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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직시하라
by Paul Tripp
2020-04-22
결혼을 앞둔 커플이 만나게 되는 문제가 있다. 첫 아이의 출산을 앞두고, 우정과 관련해서, 또는 이직을 생각할 때 만나게 되는 문제가 있다. 그리고 목회를 생각하는 목사가 만나게 되는 문제도 있다. 이 문제는 무엇일까? 바로 그것은 현실성 없는 높은 기대이다. 왜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일까?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성경이 말하는 세상에 대한 진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죄는 이 세상을 문제 속으로 던져넣었다. 성경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이 문제 많은 세상이 일으키는 먼지와 오염된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여기에서 도망갈 수 있는 길은 없다. 이 세상은 애초에 창조되었던 방식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성경은 분명하게 경고한다. 지금 우리는 말 그대로 신음하면서 구원을 기다리는 바로 그 세상(롬 8:18)에서 살고 있다고 말이다. 이 세상이 창조될 때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던 병과 죽음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 속임수와 실망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하나님이 창조한 “좋았더라”에 포함되지 않은 반역과 죄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하나님의 계획과는 너무도 먼 고통과 상실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평화의 왕자가 창조했다고 하기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말도 안 되는 폭력과 전쟁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는 지금 살고 있다.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을 만들 때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음욕과 욕심이 마음을 채우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삶을 자극하고 또 사역까지 복잡하게 만드는 바로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생각해도 완전한 만족은 없다. 기대와 다른 실상에 실망할 수밖에 없다. 교회를 포함한 어떤 기관도 죄로 타락한 세상 밖에서 살 수 없다. 아무리 좋은 계획이라도 어려움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의 삶, 또는 우리의 사역도 에덴동산의 타락이 끼친 영향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부족한 그리고 준비되지 않은이런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우리는 타락한 세상에 대해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는 사실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다. 종종 갈등하는 목사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내가 발견한 몇 가지가 있다.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사역에 대한 기대 때문에 그들은 건강한 공동체, 하나님만을 높이는 믿음의 공동체를 세우는 과정에서 만나는 어려움에 대처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 결과, 안에서는 죄가 또 밖에서는 어려움이 공격할 때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조심하고 신중하게 행동하기보다는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경우가 많다. 타락한 세상에서 만나는 사역의 어려움만이 아니라, 자신이 불러온 어려움 때문에도 고통을 당한다. 여러 교회와 일하면서 사역자들이 서로의 강점을 중심으로 사역하기보다는 어떤 식으로든 서로의 약점을 자극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시는 지혜로운 원칙에 따라 스스로 준비하고, 또 하나님의 은혜가 주는 능력을 힘입는 대신 그들은 정치적인 방법을 택한다. 타인을 공격할 전략을 짜고, 자신을 방어하는 수동적인 자세가 되는 데에 더 능숙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매우 구체적으로 말한다. 성경이 이렇게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세상 속에서 잘 준비되어 ‘이미 도래한 그러나 아직 임하지 않은’ 상태에서 서로 돕고 사역함으로 모든 것이 다 회복될 그 날을 고대하며 사는 것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현실적이지 않은 기대는 오로지 자신만을 의지하도록 한다. 목회자라면 누구나 매일 매일 구조의 손길이, 용서의 손길이, 그리고 은혜와 위로가 주는 힘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목회자도 성화의 과정에 있는 인간일 뿐이며, 죄의 굴레를 벗어나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야말로 사역 현장에 있는 우리가 매 순간 그 누구보다도 절실히 동역자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앞으로 다가올 어려움약하고 실패하는 사람들, 사랑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그들을 온전히 사랑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그런데 거기에는 또 다른 게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시 119:105)이다. 우리가 이 타락한 세상에서 바로 살고 또 바로 사역하는 길은 오로지 성경의 지혜가 주는 빛으로 보호받고 인도받는 길밖에는 없다. 자신은 평생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조차도 우리의 필요가 얼마나 심오한지, 또 이 세상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제대로 깨닫지 못할 때가 있다. 그 사실을 잊을 때, 우리는 사역 현장에서 매일 매일 경험해야 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갈망하지 않게 된다. 그 결과 사역을 힘들게 하는 일이 생겼을 때 이미 혼란한 상황을 더 심각하고 복잡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대응한다. 사역자에게 반드시 힘든 날이 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은 당신을 홀로 두지 않는다. 당신이 어려운 상황에 부닥쳤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 자신을 주신다! 그분이 당신을 안전하게 지키는 바로 ‘그것’이다. 시편 27편 5절 위로의 말씀을 보라.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그는 가까이 계신다. 그는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는 은혜와 자유롭게 하는 지혜로 무장해서 당신에게로 오신다. 그러나 핵심은 이것이다. 성경이 당신에게 그리고 믿음의 공동체에 하시는 말씀에 눈과 마음을 열고 살아야 한다. 그런 사람이라면 지금 하나님이 주기 원하는 겸손함과 갈급함, 그리고 은혜와 지혜를 갈망하면서 살고 있을 것이다. 현실적인 사람이 되어라. 그리고 당신의 삶과 사역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현실적인 일은 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깨닫는 기회가 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라.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Expect Trouble번역: 무제
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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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가?
by 이승구
2020-04-21
“그리스도인입니까?”라는 질문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의 매우 중요한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고 느끼는가? 많은 사람이 그러하듯이 별다른 느낌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기독교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매우 심각한 문제를 지니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성경을 참으로 믿는 사람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이 마땅하다. 기독교 유신론(Christian Theism)은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것은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믿는 것이다. 오늘날 삼위일체에 대한 생각이 많은 부분 모호해져 있다. 세상은 물론이거니와 대부분의 교회 성도들조차도 삼위일체가 무엇인지 잘 모르거나, 그저 모호하게 이해할 뿐이다. 이것은 신약교회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나 종교개혁으로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자신들이 믿는 바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하려고 하던 때와는 상당히 다른 현상이다. 교회가 정신을 차리고 있을 때는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잘 의식하였다. 그런데 교회가 정신을 차리지 않고 있을 때는 몽롱한 가운데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가지지 않았고, 그 결과 삼위일체를 믿지 않는 배도(背道)의 길로 가기도 했다.그러므로 아주 모호한 상태에 있는 오늘날의 교회들도 이 모호한 상태에 계속 있지 않기 위해서, 결국 배도의 길로 가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정확히 알려고 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성경을 참으로 믿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바른 교회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나이신 분이다(신 6:4; 고전 8:4).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를 만난 분들은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셨지만 동시에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아주 명백히 밝히고 있다(요 1:1, 14, 18, 3:16, 18, 5:18-25, 10:36, 20:28; 롬 9:5; 고후 4:4; 갈 4:4.; 빌 2:6; 골 1:15; 딤전 3:16; 딛 2:13; 히 1:1-4; 요일 4:9, 5:20 등). 예수님을 그저 사람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참된 인간성을 취하셨지만, 동시에 참된 신성을 가진 분이라고 믿는 것이 기독교를 바르게 믿는 것이다.이렇게 예수님을 바르게 믿을 때, 동시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성령도 믿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성부로부터 보내실 성령을 말씀하셨으니(요 15:26), 성자와는 구별된 성령을 믿어야 한다. 그런데 그 성령도 온전한 신성을 가지셨음을 성경이 증언한다(마 28:19; 행 5:3, 4; 롬 8:11, 9:1, 15:19; 고전 2:10, 11, 3:16, 12:11; 고후 13:13; 딤후 3:16; 딛 3:5; 히 9:14). 여기까지 내용을 인정하는 것도 쉬운 것은 아니지만, 성경을 바로 믿기만 하면 여기까지는 누구나 인정할 수 있다.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잘못 생각하면 이단이 된다. 우선 성자와 성령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 아니라고, 즉 성부만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유대교나 이슬람교와 같은 종교이거나 16세기에 시작된 소시니안주의(Socinianism), 19세기에 시작된 성부 단일주의(Unitarianism)와 같은 이단이다. 예수님은 인간이신데 로고스가 그 안에 역사했다고 말하던 역동적 군주론(Dynamic Monarchism)도 역시 이단이다.성부, 성자, 성령을 믿되, 하나님은 세 분이라고 생각하거나 말하는 삼신론 또한 명백한 이단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한 분이시라고 명백히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주 명확한 삼신론은 아니지만 삼신론적인 방향으로 생각하는 것도 해서는 안 된다.성자의 온전한 하나님 되심을 생각하지 않고, 성자는 조금 못하신 하나님, 심지어 피조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이들, 4세기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했던 아리우스(Arius)를 따르던 아리우스주의(Arianism)도 역시 이단이다.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성자께 기도하면 안 된다는 아주 이상한 생각도 했다.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이심을 강조하다가 구약 시대의 성부께서 성육신하신 분이 성자이고, 그가 하늘로 오르면서 다시 오신 분이 성령이라는, 그러므로 성부가 성자고, 성자가 성령이라는 양태론(Modalism)도 이단이다. 215년경에 리비야와 로마에서도 융성하게 활동했던 사벨리우스(Sabellius)만 이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는 삼위일체를 쉽게 설명한다고 하면서 양태론적인 설명을 하는 일이 주변에 많다. 한 사람이 교회에서는 목사이고, 학교에서는 교수이며, 가정에서는 아버지인 것과 같이, 하나님이 성부이시고, 성자이시고, 성령이시라는 설명이 그런 예이다. 또한, 물과 얼음, 수증기의 세 가지 형태를 가지고 있으나, 다 같은 분자 구조를 가지듯이, 성부, 성자, 성령은 다르게 나타나지만 다 같은 본질을 가졌다고 설명하는 것도 양태론적인 설명이다. 이것이 이단적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면 교회에서 이런 예를 들지 않을 것이다.이런 이단적 생각들을 다 배제하고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1) 한 본질(one and the same essence)을 가지신 한 하나님이심을 아주 분명히 하면서, 동시에 (2) 성부, 성자, 성령의 구별(distinction)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분명히 하려면, 성부와 성령은 성육신하지 않으셨고, 오직 성자만 성육신하셨다는 사실을 유념하는 것이 좋다. 성자께서 성육신하여 이 땅에 계실 때 이스라엘 백성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세례 요한에게 나아가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6-17)는 정황을 생각하면 도움이 된다. 이 한 장면에 이 땅에 계신 성자와 그 위에 임하신 성령, 말씀하시는 성부가 나타나고 있다. 성부가 곧 성자이고, 그가 곧 성령이라고 말하려는 양태론의 주장이 옳지 않음을 잘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같은 본질을 지니신 성부, 성자, 성령의 구별되심을 분명히 말해야 한다. 성부는 성자가 아니고, 성자는 성부가 아니며, 또한 성령은 성부와 성자가 아니다.이 삼위(三位)는 합해서 하나가 되시거나(fused), 혼합될 수(mixed together) 있는 것도 아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기 다른 독특성을 지니고 영원히 구별되는 존재들(subsistence)이시나, 하나의 동일 본질을 가지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자가 성부에게 종속하거나, 성령이 성자에게 종속하지 않고 영원히 동등하시다. 이 세상에서 사역하실 때 성자께서 성부에게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나 그것은 성자가 본질상 성부에게 종속적이어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다. 동등하신 성자께서 구원 사역을 이루기 위해 겸손히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이다. 그래서 “위격상의 동등하심과 사역상의 순종”이라는 말을 기억해 놓으면 좋다. 여기 참된 겸손이 드러난다. 성부와 동등하신 분이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이야말로 참된 겸손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것이다.하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실천적인 요구를 하는가? 다음 세 가지를 제대로 해야 참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첫째로, 우리는 누구에게 예배하고, 누구를 찬양하는가? 이때 아주 명확히 삼위일체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삼위일체 하나님께 예배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물론 계속해서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탐구해 나가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나 일단 모호하게 “하나님, 주님”께 예배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참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께 경배한다는 의식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명시하던 이전 시대의 찬양을 많이 하는 것이 좋고, 오늘날 우리도 삼위일체 하나님을 불러 아뢰는 찬양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둘째로, 누구에게 기도하는가? 삼위일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불러 기도할 수도 있고, 성부나 성자나 성령께 기도할 수도 있다. 성자나 성령께 기도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나, 그런 가르침은 이단적인 것이다. 항상 기도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과 더 깊이 교제해야 한다.셋째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일상생활에서 느끼고 있는가? 우리에게 오신 성령이 “영원히 함께” 하신다고 했으니(요 14:16) 이를 믿어야 하고, 예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신다”고 했으니(마 28:20) 이것도 확실히 믿어야 한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23)고 하신 말씀에 근거해서 성부께서도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심을 믿어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렇게 항상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다. 삼위일체는 추상적 교리가 아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제하고, 함께 사는 역동적 사실을 증언하는 것이다. 부디 우리가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바른 그리스도인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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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태론
폭력적인 영화를 즐겨도 되는가
by Kathryn Butler
2020-04-20
난 영화를 추천한 친구를 믿었다. 그런데 영화는 처음부터 아주 끔찍한 살인 장면으로 시작했다. 나는 이내 친구를 째려보았다. 이어서 추격 장면이 나왔는데 길에 서 있던 무고한 사람을 난자하고 몽둥이로 때렸다. 영화의 마지막, 끝까지 살아남은 주인공은 악당을 펜치로 고문했다.내 친구는 팔꿈치를 무릎에 올리고 스크린을 향해 몸까지 기울이며 완전히 영화에 빠져 있었다. 반대로 나는 소파에 파고드는 자세로 앉아있었다. 감독은 관객의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도록 자극적인 복수의 언어를 사용하여 해설했다. 잔혹함을 엔터테인먼트로 위장한 영화를 보며 복수와 잔혹함 속에서 승자의 통쾌함을 맛보고, 피에 물든 손가락을 흔들면서 사람들은 환호한다. “이제 좀 끄지,” 난 쏘아붙였다.내가 농담을 한다고 생각한 친구는 웃었지만, 이내 농담이 아닌 걸 알고는 친구의 눈이 커졌다.“아니, 외상 수술(trauma surgeon)을 하는 사람이 왜 그래? 이거랑은 비교도 안 되는 더 끔찍한 걸 다 봤으면서” 친구가 말했다.나는 이를 악물었다. 물론 현실에서 이보다 끔찍한 것을 더 많이 보기는 했지만, 이런 영화처럼 끔찍한 것을 본 적은 없으니까. 사실 피가 튀고 내장이 보이는 이런 영화는 비극이 가져다주는 진짜 후유증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 슬픔에 젖은 부인과 고아가 된 아들들에게 칼날과 파편, 그리고 박살 난 자동차 유리창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고들지 못한다. 이런 영화는 절대로 상처의 흔적이 말하는 것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고, 폭발로 인해 엉망이 된 피부 조직이 앞으로 겪어야 할 수많은 수술도 표현하지 못한다. 총알이 뚫고 지나간 흉터가 어떻게 사형 선고를 대신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흘린 피를 깨끗하게 닦은 후에도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는 상처받은 영혼의 고통을 외상 치료 센터에서 일하는 내내 보았다. 생명을 앗아가는 방아쇠의 위력을 몇 번이고 목격했다.“나는 저런 거 많이 봤어, 그러니까 제발 좀 꺼 줘” 나는 말했다.폭력적인 미디어는 아이들에게 해가 되는가?폭력적인 미디어에 대한 논쟁은 반세기 이상 과학계에서 뜨겁게 불타올랐다. 10년 전, 미국 소아과학회(AAP)는 부모와 소아과 의사에게 경고하기 위해 폭력적인 미디어와 공격적인 사고 사이의 연관성을 알리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후로 이뤄진 연구는 그 성명서의 내용을 더 보강했는데, 폭력적인 영화와 비디오 게임에 노출된 젊은이들 속에 잠재한 분노, 실제 폭력에 대한 무감각, 그리고 공감 능력 약화 등 분명한 상관관계가 있음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이 주제는 아직도 만장일치가 되지 않고 여전히 뜨겁기만 하다. 일부 비평가들은 AAP와 같은 조직이 근거 없는 결론을 내리고, 이를 공포한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특히 이런 연구는 미디어 노출이 실제로 삶의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데이터는 상대적으로 빈약하고, 실험실에서 폭력적인 장면을 볼 때 생긴 생각과 느낌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고 지적한다. 잔인하고 참혹한 영화(gory movies)가 공격적인 생각을 가져올 수 있지만, 이것이 실제로 타인을 향한 폭력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증명한 연구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회의론자의 입장에서는 객관적인 데이터가 없는 상황의 경고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의료계의 논쟁은 공공 부문으로 흘러 들어간다. 작년에 있었던 유명한 총격 사건이 전국적으로 충격을 주었을 때, 정치인들은 영화와 비디오 게임을 잠재적인 원인으로 지목했다. 거기에 대한 반발은 신속하고도 격렬했다. 인터넷에는 그런 비난에 대항하는 네티즌으로 넘쳐났다. 총격 사건 이후 유니버설 스튜디오는 유가족의 슬픔을 조금이라도 달래기 위해서 공포 영화 ‘The Hunt’의 개봉을 취소했다. 몇 달 후, 영화 ‘조커’(Joker)는 잠재적으로 주인공을 모방한 살인자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에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논쟁이 가열될수록 양측에서는 감정의 불꽃이 더욱 강렬하게 타올랐다. 엔터테인먼트가 사랑에 해를 입힐 때그리스도의 제자는 이런 논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스크린에서 끔찍한 장면이 벌어질 때, 우리는 봐야 할까 아니면 고개를 돌려야 할까?폭력적인 미디어와 실제 끔찍한 행동을 연결하는 데이터는 없지만, 현실에서 드러나는 증거는 우리의 숨을 멈추게 한다. 한 평론가는 다음과 같이 썼다. “폭력적인 미디어는 사람이 폭력에 무감각하게 만들고, 타인이 받는 고통과 괴로움에 덜 민감하게 만든다.” 비록 영화 속 유혈이 낭자한 장면이 당장 나가서 폭력을 저지르게 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런 장면이 우리의 공감 능력을 둔감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는 이런 사실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 22:37–40).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들을 내적 가치와 존엄으로 가득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로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와 다를 바 없이 죄의 짐을 지고 도움을 구하는 다른 사람들을 향해 동정심을 보이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는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 (요 13:34–35).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요1 3:16-17).화면 속 무의미한 폭력에 빠지게 될 때, 우리는 고통받는 형제자매들이 겪고 있는 곤경을 외면하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그들을 사랑하는 우리의 능력이 위험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결국 컴퓨터 그래픽이 주는 스릴을 만끽하기 위해서 우리의 열린 마음을 포기하는 것이 된다. 화면이 꺼진 후에 느끼는 고통미디어 속의 모든 폭력이 다 타락한 건 아니다. 단순히 엔터테인먼트를 위해서가 아니라 폭력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서 폭력이 쓰일 때, 영화적 사실주의를 통해서 우리는 타락한 자신을 한 번 더 만나게 된다. 몸과 영혼을 모두 파괴할 수 있는 엄청난 힘을 가진 전쟁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영화는 우리를 더 깊은 묵상으로 이끌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얼마나 간절하게 구세주가 필요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한다. 무모함이 아니라 정직하고 예민한 태도로 폭력에 접근할 때, 사실적인 영화는 우리에게 회개를 촉구한다. 그러나 영화는 폭력을 정죄하기보다 폭력 그 자체의 묘사를 추구한다. 많은 영화는 폭력을 마치 금단의 열매처럼, 즉 고삐 풀린 죄가 아닌 화려하고 멋있게 묘사한다. 그래픽 기술은 전례가 없을 정도로 갈기갈기 찢어지는 살과 사방에 튀는 피를 묘사하지만, 그러한 폭력적인 장면이 내면에 남기는 영향은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들은 응급실의 임상의가 알고 있는 것에 별 관심이 없다. 폭력은 아이들을 장애인으로 만들고, 또 부모가 없는 고아로 만든다는 사실 말이다. 순간적으로 쉽게 당기는 방아쇠는 수십 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끔찍한 슬픔을 가져온다. 순간적으로 폭발한 분노는 사랑하고, 꿈꾸고, 희망에 찬 수많은 생명을 사라지게 한다. 그로 인한 고통은 순간이 아니라 몇 세대를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폭력은 결코 흥분의 원인이 될 수 없다. 폭력으로 인한 고통은 악이 남긴 표식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의 몸은 찢어지고, 살과 피로 물든 사탄의 솜씨가 그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 무엇을 봐야 할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영화가 되었든, 비디오 게임이 되었든, 또는 인쇄물이 되었든 어떤 미디어를 봐야 할 것인지 그 가이드를 얻기 위해서 우리는 빌립보서 4장 8절을 보아야 한다. 분별에 관한 실로 아름다운 주석을 통해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폭력적인 영화가 참되며 경건한 마음을 불러일으키는가? 그런 영화가 정결하며 사랑받을 만하며 또 칭찬받을 만한 마음을 일깨우는가? 우리는 바로 이 말씀에 근거해서 옳은 것을 분별할 수 있지 않은가? 폭력적인 이미지가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의 길로 이끄는가? 우리의 눈을 뜨게 만드는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을 키워주는가? 대답이 “그렇다”라고 한다면, 분별하는 눈을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과 타인을 향한 사랑의 마음으로 영화를 시청하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만약에 대답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타인을 위한 사랑의 마음을 근거로 해서 화면을 끄도록 하라. 대신 참되고 사랑스러운 것, 즉 하나님과 일치하는 것을 통하여 눈을 즐겁게 할 방법을 찾도록 하라.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Let Not Violence Entertain You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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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을 막아준다면 가시도 축복이다
by Marshall Segal
2020-04-19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고통은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방해할 수 없다. 최악의 시련을 맞더라도 그분의 강력한 사랑의 손길은 우리를 그분께 더 가까이 가도록 하거나, 인내하는 중에 믿음이 더 커지도록 하거나, 다른 이들을 위로하는 사람으로 우리를 준비시키거나 하신다. 또 우리의 숨겨진 죄를 드러내게 하거나, 그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더 깊고 강렬한 기쁨의 샘을 샘솟게 하신다. 결국 모든 것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신다. 그러나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선은 종종 뭔가를 얻는 방식이 아니라 뭔가를 피하는 방식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너무도 자주 우리는 고통 때문에 피할 수 있었던 일들을 깨닫지 못하곤 한다. 하나님은 아버지이기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뿐 아니라, 절박한 심정으로 피해야 하는 것까지 다 알고 계신다. 때때로 어떤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숨겨진 죄를 바라보게 만든다. 달리 말해서, 어떤 고통은 특정한 죄를 피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베푸는 사랑의 방법이 되기도 한다. 바로 교만이라는,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는 이 어둡고도 위험한 죄 말이다. 사도 바울은 어떤 특정한 육체의 고통에 지속적으로 시달렸다. 그 고통은 다름 아니라 그로 하여금 교만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일깨우는 역할을 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나로 하여금 자만하지 못하도록’ 바울은 이 말을 두 번씩이나 반복적으로 하고 있다. 왜 그럴까? 그는 교만이 가진 치명적이고 매혹적인 매력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의 위대함을 우리에게 계시하실 때, 우리는 스스로가 대단하다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 우리가 받는 계시가 클수록, 우리가 받는 유혹도 같이 커진다. 교만이 가진 진짜 위험하나님에 대해서 더 많이 아는 것은 위험할 수 있으며 심지어 치명적일 수도 있다. 배움으로 인해 자신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고 하나님에 대한 의존도가 줄어든다면, 사탄조차도 당신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더 많이 배우라고 격려할 것이다. 바울의 경우에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하나님은 그에게 가시를 주었다. 바울이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더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울처럼 교만이 주는 영적인 위험을 알고 있다면, 만성 통증이나 질병, 성취되지 않은 꿈이나 기대, 관계의 끊어짐과 투쟁, 괴로움을 주는 유혹, 또는 당신을 괴롭히는 그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우리가 가진 가시를 멸시하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일어날 적그리스도에 관한 언급을 할 때도 바울은 교만을 언급했다.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살후 2:2-4). 앞으로 나타날 끔찍하고 처참할 정도로 파괴적인 그 한 사람은 사실 우리 모두가 다 가지고 있는 교만의 씨앗이 실제 사람의 크기로 자란 것이다. 교만은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합당한 것을 우리에게도 합당하다고 설득한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선언하는 날까지, 그리고 하나님에 대항하는 우리의 마음이 완악해질 때까지, 교만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다른 서신서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새로 입교한 자도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딤전 3:6). 교회가 한 남자를 장로로 성장시키자마자 그 사람은 교만에 빠져서 사탄의 손에 넘어갈 수도 있다. 교만의 유혹은 끔찍하고도 파괴적인데, 그것은 특히 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러하다. 왜냐하면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자기가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축복받은 가시교만이 가진 파괴적인 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한, 우리는 결코 가시를 축복으로 보지 못할 것이다. 대신 가시와 관련이 있는 모든 것과 관련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다. 그러나 교만이 사람들을 영원히 파멸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고, 또한 우리가 바로 그 유혹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바로 알고 있다면, 가시는 그게 아무리 불쾌하고 때로는 두렵기까지 하더라도, 사랑스러움이라는 전혀 새롭고 놀라운 차원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가시에서 찾아내는 그 어떤 사랑스러움도 고통을 둔하게 하거나 사라지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게다가 사탄은 끊임없이 가시를 가지고 우리를 괴롭히고 위협할 것이다(고후 12:7). 그러나 우리는 아주 천천히 하나님이 어떻게 고통을 통해서 우리를 보호하고 성장시키며 또 새롭게 하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저주라고 느껴지던 가시가 이제 생각지도 못하게 소중한 것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 가시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또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자라게 하시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바울은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심하게, 그리고 더 자주 고통을 받았다. 따라서 그는 결코 고통이 주는 고뇌를 최소화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또한 그 어떤 고통 속에서도 그 고통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선함을 빼앗기지 않았다. 괴로움을 당하고 곤욕에 처하고 박해를 당했으며 또 맞고 쓰러졌지만(고후 4:8-9), 그는 그 모든 상황에서 여전히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4:16–17)겉사람이 낡아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끝이 없을 정도로 엄청난 영광의 무게 또한 실제이고, 아니 사실상 그건 바울이 잃거나 겪은 고통보다 훨씬 더 컸다. 고난은 극심했고 때때로 참기 어려웠지만(고전 1:8), 고통은 아침의 수평선을 정복하는 일출처럼 항상 고통보다 더 환하게 빛났다. 하나님께 간구하기바울이 가시를 받아들인 것도 사실이지만 동시에 그는 그 가시를 없애달라고 기도했다. 가시가 우리에게 궁극적인 선을, 결코 일시적인 안식과 바꿀 수 없는 선을 가져다줄지언정 그렇다고 우리가 가시를 원해야 한다는 건 아니다. 또한 그 가시를 없애달라고 기도해서 안 된다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고후 12:8)라고 바울은 말한다.바울은 그가 교회에 간구한 것처럼 하나님께도 간구했다(그는 같은 단어를 롬 12:1; 고전 1:10; 엡 4:1; 살전 2:12에서도 썼다). 그는 서신서에서 여러 번 간구했지만 여기서처럼 하나님께 간구한 적은 없었다. 그의 간구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가장 먼저, 고통이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전혀 잘못된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바울은 여기에서,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고통을 없애달라고 기도했다(마 26:39).두 번째로, 하나님 앞에서 겸손과 믿음으로 그리고 간절히 우리를 괴롭히는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간구할 뿐 아니라, 반복해서 간구하는 것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한두 번이 아니라 세 번이나 주님에게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 달라고 간구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기도를 통해서 입술까지 가기도 전에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알고 계시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간구하는 것을 좋아하시고 또한 반복해서 간구하기를 원하신다(눅 18:1-8). 따라서 고통이나 상심이 너무 클 때 반복해서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영원히 간구하지 않았다. 그는 간구했고 또 간구하고 또 간구했다. 그리고는 그의 가시를 받아들였다. 마치 소명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강점을 들어 사용하는 것보다 오히려 약함을 더 높이 들어 사용한다는 사실까지 받아들이는 것이다. 바울에게서 가시가 사라지는 것이 정말로 필요했다면, 하나님은 그렇게 했을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잘 알고 있고 또한 필요할 때면 가장 적절한 때에 아낌없이 준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꼭 세 번까지만 간구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우리도 바울처럼 “가볍고 순간적인” 이 세상의 가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께 간구하고 다시 간구하고 또 간구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바꿀 것이다. 시련과 약점이 승리와 강점보다 훨씬 더 큰 은혜임을 알게 되고, 모든 지혜로움과 사랑으로 인한 하나님의 거절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되고, 나아가서 가시를 포용할 뿐 아니라 자랑할 수 있는 마음으로까지 우리를 바꿀 것이다. 기꺼이 가시를 짊어지고가시를 달라고 기도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정말로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면, 우리는 가시를 가지고도 얼마든지 만족할 수 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 약함 뿐 아니라 능욕과 곤고함 그리고 박해까지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바로 앞 장에서 바울은 그가 겪은 능욕을 아주 자세하게 서술했다.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5–27)그럼에도 만족하다니? 고통 안에서, 고통을 겪으면서 또한 고통이 나를 떠나지 않는데도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고후 12:10)이라고 말한다. 바울의 경우에는 그의 약점, 고난, 핍박, 재난으로 인해 도리어 그리스도의 능력, 지혜, 은혜, 사랑이 더 풍성하고 더 밝게 드러날 수 있었다. 가시가 주는 현실은 가혹하지만, 바울이 예수님과 관련해서 사랑하는 모든 것을 형성해 가는 데에 그의 가시는 큰 역할을 했다. 바울은 그로 하여금 교만을 멀리할 수 있게 했기에 가시에 만족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가시가 와서 사라지지 않는다면 다음 구절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6-7). 교만은 어리석게도 지금 높여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겸손한 자는 하나님 높이기를 좋아한다. 가시를 지니고 다니면서도 하나님의 은혜, 능력, 지혜, 타이밍을 더 높이려고 애를 쓴다. 그리고 겸손한 자는 하나님께서 언젠가 우리를 영원히 높이고, 우리가 가진 모든 가시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실 날을 기쁜 마음으로 자족하면서 기다린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Welcome Whatever Keeps You from Pride번역: 무제
교만
바울
가시
고통
영적성장
영성
적그리스도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by John Piper
2020-04-18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영원히 중요하다. 하나님은 이 바이러스에 대해 침묵하시는가? 그렇지 않다. 성경 어디를 펴도 위기상황과 관련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하나님은 위기의 상황에 성경을 통해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의 목소리는 풀과 같다. 하지만 하나님의 목소리는 화강암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벧전 1:24-25). 성경에 기록된 그분의 말씀은 “폐하지 못[한다]”(요 10:35).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믿는 것은 모래가 아닌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마 7:24).그분의 목소리는 참될 뿐 아니라, 모든 상황에 있어서 완벽하게 지혜롭다. “그의 경영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사 28:29).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시 147:5). 그분이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한 생각을 드러내실 때, 그 생각은 확고하고, 흔들릴 수 없고, 영원히 선다.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시 33:11).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다]”(삼하 22:31). 요즘 같은 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은 참되고 지혜로울 뿐 아니라, 소중하고 달콤하기도 하다.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시 19:10). 하나님의 말씀은 일생의 달콤함이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8). 흔들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의 말씀은 불멸의 생명을 가져다준다.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렘 15:16).그리고 그 달콤함은 지금과 같은 혹독한 섭리의 순간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고후 6:10) 비밀을 배운 자에게는 참으로 그러하다. 코로나19 바이러스를 멈출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주권, 그리고 위기 상황에서 우리의 영혼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주권 역시 같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 비밀이다. 사실 우리의 영혼을 보호해주시는 차원을 넘어서, 죽는 순간에도 그분의 뜻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꿈꾸며 평안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해주신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롬 11:22). 그분의 섭리는 달콤하고도 쓰라리다. 나오미가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라고 말했을 때 그녀는 죄를 지은 것이 아니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온 시점은 그녀의 상황이 막 변하려고 하는 시점이었다. 지금은 하나님을 감상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때가 아니다. 하나님이 환난을 보내신 쓰라리고 아플 때이다. 우리는 이것을 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신”다(엡 1:11). 하나님은 말 그대로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 참새 한 마리라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마 10:29). 자연은 주권적이지 않다. 사탄은 주권적이지 않다. 죄악 된 인간은 주권적이지 않다. 하나님이 그것들 모두를 다스리신다(눅 8:25; 욥 1:12; 2:6; 행 4:27-28). 따라서 우리는 욥과 함께 이렇게 말한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욥 42:2).하나님은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잘 아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모든 지혜로움 가운데 그것을 뜻하셨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지혜로운 뜻이 아니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뜻을 떠나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으로부터 흘러나온다(엡 1:11). 모든 뜻이 지혜이다. 모든 뜻에 목적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사람을 향해서, 그 모든 뜻이 자비하시다. 그 밖의 사람들을 향해서, 그것은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는]” 자비로운 경종(警鐘)이다(계 22:17).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애 3:21-24)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Coronavirus and Christ: ‘Behold The Kindness and Serity of God’번역: 김종진(개혁된실천사)***존 파이퍼의 신간 ‘코로나 바이러스와 그리스도’ 한국어판 e-book을 4월 21일 TGC코리아 홈페이지에서 내려받을 수 있습니다. 2020년 1월 11일, 중국 우한 지역에서 코로나19 감염자가 처음 보고되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20년 3월 11일에 마침내 팬데믹을 선언했다. 불확실하고 두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존 파이퍼는 이번에 새로 출간하는 ‘코로나 바이러스와 그리스도’(Coronavirus and Christ)에서 온 세계 독자들에게 굳건한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서기를 독려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믿는 자들을 위해 그분의 지혜와 선하심을 성취하시고자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며, 돌보시는 주권자 하나님으로 인해 우리 영혼은 그리스도 안에서 삶을 지속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존 파이퍼는 “코로나바이러스를 통해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6가지 성경적 답변을 제공하며,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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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된실천사
코로나19로 불안한 자녀 돌보기
by Chad Kraska
2020-04-17
코로나19로 인한 두려움과 불확실성 가운데 살아가는 지금, 우리 자신의 걱정뿐 아니라 자녀들의 걱정을 다루기 위해 실제적인 생각을 나누고자 한다. 부모인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가가 우리 자녀를 포함한 다른 이들을 얼마나 적절히 보살피고 양육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1. 정보 수집은 믿을만한 자료를 통하라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머리기사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미디어 대신 믿을만한 뉴스나 정보원을 찾도록 힘쓰라. 신뢰할만한 자료는 아래에서 구할 수 있다.• 미국 질병 통제 예방센터 (The Center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 cdc.gov) • 미국 외상성 스트레스 연구센터(The Center for the Study of Traumatic Stress, cstsonline.org)(한국 내 코로나19의 발생 현황은 질병관리본부(www.cdc.go.kr)를 참조할 수 있다-편집자 주)2. 지나치게 많은 미디어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라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아는 것은 필요한 일이고 지혜로운 일이다. 하지만 너무 많이 관심을 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정보를 모으고 뉴스를 읽는 일에 ‘지나치게’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물론 나도 예외가 아니다. • 뉴스는 하루에 두 번만 확인한다 등의 규칙을 세워 언제 어떻게 최신 뉴스를 확인할 것인지에 대한 범위를 정하라• 기사 제목만 보고 충격을 받거나 놀라지 말고 정보를 제대로 수집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에 충실하라.• 아이들의 나이를 고려하여, 자녀들 역시 미디어에 지나치게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시키라. 부모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진짜 정보와 가짜 정보의 복잡한 거미줄 사이를 잘 헤쳐 나가는 것이다. 우리가 좋은 정보를 수집하여 자녀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전달해주는 것이다. 3. 필요에 따라 자녀들과 정보를 공유하라아이들과 정보를 공유할 준비를 하되, 강제로 그리할 필요는 없다. 필요 이상으로 정보를 나누지 않도록 주의하라.• 걱정, 두려움, 염려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면 우리의 현재 감정 상태를 아는 데도 도움이 된다. • 어떤 감정을 정확히 명명(naming)하고 나면 그 감정의 강도가 감소 된다. 그러므로 자녀들이 걱정하고 염려하고 있다면 그것을 부모와 나누도록 격려하라.• 아이들의 두려움은 실제적인 것이고 또한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이라는 것을 알려줌으로써 아이들의 감정에 공감하라. 동시에, 예방을 위해 무얼 할 수 있을지, 전문가들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함께 이야기해보라. • 염려나 두려움, 걱정을 부모님과 함께 나누는 것은 언제든 괜찮다는 것을 알게 하라.• 부모인 우리도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린 이 위기를 잘 이겨낼 거야” 같은 말을 통해 안심시키라. 4. 평정을 유지하고, 자신감을 보여주라• 자신감을 다른 이들에게도 보이려면 먼저 자신의 두려움과 염려를 다룰 줄 알아야 한다.• 자녀들과 함께 하는 대화는 차분한 분위기에서 사실에만 입각하여 말하라. 바이러스를 막기 위해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또 앞으로 어떤 일이 필요한지에 초점을 맞추라.• 자녀들에게 건강을 위한 습관을 가르치고, 이를 가족이 함께 세우는 계획 및 안전 생활 수칙에 포함 시키라.5. 부정적인 생각의 덫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라당신과 당신 자녀가 이 세상의 마지막이 온 것처럼 두려워 떨거나 과도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최악을 상상한다 함은 “이 바이러스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거야”처럼, 어떤 상황이 실제보다 훨씬 더 안 좋다고 상상하고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 과도한 일반화는 우리의 염려를 증가시킬 뿐인 것으로, “항상”, “결코”, “아무것도” 등의 부정확하고 극단적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우린 아무런 힘이 없다고”와 같은 말이 있다. • 해결책은 각 시나리오에서 부정적인 생각을 간파하고 그것을 정확한 진술로 바꿔보는 것이다. 이렇게 말해보는 것은 어떨까? “지금까지 이 상황에 대처하느라 힘들었던 건 분명해. 이 위기가 끝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겠지만 바이러스의 파괴력을 저지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아. 예를 들자면…” 6. 기본에 충실하라우리가 즐길 수 있는 것을 간과하거나 게을리하지 말고 균형 감각을 유지하도록 노력하라.• 가끔 바람을 쐬라.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면서도 야외 모임을 계획해보라. 가능하다면 잔디가 있는 곳으로 나가 산책이나 자전거 타기를 하면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라. 이 시간을 통해 가족 관계가 더 가까워지도록 하라. • 쉬라. 이 기회에 해야 할 많은 일을 잠시 내려놓고 당신과 당신 가족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휴식을 취하도록 하라.• 잘 먹으라. 카페인이나 설탕을 과도하게 섭취하지 않도록 하고, 그것들이 당신의 걱정이나 기분에 미치는 영향을 잘 관찰하라. • 웃고, 놀고, 즐기라. 좌절과 침울한 마음으로 이 시간을 모두 보낼 수는 없다. 때로는 실없는 행동, 유머, 재미있는 활동을 통해 당신 자신과 가족의 마음에 짐을 덜어주라. 그리하면 모두의 걱정이 줄어들 것이다. 7. 일정한 생활 규칙을 세우고 준수하라아이들을 포함한 우리는 모두 일관성 있고 예측 가능한 일과가 있을 때 좋은 성과를 낸다. 현재는 우리의 가족, 개인, 그리고 업무 등 모든 일과가 엉망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이러한 혼란에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하고 적응해가고 있다. 이러한 변화가 주는 스트레스와 염려의 정도는 실로 다양하다. 개인적으로는 자유가 점점 제한될수록 더욱 큰 실망과 환멸을 느끼기도 했다.변화와 예측 불가능에 대해 사람들은 다르게 반응한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경험하는 변화와 염려에 대해 까탈스러움, 분노, 좌절, 포기, 슬픔으로 반응할 수 있다. 이러한 징후와 증상들에 민감할 필요가 있다. 자녀들을 너무 다그치지 말고 필요할 때마다 아이들이 무엇을 염려하고 있는지 이야기를 나누라. 덧붙여서 기상 시간 및 취침 시간과 더불어 규칙적인 수면 습관, 식사 시간, 노는 시간, 공부 시간을 유지하도록 노력하면 규칙성과 예측 가능성을 높여주어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쉽지 않지만, 우리의 일상에 일종의 리듬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일이다.8. 다른 이들에 대해 생각하고 공동체 의식을 유지하라친지와 이웃이 어떻게 지내는지, 그들에게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에 초점을 맞추면 자신을 향한 염려가 다른 이들을 위한 염려로 바뀌게 된다. 이웃이 잘 지내는지 알아보고, 함께 식사도 해라.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연락해보고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 생각해보라.9. 필요할 때는 지원을 요청하라걱정으로 인해 특별한 도움이 필요하다거나 자녀들의 두려움과 걱정을 어떻게 대화하면 좋을지에 대한 도움이 필요한 경우 교회 목사나 리더들에게 지원을 요청하라. 목사는, 가족을 목양하는 당신을 목양하기 위해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에 더해, 당신이나 지인 중 누군가에게 전문적인 도움이 필요한 경우, 현재 거주 지역에 있는 많은 상담가와 정신건강 전문가들이 화상으로 원격 의료 서비스를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다.10. 당신의 영혼에 양식을 공급하라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데에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라. 영적으로 도전을 주는 책을 읽어라. 가능하면 두세 사람이 모이는 기도 모임, 소그룹 모임, 아니면 친지들과 온라인 모임을 만들어 교제하며 서로 격려하라. TGC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해 제공하고 있는 자료에 더하여 Crossway에서도 다수의 디지털 자료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TGC코리아에서는 미국 TGC, Desiring God, Ligonier 등에서 제공하고 있는 코로나 관련 자료들을 번역해서 제공하고 있으며, 이에 관한 한국 작가들의 글도 제공하고 있다 - 편집자 주)11.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빌 4:4). 이럴 때 더욱 그리하라.• 온 창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식하고 묵상하라(시 115:3). 코로나19 바이러스와 그 부산물 역시 하나님의 주권 아래 놓여 있다.• 일, 건강, 재정, 가족 등 당연시해왔던 모든 복에 대해 주께 감사하라. •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 3:15).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Parenting Anxious Kids in an Anxious Time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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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버지 유다도 다말의 의로움을 인정했어요
by 배경락
2020-04-16
안녕하세요. 저는 시아버지 유다와 부적절한 관계로 아이를 낳은 며느리, 불미스러운 사건의 주인공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여자랍니다. 여러분이 아실지 모르겠지만 구약 시대 여자들이 살아가는 방법은 남자를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 결혼해서는 남편, 그리고 아들을 의지하여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사정으로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낮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일 아들을 낳지 못한다면 여자의 삶은 가장 낮은 빈곤층으로 떨어집니다. 우리 시대 남자들의 수명은 매우 짧았습니다. 전쟁으로 죽는 경우뿐만 아니라 양을 치다 사나운 짐승을 만나거나, 도적을 만나 죽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자는 아들을 낳아야만 노후가 보장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사회에는 가문을 지키기 위하여 형이 아이를 낳지 못하고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형의 씨를 잊게 하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레비리트(levirate) 제도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문화겠지만, 우리에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저는 가나안 여자로서 가나안의 문화와 풍습에 익숙합니다. 어느 날 동네에 한 가족이 이사를 왔습니다. 산 위 동네에 살면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유다 집안이었습니다.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며 혈통과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고향 땅 하란까지 가서 아내를 얻어 온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자기 부족을 떠나서 우리 가나안 족속이 있는 지역으로 이사 온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동네에 여러 가지 소문이 많았지요. 유다가 우리 부족장 히라와 친구라는 둥, 저들이 여호와 신앙보다는 가나안 족속의 신앙을 더 좋게 생각한다는 둥 이런저런 소문이 있었습니다.1)저는 어려서부터 호기심도 많았기에 유다 집안을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유다 집안에서 섬기는 하나님에게도 관심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유다 집안은 우리에게 청혼했습니다. 그 집 큰아들 엘의 청혼이었습니다. 뜻밖이긴 했지만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였습니다. 결혼 초기에 유다 집안에 대한 호기심과 경외심을 가지고 그들을 지켜보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지만, 그들은 가나안 족속보다 더 세속적이고 사악했습니다. 남편 엘의 죄악은 이루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직접 쳐 죽였습니다.2) 하루아침에 과부가 된 저는 난감했습니다. 관례에 따라 둘째 아들 오난과 잠자리를 갖게 되었는데 그는 제게 씨를 주지 않았습니다. 고의로 그랬습니다. 형의 재산을 자기가 독식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형의 혈통이나 저의 경제적 상황 등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족속도 하지 않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둘째 오난도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징벌이 연이어 내리자 시아버지 유다는 놀랐습니다. 그는 자기 아들이 죽은 이유가 바로 저 때문이라고 생각한 듯합니다. 그리고 저에게 말했습니다. “재혼하지 말고 수절하라. 그리고 친정에 가서 셋째 셀라가 장성할 때까지 기다리라.” 저는 시아버지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런 명령을 내린 줄 알았습니다. 보통 가나안 족속 같으면 재혼하도록 해서 여자에 대한 부담을 덜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친정에 와서 시아버지의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세월이 지났지만 아무런 소식이 없었습니다. 저는 완전히 잊힌 여자가 되었습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장례도 다 치렀다는 소식도 나중에야 들었습니다. 그제야 시아버지가 말했던 것이 거짓인 줄 알았습니다. 그는 완전히 거십(거짓의 도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로부터 고엘(기업 무를 자, 속량자, 구속자) 제도의 역할을 하지 않는 사람은 동네에서 수치를 당했습니다. 종처럼 신발을 벗기고 그 얼굴에 침을 뱉게 되어 있습니다(신 25:9). 그리고 첫 번째 사람이 그 역할을 감당하기 싫으면 두 번째 사람이 그 일을 해야 했습니다. 유다 집안의 첫 번째 사람은 셋째 아들 셀라입니다. 이제 시아버지는 저를 완전히 잊어버렸고, 셋째 아들을 저에게 줄 계획은 전혀 없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저는 고엘 제도의 첫 번째 사람에게 두었던 희망을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에겐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냥 유다 집안을 ‘신발 벗은 자’의 집안으로 수치와 불명예를 당하게 할 것인가? 아니면 내가 희생하더라도 집안의 명예를 회복하고, 가문의 혈통을 이어갈 것인가? 저는 비록 가나안 여인이지만 무엇이 옳은 결정인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유다가 딤나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신전 창기로 분장하고 그를 맞이하러 나갔습니다. 왜냐하면 시아버지 유다는 고엘 제도의 두 번째 기업 무를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젊은 여자로서 정욕에 불붙어 남자를 구하러 나간 것이 아닙니다. 먹고살기 위하여 돈을 벌기 위함도 아닙니다. 목적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가문의 명예와 집안의 혈통을 유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후 이야기는 여러분이 다 아실 것입니다. 제 결정을 알아준 분은 의외로 시아버지였습니다. 그는 제게 말하였습니다. “그녀가 나보다 더 의로웠으니(She hath been more righteous than I)”(창 38:26, KJV). 하나님은 아무나 의롭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의는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인정할 때 사용하십니다. 사도 바울도 말했지요. “일을 아니 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5-8).저는 경건하지도 않고 잘한 것도 없는 여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시아버지의 입을 통하여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유다 집안의 죄악을 저 같은 이방 여인을 통하여 가리시고,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낳는 혈통이 되게 하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후일 룻이 두 번째 기업 무를 자 보아스와 결혼할 때도 마을 장로들이 저의 이름을 이용하여 복을 빌어준 것3)도 다 이런 까닭입니다(룻 4:11-12). 부디 고리타분한 유교 윤리에 젖어서 저를 윤락녀나 음탕한 여자로 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4) 감사합니다. _____________1) 유다가 이사 간 동네는 ‘거십’으로 ‘거짓의 도시’이다. 이 도시는 속고 속이는 것이 풍습이 된 도시로 유명하였다. 유다는 큰아버지 에서가 가나안 여인을 부인으로 삼은 것 때문에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몹시 마음이 상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가나안 사람과 교제를 하고 가나안 여인을 부인으로 맞았으며, 아들에게도 가나안 여인을 주었다. 2) 하나님께서 노아 홍수 때 인류를 향한 심판을 하시긴 했지만, 어떤 개인을 직접 심판하신 것은 유다의 아들 엘이 처음이었다. 하나님께서도 엘은 살려두어선 안 되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의 죄악은 극악하였다. 3)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맞이했을 때 베들레헴 장로들은 두 사람의 결합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축복한다. "우리가 증인입니다. 주님께서, 그대(보아스)의 집안으로 들어가는 그 여인(룻)을, 이스라엘 집안을 일으킨 두 여인 곧 라헬과 레아처럼 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에브랏 가문에서 그대가 번성하고, 또한 베들레헴에서 이름을 떨치기를 빕니다. 주님께서 그 젊은 부인(룻)을 통하여 그대(보아스)에게 자손을 주셔서, 그대의 집안이 다말과 유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베레스의 집안처럼 되게 하시기를 빕니다”(룻기 4:11-12, 새번역).4) 구약학자 카일 델리취는 그의 주석에서 “다말을 구약의 성녀, 거룩한 여자”라고 평하였다.
신학
구약성경
고엘
유다
다말
기업무를자
레비리트제도
코로나19로 인한 좌절을 이기는 지혜
by Abbey Wedgeworth
2020-04-15
얼마 전에 여배우 제니퍼 가너(Jennifer Garner)는 본인의 인스타그램에 코로나19로 인해 게임, 경기, 리사이틀, 작품 제작 등의 취소를 겪은 사람 등 “유치원생부터 전문직 종사자들”에 이르는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는 글을 올렸다. 집에서 무엇을 하며 지내는지를 해시태그 #heyjenlookatme를 붙여서 올리면 본인이 직접 “세상과” 나눌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제니퍼 가너는 “제가 보고 싶어서 그래요”라는 말을 친절하게 덧붙였다. 사람들이 올리는 춤 영상이나 혼잣말하는 모습 등을 재미있게 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 세계에 끼친 각종 피해가 떠올라 슬퍼지기도 했다. 예배가 취소된 교회와 교단들, 결혼식이 취소된 부부들, 졸업식이 취소된 고등학생들, 경기가 취소된 운동선수들, 대학 생활 중 적어도 한 학기는 망친 게 확실한 대학생들, 휴가가 취소된 가족들,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공연을 보지 못하게 된 팬들, 생일에 친구들과 함께 컵케익을 먹을 수 없게 된 아이들 등 많은 이들이 피해의 당사자이다. 일정만 조정하면 그만일 경우도 있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개인적인 낙심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상실에 대한 우리의 느낌을 어떻게 다루는 것이 좋을지 모를 수도 있다. 타락한 이 세상에서의 삶은 크든 작든 고통으로 점철되기 마련이고, 전염병은 바로 그러한 사실을 강조하여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성경은 우리가 낙심되어 괴로울 때 4곳을 바라보라고 말한다. 1. 위를 올려다보라깊은 좌절로 인해 모든 삶이 무너졌을지라도 우리는 주님께 나아갈 수 있다. 우리보다 많은 고난을 겪으셨기에 마음을 쏟아 놓을 수 있고, 해결자 되시는 구주께 나아갈 수 있다(히 4:16). 기도할 때는 솔직해도 된다. 하나님은 멀리서도 우리의 생각을 밝히 아시고 우리 혀의 모든 말을 알고 계신다(시 139:2–4).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 이 세상의 많은 간고를 겪으셨고 아신다(사 53:3).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해 중보하신다(히 4:15). 예수님께 의지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된다(롬 8:28; 요일 4:10).유명 연예인이 우리의 영상을 보기 원한다는 사실보다 더 놀라운 것이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뿐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확실한 선언을 하신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말이다. 실망하고 외로운 마음을 곧바로 그분께 가져가라. 그분이 당신을 위로하시고 보살피시며 당신에게 깊은 관심이 있으시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아라. 2. 안을 들여다보라갈망(desire)과 기대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좌절이나 슬픔도 마찬가지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취소된 것들에 대한 실망감은 우리 마음에 많은 것을 드러내 보여줄 수 있다.우리가 ‘무엇’ 때문에 실망했는지를 보면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재미, 가족, 행사 또는 체험, 시합, 공부, 추억 만들기 등이다. 그 실망의 ‘강도’를 보면 우리가 과도하게 바랐다거나 제멋대로 사랑했던 것, 즉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거나 추구하는 무언가를 드러내 보여준다.우리의 낙심을 내어놓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부드럽게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신다. 어떤 것을 무절제하게 좋아했던 것을 용서하시고 다시금 그리스도 안에서 질서를 잡도록 하신다.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자(요일 1:9). 우리 마음의 방향을 재정비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만족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배우게 된다(빌 4:11–13). 3. 주위를 둘러보라성경에서 말하는 바는 우리의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 하나님은 바로 그 고통을 통해 우리가 다른 이들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실망의 때에 주께 나아가 그의 위로를 경험하면 우리는 다른 이들이 애통해할 때 그들을 더 잘 위로해줄 수 있게 된다(고전 3:1–7). 하나님은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을 순종할 수 있도록 도우시고, 둘째 계명인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를 순종할 수 있게 하신다(마 22:36–40). 그러므로 좌절의 순간에 바라봐야 할 세 번째 장소는 바로 당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다. 어떻게 하면 당신이 그들에게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을지 생각해보라. 내 친구 한 명은 예약한 결혼식장에서 결혼식 취소를 통보받았다. 그 친구는 가족들의 방문도 뜸한 곳, 외로움에 시달리는 요양원의 노인들에게 자신의 결혼식 꽃을 기증했다. 앤드류 피터슨(Andrew Peterson)은 그의 투어가 연기되자 집에 갇혀 있는 그의 팬들을 위해 책을 낭독하여 그의 페이스북 페이지에 포스팅하고 있다. 당신의 이웃은 누구인가? 지금 몸이 안 좋거나, 외롭거나, 두려움에 떨고 있을 수도 있는 이들이 누구인가?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알고 있는가? 다른 이들의 실망감에 대해 생각해보고, 이렇게 비상한 시기에 하나님이 당신에게 원하시는 선한 일이 무엇인지 하나님께 물으라(엡 2:10). ‘당신’이 당신의 이웃을 관심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그들이 ‘하나님도’ 그들을 보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라. 4. 앞을 내다보라우리는 이 땅에서 좌절을 경험할 때마다 이 세상이 창조 때의 모습을 잃어버려 망가진 세상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게 된다. 더디 이루어지는 소망은 우리 마음을 상하게 하나 실현된 약속은 생명 나무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예(Yes)가 되어 우리가 아멘이라 선포하게 한다(잠 13:12; 고후 1:20).내일 일에 대해서까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지금 순간만을 살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 느끼는 깊은 좌절감을 통해 우리가 사랑하는 가족과 삶을 위협하는 슬픔, 실망 또는 아픔이 없는 영원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크고 작은 슬픔 속에서도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이 소망은 모든 것이 불확실한 때에 우리에게 주어진 영혼의 닻 같은 것이다(히 6:19). 이 소망은 우리를 실망하게 하거나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이다(롬 5:5).낙심의 때에 우리의 신실하신 구주께 나아가면, 그는 눈물을 닦아 주시고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는 소경 됨을 치유하며, 다른 이들의 상처와 필요를 보게 하신다. 우리의 눈을 들어 지금 이 순간, 그분이 모든 것의 구속을 위해 어떻게 일하고 계신지를 보게 하신다. 어린양의 혼인 만찬은 결코 지체될 수 없고 지체되어서도 안 되는 잔치이다.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지만 언제나 완벽한 하나님의 계획은 결코 누구도 방해할 수 없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Everything’s Canceled! Dealing with Disappointment in Pandemic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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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퍼가너
팀 켈러가 말하는 좋은 설교란?
by 고상섭
2020-04-14
“설교는 영광스러운 소명이다.”현 TGC대표 줄리어스 김의 ‘설교학’ 서문의 첫 문장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설교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때로는 싫증을 내는 시대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위대한 소명이다. 에드먼드 클라우니는 회중을 향해 말씀을 선포하는 것과 소그룹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질적 차이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설교만의 독특한 부르심과 권위가 있다고 말했다. 아마 청중들에게 설교를 해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설교와 성경공부 또는 설교와 강의 사이에는 무언가 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경험했을 것이다. 팀 켈러는 “이는 하나님의 영이 공식적인 예배 모임에 부여하신 고유한 권위”라고 말했다. 물론 교회 안에는 다양한 형태의 말씀 사역이 필요하다. 하지만 설교라는 특별한 사역은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 설교의 영광을 회복하는 일일 것이다. 어떻게 하면 설교의 영광을 회복할 수 있을까? 팀 켈러는 ‘설교’에서 위대한 설교의 비결을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1. 철저히 준비하라 먼저, 설교자의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통로이기에 철저히 말씀을 연구하고 묵상해야 한다. 나쁜 설교와 좋은 설교의 차이는 대체로 설교자 안에 있기 때문이다. 설교자의 은사와 기술, 특정 메시지에 대한 설교자의 준비 상태가 좋은 설교와 나쁜 설교를 만들어 낸다. 철저한 주해와 적용까지 설교 전과정을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이 과정은 고된 작업일 뿐 아니라 기술적으로 구성하는데도 수년의 걸친 연습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는 것만으로는 위대한 설교를 할 수 없다. 팀 켈러는 이렇게 말한다.“나쁜 설교와 좋은 설교의 차이는 대체로 설교자의 책임이지만, 좋은 설교와 위대한 설교의 차이는 설교자와 더불어 청중의 마음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역사에 달려있다.” 사도행전 16장에서 바울은 빌립보에서 첫날을 맞아 기도할 곳을 찾다가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때 루디아라는 여인이 예수님을 영접했다.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행 16:14) 빌립보에서 전한 메시지는 바울에게서 나왔지만 듣는 이들을 향한 설교의 효력은 오직 성령님으로부터 나온다. 인간이 최고의 설교 원고를 만들어도 성령님이 역사하지 않으시면 듣는 이들에게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부족한 설교 원고 일지라도 성령님의 손에 사로잡히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된다. 이 말을 오해하게 되면 철저히 준비하기보다 오직 성령님의 역사하심에 매달리며 기도만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기계적으로 열심히 기도한다고 성령님이 기계적으로 역사하시는 것은 아니다. 2. 간절히 기도하라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위대한 설교는 인간의 노력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이 아니며 또 인간의 노력에 달려 있다는 말도 아니다. 누군가 위대한 설교의 비결을 가르쳐 줄 수 있다고 한다면 아마도 잘못된 가르침일 것이다. 왜냐하면 위대한 설교는 누군가에게 배워서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대한 설교의 주체는 오직 성령님이시다. 어떤 이들은 설교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면 성령님이 역사하신다고 말하기도 한다. 부흥사로 유명한 어느 목사님은 설교 전에 2시간씩 설교만을 위해 기도하면 강대상 위에서 펄펄 날아다닌다는 말씀을 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설교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마치 인간의 기도로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잘못된 신념을 갖게 할 수도 있다. 팀 켈러는 “설교자의 기도 생활이 위대한 설교의 비결입니까?” 라는 질문에 ‘예’이며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물론 깊고 풍성한 기도 생활은 위대한 설교와 좋은 설교를 위한 필수요소이지만 그렇게 기도한다고 설교의 위대함이 자동적으로 보장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위대한 설교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팀 켈러의 책에 나오는 설교를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어 문화의 심장부에 있는 문화 내러티브를 벗겨내고 성령님의 역사와 함께 청중들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정감(Affection)을 변화 시키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팀 켈러의 이 정의에 대해 앞으로 TGC코리아 아티클을 통해 하나씩 살펴볼 것이다). 이런 위대한 설교의 정의를 위해 반드시 설교자가 가져야 하는 두 가지 자질이 있다. 3.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라 존 칼빈은 고린도전서 1장 17절에서 바울이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이라는 구절을 해설하면서 이 말은 어떤 수사학도 설교에 첨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이 남용되어 수사학 자체가 목적이 되는 설교를 경계하라는 것이라 설명했다. 칼빈은 웅변술과 수사학 같은 인간적인 기술이 설교라는 여주인을 섬기는 여종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오늘날의 설교는 청중의 즐거움을 위해 재미와 즐거움의 요소들이 점점 강단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설교는 단지 재미를 추구하는 인위적인 공연이 아니다. 팀 켈러는 “신령한 설교는 복음 진리 자체를 향한 사랑과 그 진리를 듣는 사람들을 향한 절박한 사랑(desperate love)에서 나온다. 그 진리를 받는 것이 청중에겐 곧 삶과 죽음의 문제임을 알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위대한 설교를 위해서는 두 가지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이 두 가지 마음을 가지면 자동적으로 위대한 설교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두 가지 마음을 가지지 않는 위대한 설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설교자의 마음속에 불타올라야 하는 두 가지 마음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간절한 열망, 즉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사랑이다. 또 한 가지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대상인 청중을 향한 절박한 사랑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사랑이 있을 때 설교자는 그 말씀을 기도하며 철저히 준비하게 된다. 더욱 하나님을 알고 싶고 사랑하고 싶기 때문이다. 또한 죽어가는 영혼들을 향한 절박한 사랑이 있을 때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고 싶어질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위대한 설교의 주체가 되신다. 오직 성령님만이 사람을 변화 시킬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 설교자의 마음과 상관없이 단독적으로 그 일을 행하지 않으신다. 먼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사랑과 청중을 향한 불타는 심령을 설교자 안에 부어 주신다. 설교자는 이 두 가지 사랑을 가슴에 품고 철저히 설교를 준비하고 기도해야 한다. 팀 켈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설교할 때 일어나는 일은, 우리가 기도할 때 일어나는 일과 거의 같다.” 설교 시간에 ‘죄의 고백’에 대해 설교한다면 설교자의 기도 시간에 죄의 비통함과 애통함을 먼저 경험해야 한다. 그렇게 기도시간에 경험한 것만이 설교시간에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설교 시간에 “주님은 위대하십니다”라고 말해야 한다면 먼저 설교자의 기도시간에 위대한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기쁨과 감격을 경험해야 한다. 설교에 앞서 하나님은 설교자의 마음을 만지시고 거룩한 정서로 가득 채워주신다. 팀 켈러는 설교자들에게 이렇게 경고한다. “우리가 개인기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설교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반대로 우리가 기도할 때 그런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설교에서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설교자들이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라. 설교자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늘 자신의 부족함으로 고뇌하며 부르짖는 사람이지만, 우리가 여전히 그 길을 걸어가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설교가 때론 힘겨울 때도 있지만 또한 언제나 영광스러운 길이기도 하다. 설교가 무엇인가? 설교란 영광스러운 소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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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재택근무
by Joe Holland
2020-04-13
코로나19와 관련한 뉴스와 질병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또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바이러스 전파를 막기 위해 기업에서는 가능한 한 많은 직원에게 재택근무를 권고하고 있다. 이런 경험은 많은 근로자에게 처음 있는 일이다. 재택근무 경험이 아예 없거나 거의 없는 사람들에게 지금의 상황은 실로 큰 변화이다. 이런 변화가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재택 근무자들을 보면서, 지난 6년간 재택근무를 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만약에 누군가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재택근무를 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지를 묻는다면 나는 할 말이 많은 사람이다. 정직하라(Pursue Integrity)첫 번째로 재택근무는 정직을 요구한다. 이게 가장 중요한 점이다. 정직이 없다면 아무리 훌륭한 방식으로 근무하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재택근무가 지난 몇 년간 좋지 않은 이미지를 준 것도 바로 이 점 때문이다. 여러 산업 분야에서 재택근무를 하는 직원 중에는 아예 일하지 않거나, 고작해야 일주일에 몇 시간만 일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재택근무를 성실하게 하려는 사람에게도 게으름은 정말로 심각한 유혹이다. 사무실에서 근무할 때 당연히 따라오는 사회적 책임감은 재택근무에 해당하지 않는다. 만약에 사무실에서 일하는 당신이 근무 중에 게임을 하거나 인터넷 쇼핑, 혹은 스포츠 경기를 보고 있다면 당신의 동료가 그냥 두고 볼 리가 없다. 동료와 얼굴을 보면서 대화하고 일하는 것은 모두가 공유된 직업윤리를 만들어가도록 한다. 열심히 일하는 옆자리의 동료를 보면서 자극을 받아 열심히 일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믿음은 재택근무를 하는 그리스도인의 직업윤리를 더 강화할 수 있다. 우리는 상사가 보지 않더라도, 또 급여 수준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아무리 재택근무를 한다고 해도 우리는 얼마든지 정직하게 일을 할 수 있다. 비록 일터는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도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직이라는 한 단어만 제대로 기억한다면 재택근무는 우리에게 코람 데오(Coram Deo), 즉 하나님의 얼굴과 대면하고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재택근무 환경과 관계없이 우리는 얼마든지 효율적으로 업무에 집중할 수 있다. 정직이라는 가장 중요한 원칙을 기억하면서 재택근무에 필요한 몇 가지 실질적인 조언을 살펴보도록 하자. 시간을 배분하라재택근무와 관련한 오해 중 하나는 출근해서 겪어야 하는 갖가지 잡무 등에서 해방되기 때문에 엄청나게 생산성을 높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집에서 근무하면 정말로 더 높은 생산성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기계가 아닌 인간이다. 우리 속에 엉겅퀴와 쓴 뿌리를 여전히 남겨놓은 인간의 타락은 지금도 여전히 아담의 후손인 우리 모두를 저주하고 있다. 출근하는 사람이든 재택근무를 하는 사람이든 가리지 않는다. 우리는 유한한 피조물이다. 집중 근무와 관련한 가장 뛰어난 연구 결과에 의하면 사람은 누구나 60분에서 90분 정도까지만 집중할 수 있다. 그 후에는 휴식을 취해야 한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이런 식의 집중은 하루에 두 번에서 세 번 정도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에게 어느 정도 여유를 주어야 하고, 집중해서 일하는 시간과 휴식 시간을 적절하게 배분해야 한다. 이메일 응답이나 파일 시스템 정리와 같은 단순 작업에 필요한 시간도 적절하게 배분할 필요가 있다. 전화를 하라재택근무라고 하면 다른 사람과 직접적인 대화를 나누거나 얼굴을 보는 일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여기기 쉽다. 그런데 정말로 그럴까? 대부분의 작업 공간이 디지털화되어 있기에 근처 사무실에서 일하는 직원이나 다른 곳에서 일하는 직원들과도 커뮤니케이션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단지 직접 만나서 대화하지 않을 뿐이다. 애질 앤 린 방법론(Agile and Lean methodologies, 역자 주: 낭비 요소를 제거하기 위한 경영 기법의 하나)과 같은 효율적인 프로젝트 관리 모델에 따르면, 높은 생산성을 올리는 팀일수록 직접 만나서 대화하는 횟수가 더 많다고 한다. 재택 근무자도 여전히 그렇게 할 수 있다. 질문이 있거나 전달할 정보가 있는 경우라면, 언제라도 전화기를 들거나 화상 회의를 할 수 있다. 그런 시간을 더 자주 가질수록 더 생산적이고 건강한 근무 환경을 만들 수 있다. 지구촌을 휩쓰는 전염병 때문에 우리가 더 자주 의사소통을 하게 된다면, 그건 참으로 근사한 일이 아닌가? 상사의 기대 수준을 알라전 세계적인 전염병 사태를 맞아서 이토록 많은 사람이 재택근무를 할 것으로 예측하고 준비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런 현실을 맞았다. 모든 사람의 근무 환경은 다 다르다. 급여와 관계없이 많은 근로자가 재택근무라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기회가 된다면 상사가 기대하는 재택근무의 수준과 관련해서 최대한 솔직하고 열린 대화를 가져야 한다. 상사는 내가 어떤 시간대에 대기하고 있기를 원하는지? 전화, 이메일 또는 채팅 등의 방법 중에서 어떤 방식으로 대답하기를 원하는지? 화상 회의를 하는 경우 복장은 어떠해야 하는지? 이런 모든 사항을 솔직하고 투명하게 의논해야 하고, 질문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당신만의 워터쿨러(watercooler) 공간을 찾으라워터쿨러(역자 주: ‘워터쿨러 효과’에서 나온 단어. 워터쿨러 효과란 사무실에 비치된 물 등의 음료를 마실 수 있는 공간에서 직원들이 모여 대화함으로 사내 의사소통이 더 활발해지는 현상을 일컫는 말)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지만, 워터쿨러는 이제 직장 동료들 사이에서 비업무 관련 대화를 나누는 상징적인 위치가 되었다. 재택근무를 하는 사람도 중간중간 쉬어야 한다. 누구나 자신만의 워터쿨러 공간이 필요하다. 전염병 상황을 맞아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가족과 함께 자가격리 상태에 들어가 있다. 한편으로 보면 이것은 우리가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워터쿨러 공간을 갖게 되었다는 일종의 축복이 될 수도 있다. 독신자나 가족과 떨어진 공간에서 근무하는 사람이라면 가족이나 친한 친구와의 전화 통화가 워터쿨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알람에도 우선순위를 정해 놓으라새로운 업무나 바뀐 업무는 보통 이메일을 통해서 전달된다. 지금과 같이 복잡한 환경에서는 굳이 전 세계적인 위기가 아니더라도 매일 매일 처리해야 하는 이메일과 메시지는 상당한 수준이다. 그중에서 어떤 것은 매우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는 진짜 중요한 메일이나 메시지와 그렇지 않은 것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모든 메시지와 이메일에 설정된 도착 알람부터 해제해야 한다. 중요한 메시지를 보내는 대상을 선별해서 알람을 별도로 설정해야 한다. 알람에도 우선순위를 정함으로 우리는 좀 더 집중해서 일할 수 있다. 알람에 의해 방해를 받더라도 그건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확인하여 업무 효율을 놓일 수 있다.아날로그로 일하라디지털 연결이 없으면 아예 불가능한 게 재택근무지만 우리는 여전히 펜과 종이를 사용해서 일할 수 있다. 특히 알람에 우선순위를 설정하는 경우에 더 그렇다. 아날로그로 일하는 것은 주의를 산만하지 않게 하고 불안감도 줄여준다. 특히 지금과 같이 전 세계적인 위기를 맞아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새로운 상황을 보도하는 뉴스에 중독되어 긴장감을 떨치기 어려운 상황일수록 아날로그로 일하는 건 큰 도움이 된다. 출퇴근(Commute)을 만들라나의 출퇴근 거리는 우리 집 1층에서 지하실 사무실까지 가는 열네 발자국이다. 퇴근할 때 교통 체증이 없는 건 너무도 확실하지만, 십 초 동안 단 열네 발자국을 걷는 일터에서 집으로의 전환은 그리 쉽지 않은 변화이다. 재택근무자에게 집과 직장은 같은 장소이다. 따라서 출퇴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상의 출퇴근 루트를 만들고, 최소한 5분이라도 퇴근 직전에 수행하는 업무정리 등 나름의 루틴을 만들어 놓으면 그건 매우 건강한 습관이 될 수 있다. 하루의 업무를 정리하고 기록하는 데는 단 몇 분이면 충분하다.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하여 다음 날보다 더 효율적으로 일을 시작할 수 있다. 하루 동안 채 해결하지 못한 문제점에 대해서 기록해 놓으라. 그리고 퇴근과 동시에 우리의 관심을 하나님이 직장 외에 주신 다른 우선순위들, 가정, 건강 그리고 개인적인 삶으로 돌려야 한다. 하루 동안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퇴근해서 집에 “도착”할 때까지 주님을 계속 섬길 힘과 바른 방향성을 달라고 기도하자. 떨어져 일하는 친구와 대화하라재택근무와 관련한 좋은 내용을 게시물 하나에 다 실을 수는 없다. 이 주제와 관련한 책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재택근무를 더 잘하고 싶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코로나19 이전부터 이미 재택근무를 하던 믿을 수 있는 친구 또는 동료를 찾는 것이다. 새로운 공간에서 일할 때 필요한 정보와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전 세계는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이제 완전히 새로운 근무 환경을 맞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게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재택근무를 할 것인지, 아니면 그만할 것인지와 관계없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여전히 재택근무라는 독특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 www.ligonier.org원제: Working Remotely to the Glory of God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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