 잠시 담을 쌓을 수 있으나 하나님을 향해 담을 쌓아서는 안 된다. 두려움이나 무감각으로 우리를 유혹하는 목소리들을 거부해야 한다. 대신, 선하고 주권적인 왕 앞에서 우리의 영혼을 고요하게 하자(시 131).영혼의 필요 채우기우리가 외로움을 겪는 것은 다른 사람과 관계 맺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관계에 대한 열망이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계기가 되도록 해야 한다. 이 말은 우리가 맞닥뜨려야 하는 삶을 부인하고 광야로 들어가 고립되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 그리고 다른 이들을 위해 우리는 예수님과의 관계를 발전시켜야 한다. 우리가 겪는 외로움은 애통해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느껴볼 기회이다. 우리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창궐하여 망가진 이 세상을 애통해한다. 사람들이 고통받고 죽음에 이르는 이 무자비한 상실로 슬퍼한다. 우리 가족들이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 가득한 두려움과 염려로 애통해한다. 더 이상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어갈 수 없음을 애통해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요 자매 된 이들과 함께 모일 수 없음을 애통해한다. 이 대규모 전염병을 슬퍼하고 이 병이 초래했고, 앞으로도 초래할 끔찍한 결과에 대해 마음 아파한다. ‘주 여호와여, 언제까지니이까?’하며 우리는 울부짖고 애통해한다.이 외로움은 중보하시는 예수님께 동참할 기회이다. 의료진들을 위해 기도하고, 아픈 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깊어진 우울과 염려로 힘들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시기를 간절히 구하고 기도한다.마지막으로, 이 외로움은 다른 이들의 삶에 동참할 기회이다.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영성과 관계성을 현대 기술이 완전히 제공해줄 수는 없다. 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낫다. 고독의 장소에 예수님과 함께 들어가면 우리 영혼의 필요가 채워지고, 다른 이들에게 다가갈 수 있게 된다. 영혼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사람들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자로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고후 5:14–20). 매일 교회 친구 한 명, 그리고 교회 밖에 있는 사람 한 명에게 전화해서 안부를 묻는다면 어떨까? 마트에서 사다 줄 것이라도 있는지 물어보는 쪽지를 이웃집 문에 남겨두면 어떨까? 당신이 어떤 이를 위해 그간 어떻게 기도해오고 있었는지를 손으로 직접 쓴 쪽지로 건네준다면 그 사람의 삶이 얼마나 변화될까?다시 만날 그날까지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소위 “사회적 거리 두기”는 슬프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과 다시 함께할 수 있는 날을 벌써 고대하고 있다. 우리 앞에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기나긴 길이 놓여 있지만, 나는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믿는다. 예수께서는 어떠한 친구, 형제, 또는 연인보다 가까이 계시다. 이 모든 혼란과 단절 속에서도 그는 우리를 붙드신다. 예수께서는 선한 목자이시다!내가 또한 믿는 것은 교회는 분명히 다시 모일 것이라는 사실이다. 내향적인 사람들을 포함해 우리는 모두 다시 만나서 더 크게 노래하고, 더욱 큰 미소로 인사할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은 더 이상 위험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로 인해 기쁨과 안도의 한숨을 내쉴 것이다. 다시 만날 그날까지, 고독의 장소 ‘밖으로’ 도망치기보다 그 ‘안으로’ 들어가 거기 계신 예수님을 만나자. 다시 만날 그날까지, 소망이 없는 사람들처럼 슬퍼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자. 대신, 우는 자들과 함께 울자. 그리고, 이 대규모 전염병은 하나님이 창조 역사에서 쓰셨던 혼돈의 찰나 같은 것이므로, 그날이 오면 이 병은 우리를 더는 위협할 수 없다는 사실을 소망하자.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Leverage Your Loneliness번역: 이정훈
코로나19
고독
침묵
인간관계
기도
팬데믹
사회적거리두기
유행병
영과 진리가 예배의 기초입니다
by Ligon Duncan
2020-04-26
부도덕한 사마리아 여인과의 뜻밖의 만남에서 예수님은 예배에 관한 매우 놀라운 사실을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우물가의 여인을 만나주신 이 감동적인 스토리는 예수님이 그녀의 감춰진 죄와 그 내면의 수치심을 드러내시자 그녀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오랫동안 논쟁이 되어 왔던 예배의 문제에 관해 여쭈는 것으로 전개된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요 4:20-26)예수님의 이 대답은 그의 공생애를 통한 삶과 사역, 죽음과 부활을 통해 구원하시려는 여정을 스스로 드러내신 것이다. 이것은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고, 사역과 관련된 중요한 요점들을 선언하신 것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의 특별한 ‘예배 신학’을 이처럼 잘 설명해 주신 것도 없을 것이다.우선,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특별한 선언은 성경적 예배의 모든 의미들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예배는 특정 행위와 삶의 방식 모두를 강조하고 있는데 행위로서의 예배는 적어도 다음 세 가지, 즉 교회 예배, 가정 예배, 그리고 개인 예배 형태로 나타난다.‘교회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여 주께 영광을 돌리며 그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특별한 은혜의 기쁨을 누리는 예배이다. 이런 종류의 예배는 때때로 ‘공동체 예배’(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하나님과의 만남에 함께 참여한다)로 불린다. 또 ‘모임’, ‘집합’ 그리고 ‘회중’ 예배라고도 불린다. 이 예배의 중요성은 신구약 전반에 걸쳐 모두 강조된다. 시편 110편 2절과 히브리서 10장 25절은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와 “함께 모여서”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모두 ‘교회 예배’를 일컫고 있다.‘가정 예배’는 아버지 또는 가족의 연장자들이 인도하는 것으로, 하나님 중심의 가정을 세우고 가족 모든 구성원들에게 삶 속에서의 예배를 고취시켜 교회 예배를 준비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진다. 성경은 가정 예배의 중요성을 여러 곳을 통해 분명히 하고 있다(출 12:3; 신 6:6-8; 수 24:15).‘개인 예배’(때로 “은밀한 예배” 혹은 “사적인 예배”라고도 함)도 성경 전반에 걸쳐, 특히 예수님과 다니엘, 다윗, 베드로 등이 예시로 제시한 예배의 형태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6절을 통해 제자들에게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지시사항을 전달하셨고, 마가복음 1장 35절과 누가복음 5장 16절에서도 그 예를 보이셨다. 다윗은 시편 5장 3절에서, 다니엘은 다니엘 6장 10절에서, 베드로는 사도행전 10장 9절에서 이것을 언급했다. 크리스천 삶의 핵심인 예배는 신구약을 통틀어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으며,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사람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라는 신앙고백을 통해 강조되고 있다. 요나서 1장 9절에서 요나 선지자는 스스로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묘사하고 있는데, 그것은 일정한 날에만 하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의 목적을 특징짓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바울 역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고전 10:31).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삶의 전 영역에서의 예배인 것이다.두 번째로,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예수님의 위대한 선언은 우리가 하나님을 그분의 성품과 진리를 향해 교회와 가정에서, 그리고 개인적으로, 모든 삶의 영역에서 영화롭게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적어도 다음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이 영이시기에 한 장소에 묶여있지 않으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둘째,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와 업적을 따라 예배해야만 한다(요 1:14; 14:6). 왜냐하면 그분은 진리이시고 우리가 진정으로 예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우리가 예배해야만 하는 그 자체로 “진리”이시다. 그분은 하나님의 현현(요 1:14), 하나님 아버지 성품의 구현(요 14:6), 하나님의 본성과 계획의 완전한 계시(요 1:18; 히 1:1-3)이시다. 따라서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예수님에 관한 진리에 따라 예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죄인들의 유일한 구원자이시기 때문이다.그래서 우리는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고 말할 때, 다음 네 가지를 명심해야 한다. 첫째, 우리는 교회에서, 가정에서, 개인적으로 그리고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려야 한다. 이것이 모든 예배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는 그분이 누구인가를 명확히 알고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그분은 영이시기에 우리가 영으로 예배해야 하고, 또 그분이 영원하신 실재이시기에 예배해야 한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명령을 충실히 지키면서 그분의 계시에 따라 신실하게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넷째, 우리는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신뢰함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번역: 송유희
영성
예배
신령
진정
영광
성경적예배
교회예배
가정예배
개인예배
신앙인으로 기꺼이 불편해지기
by 김돈영
2020-04-25
신분의 변화가 일어난다“입대를 축하합니다”현수막이 걸린 위병소를 지나는 순간 모든 것이 바뀐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새롭고 불편해진다’. 자고 일어나는 것, 밥 먹는 것과 화장실 가는 것 등 그동안 아무렇지도 않게 해오던 것, 일상적인 일들도 배워야 한다. 심지어 말하는 것과 쉬는 것까지도 새롭게 배우고 적응해야 한다. 이제 민간인과 구별되는 군인이 된 것이다.처음 교회에 가면 많은 것이 낯설다. 예배하는 모습을 제외하고도 호칭이나 물건의 이름, 용어들도 다르다. 군대에 입대했을 때처럼 많은 부분을 새롭게 배워야 한다. 거룩하다는 말은 교회에서 너무나 자주 듣는 말이다. 거룩한 땅(출 3:5), 거룩한 모임인 성회(출 12:16), 거룩한 안식일(출 12:23), 거룩한 민족(출 19:6), 거룩한 장소인 성소(출 29:31) 등 많은 것을 거룩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거룩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하나님은 거룩하시다. 그의 소유는 모두 거룩하다. 나는 누구에게 속했는가? 하나님께 속해 있다면, 하나님의 소유인 것을 인정한다면 나 또한 거룩한 것이다. 나의 어떤 능력이나 노력,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셨기에 신분이 바뀐 것이다. 거룩한 것으로 구별된 것이다.방향을 잡았는가?지금껏 해온 일상적인 생활도 군인이 되면 새롭게 배운다.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모든 생활의 방향성, 목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군인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누구나 안다.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사람이다. 그래서 부대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군인이 하는 모든 행동은 나라를 지키는 것, 즉 전투력과 관련되어 있다. 훈련하거나 장비를 만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축구나 족구 같은 운동을 하더라도 그것은 그냥 운동이 아니다. ‘전투 체육’이라 부른다. 운동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운동을 통하여 체력을 기르고 전우애를 다지는 것이다. 운동은 전투력 향상을 위한 도구이자 방법일 뿐이다. 밥을 먹는 것도 그렇다. 군대에서는 다이어트를 위해 밥을 굶을 수 없다. 전투력에 지장을 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모든 행동은 전투력, 더 나아가 국방력과 연관되어 있다.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데 초점이 맞춰진 것이다.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다르게 말하면 무엇을 위해 사는 사람인가? 신앙인이라면 하나님이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위하여 산다는 말은 참으로 추상적으로 들린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 것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그렇게 인식하고 행동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다고 말하지만, 다스림을 받는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고 말해야 하는가?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이 바로 성경 말씀이다. 좀 더 압축하면 율법이다. 거룩한 사람, 즉 하나님의 사람으로 구별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율법을 지키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를 인식하고 그것을 인정하며 사는 것이다. 그것이 구별되었다는 증거이다.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인 것이다. 주를 위한 것은 무엇인가?“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 삶의 방향성은 오직 하나님만을 향해야 한다. 우리가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모두 주를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주를 위해 살고 있는가? 이런 질문을 받으면 우리는 사실 좀 머뭇거린다. 주를 위해 사는 것은 알겠지만 너무 추상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를 위해 산다는 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주신 명령, 곧 통치하시는 법을 따르는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명령과 율법의 핵심, 법이 말하는 방향성은 모두 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 율법사의 질문에 예수님이 대답하셨다.“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마 22:36)“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안경을 주고 있다. 즉 구별된 사람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자신을 내보이기 위해 남을 돕는 것이 아니다. 직장 동료와 부하직원은 승진을 위한 발판이 아니다. 전도하는 이유와 전도 왕이 되려는 목적도 달라져야 한다. 예배당에 모여서 예배하는 것은 물론이고, 직장에서 일하는 것, 운동하고, 여행하는 것, 심지어 밥을 먹는 것조차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의 궁극적인 목적과 방향성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귀결되어야만 한다. 병사의 모든 일상이 전투력 향상과 관련된 것처럼 말이다. 구별된 것은 드러난다구별된 모습은 어느 곳에서도 드러난다. 말투와 행동, 생각하는 방향 등 독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휴가 중에 있는 군인이 사복을 입고 다닌다고 해도, 짧은 머리를 감추려고 모자를 썼다고 해도 우리는 알아본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으면 금방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가까이에서 그의 말투나 행동을 보면 군인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외모가 아니라 그가 하는 모든 것이 군인이라는 것을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가?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말하지 않아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왜냐면 모두가 자신을 위한 삶을 사는데 그리스도인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드러나는가? 친구들 사이에서, 학교나 모임에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드러나는가 생각해 봐야 한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생각하고 말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행동하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조금만 속이면 큰 이익을 볼 수 있지만 솔직하게 말하고 손해나는 편을 선택할 수 있는가? 하기 싫은 뒷정리나 청소, 아무도 칭찬하지 않는 일, 드러나지 않는 일이지만 그것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할 수 있는가? ‘아니요’라고 대답한다면 우리는 구별된 사람답게 사는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나의 소속이 어디인지 잊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거룩한 것, 익숙한 것과 싸움거룩하다는 것, 구별된다는 것은 날마다 익숙한 것과 전투를 치르는 것이다. 우리는 입대 하기 전, 내가 주도권을 가지고 마음대로 살았던 생활에 익숙하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품 안에서 생활하는 것보다 내 기준에 맞춰 마음대로 사는 것이 더 편하고 익숙하다. 무엇을 배울 필요도 없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익숙한 것을 탈피하기 위하여 우리는 늘 신경 쓰고 긴장해야 한다. 다른 데 정신이 팔려있거나 긴장이 풀어지면 나도 모르게 예전의 습관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긴장의 끈을 놓치면 대대장님을 아저씨라고 부르는 초유의 사태가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신경을 써야 한다. 긴장해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 여기는 어디인지 자꾸 되뇌어야 한다. 날마다 자신의 내면과 싸워야만 하는 것이다. 익숙하고 편안한 나의 기준을 버리고, 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게 느껴질지라도, 구별된 사람으로서 말씀의 옷을 입고 행동해야 한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마 16:24)하라고 말씀하셨고, 사도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라고 했다. 거룩함에 참여하다우리는 왜 이렇게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히 12:10)는 것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안으로 들어오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소유권을 주장하시는 것이다.“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누군가가 나의 것을 빼앗으려는 데 가만히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물며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우리를 사신 하나님은 어떻겠는가? 사업이 부도 나는 순간에, 직장에서 해고당하는 순간에, 몸이 아파 누워있어야 하는 순간에, 밀린 공과금과 부족한 생활비를 걱정하는 순간에, 그리고 요즘 같이 어지러운 팬데믹 상황에 하나님은 가만히 보고 계시겠는가?군인은 나라를 지키는 일을 한다. 다시 말하면 무기를 사기 위해 돈을 모으거나, 밥을 먹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행정보급관이 필요한 때 필요한 물품을 전달한다. 하나님은 어떠하시겠는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행정보급관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행정보급관 밑에 있는 것보다 더 불안하고 염려로 가득한 삶을 살고 있으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니겠는가?구별된 사람, 하나님의 소유된 사람이라면 염려하지 말자. 불안해하지 말고 내 방법을 찾지 말자. 우리에게 있는 문제쯤은 하나님께서 이미 알고 계시고, 충분히 해결하실 수 있다. 물론 그 방법이 내 생각과 같지 않을 수도 있다.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영역이다. 하나님의 ‘빅픽처’를 우리가 다 알지 못한다. 우리는 단지 주인이신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을 믿고 따르면 된다. 그것이 최선이다. 불편함이 익숙해지다구별되어 불편한 삶, 우리가 익숙해져야 하는 삶이다. 세상과 구별된 삶이기에 우리는 언제나 부딪칠 수밖에 없다. 하나님과 다른 방향을 가는 이 세상에 익숙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거룩한 모습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 완성되지 못한다. 첫 사람 아담으로 인한 죄의 찌꺼기가 항상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조금씩 비워가는 것이다. 내 몸에 쌓여 있는 죄, 하나님을 거부하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려고 하는 악한 본성의 찌꺼기를 하나씩 벗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을 만나는 때 완전하게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엡 4:24)을 회복하는 것이다.따라서 우리는 평생 불편해야 한다. 불편한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불편한 것이 편하게 느껴져야 한다. 그것이 구별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것이 거룩한 삶일 것이다.불편함을 편하게 생각하자!
영성
신앙과소명
거룩
사도바울
자기부인
불편
구별
군생활
루터, 팬데믹에 대해 입을 열다
by Justin Taylor
2020-04-24
2019년 12월 31일, 중국 보건 관계자는 세계 보건 기구(WHO)에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새로운 폐렴이 우한 지역에 출현했다는 것을 긴급히 알렸다. 2020년 1월 7일, 보건 관계자들은 코로나바이러스군에서 새롭게 식별된 ‘2019-nCoV’라는 이름으로 이 바이러스를 명명하고 공포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보편적인 감기 그리고 사스(SARS: Severe acute respiratory syndrome)를 포함한다. 이 바이러스들은 감염된 사람과 접촉하거나 그들의 기침 혹은 재채기를 할 때 나오는 침방울을 흡입하는 것으로 전파된다. 침방울이 묻은 표면을 만진 뒤 얼굴이나 코를 만짐으로써 전염되기도 한다. 1월 7일부터 이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국가로 번졌다. WHO는 4월 18일 현재 218만 명의 확진자와 15만 명이 넘는 사망자를 보고했다. 주식 시장은 무너졌으며, 세계 여행과 무역은 직격탄을 맞았다.크리스천들은 여러 가지 감정에 휩싸여 심각한 질문을 던지며 이러한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늘 그렇듯이 오직 말씀으로부터 우리의 참된 인도하심을 깨달아야 한다. 과거의 크리스천들은 비슷한 위기를 어떻게 대응했었는지 과거를 돌아보는 것 또한 유익하다. 14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유럽에 엄청난 충격을 가져온 흑사병과 관련해서 쉽게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흑사병은 1347년부터 1350년 사이에 중국에서 시작되었으며 당시 유럽 인구의 25%가 사망했다. 이후 15세기에도 발병하면서 많은 유럽인에게 정서적으로 깊은 상처와 공포를 남겼다. 이 전염병의 사망률은 30%에서 90% 사이였다. ‘치명적인 재앙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가’(1527)이 사건은 1527년 마틴 루터가 쓴 “치명적 재앙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가”라는 흥미로운 소논문의 역사적 배경이 되었다. 이 질병은 1527년 8월에 루터의 도시였던 비텐베르크를 강타했으며, 많은 루터의 동료와 시민들은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당시 군주였던 엘렉토르 존(Elector John)은 루터에게 목숨을 위해 즉시 떠날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루터는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남는 쪽을 선택했다. 루터는 질병과 그 희생자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시장 틸로 데네(Tilo Dene)의 아내는 루터의 품에 안겨 죽어갔다. 루터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사람들과 함께 당당히 맞서고 있었다. 다른 도시와 마을에서 온 많은 독일인은 비텐베르크를 떠나라고 했다. 독일인 목사인 요한 헤쓰는 루터에게 글을 썼다. 이러한 질병을 마주했을 때 목회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질문한 것이다. 이 소논문은 질문에 대한 루터의 답변이다. 그 지혜는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에서도 여전히 유익하다. 누가 떠나는가?루터는 강한 신념을 지닌 사람들을 향해 전염병이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므로 도망가지 말아야 하며, 크리스천들은 겸손히 서서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연설했다. 루터는 그러한 견해가 칭찬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모든 사람의 믿음이 자신과 같이 강하지 않다는 점을 인정했다. 루터는 또한 리더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목회자, 시장 판사 혹은 의사들)은 위기가 지나갈 때까지 공동체 안에 남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별히 목회자들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선한 목자와 같이 되어야만 한다고 했다(요 10:11). 루터는 부모가 자녀를 버리거나 가족 구성원이 서로를 떠나는 행동은 죄를 짓는 것이라고 강하게 이야기했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에 우리 이웃들에게 적용했다. 이를 뛰어넘어, 마치 약을 사용하는 것처럼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루터는 결코 숙명론자가 아니었다.죽음에 대한 두려움개인의 태도에 대해서, 루터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마귀의 일이며 어떤 그리스도인도 그에게 굴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을 직면하는 상황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을 두렵지 않도록 한다. 하지만 루터는 어떤 사람들은 믿음에 있어서 남들보다 더 강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연약한 믿음을 가진 이들이나 도망치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그들의 헌신에 따른 주님의 상급을 기대하며 치명적인 위험의 불구덩이에 담대하게 들어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루터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크리스천들과 죽어가는 자들을 직접 섬기는 사역자들은 종기와 감염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병든 사람들을 돌보는 것은 그리스도를 돌보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플 때 네가 나를 돌보아 주었다”(마 25:36)라고 말씀하셨다.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 주셨고, 우리도 남들을 위해 생명을 내려놓아야만 한다고 기록했다(요일 3:16). 루터는 전염병의 심각성을 과소평가하고 하나님께 경박하게 행동하는 자들에게도 경고했다. 하나님의 말씀루터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향하여 어떻게 믿음으로 살고 죽는지를 가르침으로써 그들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하기를 강력히 촉구했다. 불신앙으로 죽어가는 사람은 아직 시간이 있을 때 회개하라는 경고를 받아들여야 하며, 기회가 있는 동안 목회자를 불러야 한다. 눈에 띄는 죄를 인지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회복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만 하며, 가능하다면 주님의 성찬을 받아야만 한다. 실천적 단계들루터는 질병의 확산을 막기 위한 실질적인 단계들을 주장했다.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가 세균 이론을 발견한 이후 시대를 살아가며, 의학 연구와 현대 병원의 과학적인 발전의 혜택을 얻고 사는 우리는 루터 시대의 비텐베르크 상황이 어땠는지 상상하기가 어렵다. 루터는 환자들이 수백 개의 개인 주거공간에 머무르는 것 대신에 특정 공공건물이 환자들을 위한 병원으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한 크리스천들에게 전염병의 확산을 막기 위하여 집과 마당, 거리를 소독할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루터는 비통에 빠진 이들을 목양하는 의미에서 성경 속 장면들로 꾸며 놓은 벽과 비텐베르크 묘지가 도시 경계 밖으로 옮겨져야 한다고 했다. 그리스도의 사랑궁극적으로 루터는 각 개인이 떠날 것인지에 대한 모든 결정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내려져야 한다고 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부르심에 비추어 이루어져야만 한다. 코로나19 바이러스와 함께하는 우리의 여정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의학 역사책의 희미한 추억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많은 크리스천에게는 그들의 이웃들을 향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는 기회이다. 그리스도의 자녀 된 우리에게는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을 살아내기 위한 기회이기도 하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en the Deadly Outbreak Comes: Counsel from Martin Luther번역: 정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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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의 복음 생태계
by 박용기
2020-04-23
팀 켈러(Tim Keller)목사는 ‘센터처치’에서 ‘복음 생태계’(gospel ecosystem)를 설명한다. 복음 생태계는 복음 DNA를 가진 교회들이 한 도시에서 선교와 전도의 사명을 가지고 5-6년마다 새로운 교회를 개척할 수 있는 역동적인 교회로 성장하면서 조성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역동적 교회들이 한 도시 인구의 10% 정도에 달하는 임계점에 이르면, 그때부터는 무너뜨릴 수 없는 거대한 복음 생태계가 형성되고, 복음적 교회들이 개체와 전체로서 함께 성장한다는 주장이다. 실리콘밸리는 세계 최고의 창업 생태계가 형성된 도시이다. HP가 창업된 이래로 애플, 구글, 페이스북 등 세계적인 IT 기업들이 지속해서 창업되고 있는 스타트업 천국이다. 실리콘밸리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그리고 창업자들이 공생하면서 성장 발전하는 생태계가 형성된 도시이다. D. A 카슨 교수는 “각 문화 안에는 선과 악의 요소들이 모두 다 포함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특정 문화의 요소 가운데 복음적 요소와 비복음적 요소가 함께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배울 수 있는 복음적 요소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1. 20-30대가 스타트업 실리콘밸리 지역에 위치한 스탠퍼드대학교 졸업생의 평균 16%가 창업을 하는데, 1990년대 이후 약 4만 개의 기업이 스탠퍼드대학교 동문에 의해서 스타트업 되었다. 스탠퍼드대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스타트업의 영’으로 충만하다. 반면 한국에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20-30대에 바로 교회 개척을 하는 젊은 목회자들은 많지 않다.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장로교 교단 총회(104회, 2019년)에 참석한 교회 대표들 1,449명 가운데 40대 목회자는 14명으로 1%도 되지 않았다. 20-30대 목회자는 단 한 명도 총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를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 젊은이들을 다시 교회로 돌아오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젊은 목회자들을 통한 교회 개척이라고 믿는다. 20대, 30대, 40대 목회자들이 교회를 대표해서 목회한다면 회중의 나이도 젊어지게 될 것이다. 젊은 세대 목회자에 의해서 시도되는 새로운 목회 방법과 전도 방법이 기존의 교회에 신선함과 개혁의 동기를 부여할 것이다. 2. 실패가 평균인 스타트업 네오위즈 창업자 장병규는 ‘스타트업의 평균은 실패다’라고 말한다. 10개 기업이 스타트업하면 평균 1개 정도가 살아남는다. “Fail Fast, Fail Often, Fail Everywhere”(빨리 실패하고, 자주 실패하라, 모든 영역에서 실패를 경험하라). 실리콘밸리 창업가들에게 모토가 되는 문장이다. MIT 대학 기업가정신센터 소장, 빌 올렛 교수가 동양 문화권 창업자들에게 준 조언은 다음과 같다. “미국 문화권에서 실패는 자연스러운 것이며 실패를 통해서 무언가를 배울 있다고 생각합니다. 먹음직스러우면서 칼로리가 없는 초콜릿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실패가 없는 혁신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실리콘밸리에서 세계적인 신생 기업들이 지속해서 나오는 이유는 과감한 시도와 수많은 실패를 통한 배움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를 찾아가서 “네가 나를 사랑하는냐?”라고 세 번 물으셨다(요 21:15-17). 베드로에게 다시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였다. 복음은 실패한 인생에 두 번째 기회는 주는 것이다. 실패는 목회자가 무릎 꿇고 기도하는 시간을 늘려 주며, 인간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는 목회를 가르쳐준다. 진정한 목회자는 실패를 복음으로 극복하면서 세워진다. 3. 액셀러레이터(Accelerator)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란 스타트업을 선발하여 시드머니 투자, 인맥 연결, 마케팅, 시장성 있는 기술개발 자문 등 신생 기업에 종합적인 멘토링을 제공하는 기관 혹은 개인을 지칭한다. 실리콘밸리에는 이러한 액셀러레이터 기관들이 넘쳐난다. 드롭박스와 에어비앤비 등이 액셀러레이터 기관의 도움과 지원으로 스타트업 되었다. 한국교회는 대형교회에서 분리 개척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목회자 개인의 역량으로 개척을 진행한다. 소위 맨땅에 헤딩하는 방식으로 교회를 개척한다. 각 교단에 교회 개척을 지원하는 부서들이 있지만 대부분 교회 개척을 심사하고 허가하는 수동적인 역할에 그치고 있다. 공격적으로 개척자들을 발굴, 지원, 육성해야 하는 이유는 교회 개척이 예수님의 대사명(마28:19-20)을 이루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미국 남침례교회의 국내선교부(North American Mission Board)에는 샌드 네트워크(Send Network)라는 부서가 있다. 샌드 네크워크는 신학교를 막 졸업한 신학생들을 교회 개척자로 모집하여 수개월 동안 훈련한다. 그리고 복음화율이 낮은 도시로 파송하여 교회 개척을 돕는 액셀러레이터 단체이다. 훈련받은 개척자들에게는 종합적인 교회 개척 훈련과 3년 정도의 재정 지원을 한다. 그리고 개척한 지역에서 존경받는 교회 목회자를 멘토로 연결해 준다. 개척된 지역의 주총회와 로컬 지방회들이 촘촘하게 연결되어서 교회 개척자를 돕고 지원한다. 4. 교회 생명주기로 본 스타트업 코닥, 노키아, GM은 한때 세계적인 기업이었지만 현재는 쇠퇴한 기업들이다.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코스피 상장 686개 기업의 평균수명은 약 33년이다. 기업이 쇠퇴하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혁신 없이 현실에 안주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통계적으로 “출생기-성장기-부흥기-쇠퇴기-죽음”이라는 생명주기를 가진다. 한 지역 교회가 쇠퇴기를 거쳐서 죽음을 맞이하는 가장 큰 이유는 교회 회중의 고령화이다. 유럽교회들이 쇠퇴하는 이유는 교회를 지키고 있는 회중의 평균 연령이 60-70대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교회도 그 생명이 다하게 되는 것이다. 2020년 한국교회는 부흥기에서 쇠퇴기로 접어든 것으로 생각된다. 교회 생명주기 통계로 볼 때 현재 교회 회중의 평균 연령이 50-60대이고, 성도 유입에 큰 변화가 없다면 그 교회는 30-40년 후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어떻게 이러한 쇠퇴기 상황을 개혁할 수 있을까? 팀 켈러 목사는 ”오래된 교회들을 갱신하는 열쇠는 새 교회를 도시에 세우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복음적 교회는 대략 7-10년마다 새로운 교회를 개척함으로 젊어진다고 했다. 기존 교회가 교회 개척을 하게 되면 인력과 재정을 흘려보내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기존 교회는 건강한 자극과 도전을 받게 된다. 새롭게 개척된 교회는 교회 내부사역보다는 교회 밖 전도에 힘을 쏟는 교회가 된다. 이러한 모습은 모교회와 주변교회에 도전을 준다. 교회 개척을 대형교회만 할 수 있다는 것은 물량주의적 사고방식이다. 200명 되는 교회가 50명 정도 분리하여 개척한 후 3-4년 사이에 다시 200명으로 회복되는 경우를 많이 본다. 개척된 교회도 부흥하면서 두 교회의 생명주기는 모두 젊어진다. 오래된 교회들이 새로운 교회를 개척함으로 한 도시에서 복음 운동(gospel movement)을 일으킬 수 있고, 건강하고 강력하게 자생하는 복음 생태계(gospel ecosystem)가 만들어질 수 있다. 복음적 교회 개척 생태계 팀 켈러가 ‘생태계’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유는 생태계는 인간이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농작물을 잘 가꿀 수는 있지만, 햇빛, 비, 바람과 같은 날씨와 토양은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복음적 교회 개척 생태계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복음적 교회들의 활동뿐만 아니라 인간의 노력을 초월하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필요하다. 한국에는 많은 복음적 교회들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어떤 도시는 이미 10% 임계점을 넘어 건강한 복음 생태계가 형성되었다고 생각한다. 성령님께서 복음적 교회들을 연결하시고 하나 되게 하셔서 개척 교회와 기존 교회 모두가 개체와 전체로 유기적으로 결합 되기를 바란다. 그것을 통해 건강하게 성장하는 교회 개척 생태계가 모든 도시에 형성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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