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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한 죽음? 어리석은 죽음?
by 김돈영
2020-03-21
웃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정말 억울하겠다, 궤가 떨어질 것 같아서 잡은 것뿐인데 죽다니 말이야”“무슨 소리야! 정말 어리석은 거지, 그걸 왜 만져, 만졌으니까 죽는 거지”웃사를 아는가? 억울함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바로 그 ‘웃사’ 말이다. 첫 번째 왕 사울이 죽은 후 다윗은 통일된 왕국을 다스리게 된다. 예루살렘을 정복한 다윗은 7년 6개월 동안 다스리던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옮긴다. 다윗은 바알레유다(가럇여아림)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예루살렘으로 하나님의 궤를 옮기기로 했다. 새 수레를 준비하고, 악기 연주할 사람도 모였다. 드디어 수레에 실은 하나님의 궤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악기를 연주하며 여호와를 찬양한다. 웃사는 아효와 함께 궤를 실은 수레 곁에서 가고 있다.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소가 휘청한다. 수레가 흔들리면서 바닥으로 궤가 떨어질 것 같다. 웃사는 재빠르게 궤를 잡았다. 떨어지지 않도록 말이다. 그리고 죽었다. 외부의 요인으로 죽은 게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였다. 웃사는 궤 곁에 쓰러져 그렇게 죽었다.웃사의 죽음을 본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하나님의 심판이니 알 권리 공익의 차원에서 웃사의 죄를 낱낱이 파헤쳐야 할까? ‘불쌍하다’는 사람과 ‘억울하다’는 사람으로 나누어서 무엇이 옳은지 확인해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내가 아니라 다행이라며 자리를 피해야 할까?웃사가 죽은 이유는 분명하다“진영을 떠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는 일을 마치거든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민수기 4장 15절)웃사는 몰랐다. 하나님 말씀을 몰랐기 때문에 손으로 만졌다. 우리는 웃사의 잘못이 분명하기에 그의 죽음은 죄에 대한 심판으로 보면 되는가? 그렇게 하기에는 뭔가 찜찜한 부분이 있다. 그 찜찜한 이유를 차근차근 생각해 보자.레위인은 무엇을 했는가?웃사가 말씀을 몰랐다면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 말씀을 가르칠 책임이 있는 레위인은 도대체 무엇을 했단 말인가! 직무를 바르게 수행하지 않은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주의 법도를 야곱에게, 주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며 주 앞에 분향하고 온전한 번제를 주의 제단 위에 드리리로다”(신명기 33장 10절) 레위인은 땅을 분배받지 않았다. 각 지파에서 제공한 성읍에 거주하며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 말씀에 무지하여 사망사고가 일어났다면 레위인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들은 자신의 역할을 소홀히 하여 나라가 혼탁해졌던 경험이 있다. 말씀을 가르치지 않을뿐더러 개인의 제사장으로 고용되고 심지어 첩을 두는 일까지도 서슴없이 했던 과거가 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사사기 21장 25절)라고 말할 만큼 타락한 사사시대를 지나왔다.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자신의 역할을 등한시 한 것이다.다윗은 어떠했나?이스라엘의 왕은 대리 통치자다. 왕이지만 제한 된 왕권이다. 자신의 신념과 소신에 따라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왕 위의 진정한 통치자, 하나님께 권한을 위임받아 다스리는 왕이다. 그가 할 일은 참된 왕이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그래야 그 뜻을 온전하게 전달하고, 대신하여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신명기는 그가 해야 할 일을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신명기 17장 18~19절) 하나님의 궤를 운반하는 일에 다윗이 함께했다. 그가 법궤 운반의 모든 것을 기획했다면, 자신이 기획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그래서 몰랐다고 해도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그의 직무가 바로 율법을 익히고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몰랐다면 왕으로서의 직무를 유기한 것이다. 만일 알고 있었다면 그것은 더 큰 일이다. 율법을 적용해야 하는 일을 소홀히 하여 사람을 죽게 했기 때문이다.웃사는 피해자인가?레위인과 왕 모두 직무유기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 웃사는 자기 생각대로 행동한 것이다. 말씀을 벗어나는 죄를 저지른 것이다. 그렇다면 웃사는 가르침을 받지 못한 피해자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출애굽기 19장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께서 모든 나라의 제사장으로 부르셨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레위와 같은 직분을 감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약속의 땅 가나안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신당부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가르치라고 말이다.“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명기 6장 6~7절)웃사는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말씀 아래 있는 자로서 그 역할을 충실하게 하지 않은 것이다. 그가 레위족속이 아니라 다른 족속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유지되고, 말씀을 가르쳐야만 하는 것이다. 어디에서 단절되었는지는, 어떻게 하다가 단절되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단절되었고 더 이상 말씀이 흐르지 않고 멈추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럼 웃사의 죽음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1. 총체적 문제다누구 하나의 문제가 아니다. 왕과 레위, 웃사 그리고 다른 백성들도 모두 당사자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것이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핑계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말씀을 아는 이가 있었다면 최악의 사태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웃사의 잘못을 심판한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전체, 우리 모두에게 경고하신 것이다. 빨리 정상으로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웃사의 죽음에 당사자가 아니라고 해서 안심할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경각심을 가지고 돌아보아야 한다. 웃사 주변에 서서 불쌍하다고 억울하겠다고 말하면서, 돌아서서는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생각은 버려야 한다. 2. 변해야 한다누워있는 웃사를 바라보며 깨달아야 한다. 질문을 던져야 한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가? 하는 질문 말이다. 왕이 깨달아야 한다. 그가 변해야 한다고 말하지 마라. 레위인들은 정신 차리고 자신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고도 말하지 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곧 성도로서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라.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보듯 하나하나 천천히 살펴보라. 무엇이 보이는가? 말씀으로 충만한 성도의 모습이 보이는가? 그렇지 않다면 변해야 한다. 잘못 채운 단추를 풀어야 한다. 번거롭고 귀찮더라도 풀어헤쳐야만 제대로 채울 수 있다. 처음부터 잘 채워나가도록 변해야 한다.3. 함께 울어야 한다지금 상황에서 가장 큰 충격은 오롯이 웃사의 가족 몫이다. 우리의 문제이고, 우리의 죄라고 말하지만 웃사의 가족에게는 갑작스러운 죽음의 충격이 더해진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쉽게 말하지 마라. 심판은 하나님의 영역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추측하지 마라. 판단하지 마라. 마치 하나님이 된 것처럼 말이다. 그냥 함께 아파하고 울어주는 것이다. 이유가 어떻든 갑작스러운 죽음과 마주하고 있는 웃사의 가족이다. 그 가족과 슬픔을 나누는 것이다. 진심으로 아파하고, 안타까워하며 위로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해야 할 일이다. 무엇을 말씀하시는가?우리에게 주어진 모습도 이와 같다. 요즈음 ‘코로나19’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는 우리의 이웃들을 향한 시선, 우후죽순 생겨나서 손조차 쓸 수 없는 다른 나라의 상황을 바라보는 시선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문제이고, 그들의 잘못이라고 치부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를 통하여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려고 애써야 한다. 말씀을 따라 변해야 한다.그리고 팔을 걷어붙이고 이웃에게로 나아가야 한다. 나의 힘이 닿는 대로 안타까운 마음, 사랑의 마음을 전해야만 하는 것이다. 어려운 현장으로 직접 달려갈 수 있고, 후방에서 물질적인 지원을 할 수 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응원하고, 격려하며 자신의 방법으로 사랑을 전할 수도 있다. 무엇을 하든지 우리의 이웃들,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는 이들을 향한 시선은 사랑이어야 한다. 참으로 복음을 안다면, 복음을 참으로 전한다면 말로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 우리를 향한 그 사랑에 기초해서 움직이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신 명령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본다면, 그들이 믿지 않기 때문에 심판받는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심판은 하나님께서 하신다. 그것이 심판인지 아닌지 우리에게 알려주신 일이 없다. 따라서 그들을 향한 시선은 사랑에 기초한 안타까움이고, 애처로움이며 슬픔이어야 한다. 그 안으로 뛰어들어가서 아픔을 나누고, 짐을 나누어지는 것이 마땅한 일이며, 먼저 믿은 사람의 행동인 것이다. 복음을 행동으로 전하는 것이다.믿음이 약하거나 말씀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마찬가지다. 그의 부족함으로 인한 하나님의 경고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 뜻이 무엇인지는 하나님만이 아신다. 그 뜻을 이루어가시고 완성해가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단지 함께 아파할 뿐이다. 그 아픔을 보듬어주고, 더 큰 상처를 당하지 않을까 염려하고 기도하는 것뿐이다.웃사를 바라보면서 믿음 없는 사람에 대한 심판, 말씀에 무지한 사람을 향한 경고, 혹은 억세게 재수 없는 사람으로 치부해 버려서는 안 된다. 사건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야 한다. 각자에게 주시는 대로 깨닫고 행하는 것이다. 만일 당사자가 아닌 관람객의 마음을 갖는다면 그 순간 웃사의 모습은 나의 모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나를 통하여 다른 이들에게 말씀하실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아파야 한다. 아파해야 한다. 아니, 아파해야만 한다. 그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이 비극을 앞에 둔 우리가 가장 먼저 할 일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말이다.
신학
구약
웃사
나곤의타작마당
다윗
아비나답
하나님의궤
변증학을 변론하다
by Stephen J. Nichols
2020-03-21
신학교 시절 변증학 교수님께서 직접 경험한 황당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사람들과 삶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 은행 대출 상담원이 있었다고 한다. 교수님께서 대출 상담원에게 본인은 변증학(Apologetics) 교수라고 소개하자, 그녀는 “정말 놀랍네요”라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요즘 같은 때 사람들에게 어떻게 사과(apology)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 정말 필요하죠”라고 말했다고 한다. 대출 상담원의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다. 변증학이란 우리가 잘못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에 대한 학문이 아니다. 이는 믿음을 변호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사실 신앙을 변호하는 일은 오늘날 매우 시급하기에 우리는 더 많은 변증학 교수들이 필요한 상황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변증가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R. C. 스프로울의 최근 저서 가운데 ‘모든 사람은 신학자다’(Everyone’s a Theologian)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우리는 같은 맥락에서 “모든 사람은 변증가다”(Everyone’s an apologist)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과 진리와 복음을 깨닫도록 인도된 자들은 믿음을 수호해야 할 책임과 특권 둘 다 가지고 있다. 우리는 ‘답변하도록’ 강요받는다. 단순히 철학적으로 뛰어난 자들이나 문화적으로 능숙한 이들에게만 의존해서 그 책임을 떠넘길 수 없다. 모든 사람은 변증가이기 때문이다.명령헬라어 단어 ‘apologia’는 문자적으로 “~에게 말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단어의 의미는 “변호하다”라는 의미가 되었다. 아테네가 소크라테스를 향해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고소했을 때,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위한 변론을 해야만 했다. 그는 여기에 ‘변론’(Apologia)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자신에 대한 논리 정연한 변론을 제기하면서 “아테네 사람들” 앞에 서 있었다. 신약 성경에서는 이 단어를 17번 사용한다. 많은 경우 법정의 상황을 고려하고 있는데, 가령 바울이 사도행전 22장에서 유대 공회 앞에 나갔을 때나, 25장에서 베스도 앞에 나타났을 때의 경우다. 바울은 또한 로마 감옥에 투옥된 사실을 복음의 변증으로 이야기한다(빌 1:7, 16). 헬라어 단어 apologia에 대해 가장 대표적인 성경 말씀은 벧전 3:15–16절이다. 베드로전서는 오늘날 터키의 소아시아 지역에 살고 있던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기록된 성경이다. 이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믿음 때문에 추방되었고, 핍박으로 고통받고 있었으며, 중상모략을 당했다. 그들 중 일부는 가족들의 손에 고통을 받기도 했다.베드로는 그들을 향하여 반대 세력 앞에 두려워하거나 움츠리지 말라고 명령한다. 대신에, 베드로는 이 흩어진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우리에게 언제나 변론할 것을 준비하라고 명령한다. 주동사인 “변호하다”로 번역되는 헬라어 단어 apologia는 명령형으로 사용되었다. 명령형 단어는 명령의 상황에서 사용되며 여기에는 연기나 유예 절차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명령은 우리 모두에게 적용된다.더 나아가 베드로는 우리가 어떻게 믿음의 변론을 해야 하는지 설명한다. 그는 우리가 “언제나 준비”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는 어려운 일이다. 우리 믿음에 대한 질문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오는 경향이 있다. 언제나 준비되기 위해서 우리의 믿음을 알아야만 하며, 이는 우리의 신학을 알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또한 우리의 청중들을 알아야만 한다. 아테네의 아레오바고에서 변증가로 있었던 바울의 예를 통해 이를 발견할 수 있다(행 17:16–34).베드로는 우리가 “온유와 두려움으로” 변론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한다(벧전 3:15). 이것은 더욱더 어려운 일이다. ‘두려움’(respect)으로 변역한 단어는 ‘경외/숭배’(reverence)라는 단어로도 번역된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사용되는 단어와 동일하다. 그래서 흩어진 우리는 우리를 시험하는 그들을 온유함과 존경의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그리고 16절을 보면, 베드로는 우리가 누구인지는 우리가 하는 말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우리의 삶이 말로 인해 부끄럽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대신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선한 행실이” 또한 믿음을 위한 변론의 도구가 되기를 원한다. 현실바울이 일어나 아테네에서 그의 변론을 하기 전에, 사도행전 17장 16절은 바울의 “마음(영혼)이 격분했다“라고 기록한다. 만일 누군가, 특별히 미국 내에서, “립 밴 윙클”(Rip Van Winkle)수면(잠을 많이 자는 사람 혹은 시대에 뒤처진 사람을 일컫는 표현-역주)에 빠진 사람이 2011년에 잠들었다가 5년이 지난 후 2016년에 깨어났다고 했을 때, 아마도 그는 “우리나라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최근 격변하는 문화는 다양한 반응을 끌어내고 있다. 우리의 반응이 위축되거나 타협하는 쪽으로 흐르지 않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베드로전서 3장 15–16절의 명령을 위반하는 것이 되며, 우리가 교회이기를 중단하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의 마음에 감동이 일어나기를 원한다. 우리는 변증가가 되어 복음에 담대히 나아가며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을 향하여 연민의 마음 갖기를 원한다. 또한 우리 안에 있는 소망(복음이 절박한 가운데 있는 세상을 위한 유일한 소망)을 제시할 준비가 언제나 되어있기를 바란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An Apology for Apologetics번역: 정진호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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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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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ologetics
변증학
‘코로나19’가 주는 여덟 가지 교훈
by Mark Oden
2020-03-20
이탈리아 세 번째 도시인 나폴리는 내가 현재 거주하며 사역하고 있는 곳이다. 나폴리는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인해 이동이 폐쇄된 이탈리아 도시들 중의 하나이다. 교회 예배를 포함하여 대규모 집회가 금지되었다. 결혼식, 장례식, 세례식 등 공적 모임이 모두 취소되었다. 학교와 극장, 박물관과 체육관 등 모든 공공장소가 문을 닫았다. 아내와 나는 방금 전 쇼핑센터에서 쇼핑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계산대 앞에서 2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이탈리아는 최근 ‘코로나19’ 누적 확진자와 사망자 수가 모두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18일 현재 확진자 35,713명, 누적 사망자 3,000명, 역주). 그 결과, 이탈리아 정부는 전 국민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외출을 자제할 것을 권고했다.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이러한 위기 상황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으로 대응해야 하는 한다는 것이 답이다. 한편 우리는 이 폭풍의 눈을 들여다보며, “주님, 이를 통해 무엇을 배우기 원하시나요? 나를 어떻게 변화시키려 하시나요?”라고 물어 보아야 할 것이다.이런 상황에 ‘코로나19’ 사태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 여덟 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1. 인간의 취약성이번에 세계적으로 찾아온 위기는 인간으로서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지를 가르쳐주고 있다.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전 세계적으로 확진자와 사망자 수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18일 현재 8758명 사망, 역주). 세계 모든 나라의 정부는 이 바이러스가 확산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으나, 결국 세계 전역으로 확산되고 말았다.코로나 바이러스보다 더 강력하고 전파력이 더 빠른 바이러스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만약 그러한 위협에 처한다면, 과연 인류의 종말을 막을 수 있을까? 대답은 명백하게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잊고 지내는 경우가 많지만, 인간은 참으로 연약하고 쓰러지기 쉬운 존재이기 때문이다.시편 기자의 말이 진실하게 들린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혹은 ‘코로나19’]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시 103:15–16).이러한 인간의 취약성에 대한 이 말씀의 교훈은 무엇인가? 이 땅에서 우리의 생명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말고 은혜로 여겨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2. 인간의 평등성‘코로나19’는 민족이나 나라의 국경에 상관없이 퍼지고 있다. 그것은 중국 바이러스가 아니다. 인류 전체가 경험하는 바이러스다. 아프가니스탄, 벨기에, 콜롬비아, 덴마크, 프랑스, 미국 등 150 여 개국에서 발생했다. 우리 모두는 인류라는 거대한 가족의 구성원이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창 1:17). 우리의 피부색, 언어, 억양, 문화의 다름은 이 유행병의 눈으로 보면 아무 의미가 없다.세계 각국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바이러스의 눈으로 보면, 모두가 똑같은 존재이다.고난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로 인한 고통 가운데에서 우리는 모두 완전히 평등하며 말할 나위 없이 연약한 존재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3. 통제력 상실우리는 모두 자신의 삶이 잘 통제되기를 원한다. 운명을 다스리고 주도하고 싶어한다. 오늘날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삶의 중요한 부분을 통제할 수 있는 현실이다. 가정의 난방이나 보안 시스템을 원격 조정할 수 있으며, 핸드폰 앱에서 손가락으로 몇 번만 클릭하면 전 세계 어느 곳이든지 송금을 할 수 있고, 운동과 약으로 몸의 건강 상태도 조절할 수 있다.하지만 삶이 그렇게 잘 통제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 환상일 수 있다. ‘코로나19’와 같은 일을 경험하면, 어쩌면 그것이 거품과 같은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여기 이탈리아 당국은 이 바이러스의 확산 방지 대책으로 학교를 폐쇄했다가 개방하고 이제는 다시 폐쇄하고 있다. 우왕좌왕 하는 당국이 이 상황을 잘 통제하고 있는 지 모두가 불안을 느끼고 있다.우리는 어떤가? 살균제 스프레이로 무장하고 감염 위험을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런 행동들이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상황을 잘 통제하고 있는가? 단지 통제할 수 있다고 보는 환상일 뿐이다.4. 소외되는 고통우리 교회의 성도 한 분은 며칠 전 이탈리아 북부를 방문했다. 나폴리로 돌아온 그녀는 직장 동료들과의 저녁식사 모임에서 제외되었다. 최근 북부 지방을 다녀왔기 때문에 이 모임에 오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위험지역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고, 코로나 바이러스 증상도 나타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분명히 이러한 거리두기는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나폴리 중심에 있는 한 레스토랑 주인은 최근 검진을 받았다. 그는 ‘코로나19’ 확진을 받았는데, 비교적 건강한 상태지만, 이웃사람들의 꺼리는 반응 때문에 슬퍼졌다고 말한다. 한 신문은 그와의 인터뷰 기사를 게재하면서 이렇게 전했다.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보다 더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은 그가 살고 있는 도시 사람들이 그와 그의 가족을 대하는 방식이다”(Il Mattino, March 2, 2020).제외됨과 소외됨은 감당하기 어렵다. 인간은 관계적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현재 소외를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예수님 시대의 나병환자들은 이 경험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강제로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격리되어 살아야 했으며, 그들이 살던 마을을 지나가려면,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외쳐야 했다(레 13:45 참조).5. 두려움과 믿음의 다른 점현 위기 상황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어떤가? 이런 상황에서는 두려움에 휩싸이기가 매우 쉽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감염될 수 있는 장소가 주변에 널려 있다. 컴퓨터의 키보드, 들이 마시는 공기, 접촉하는 모든 사람과 사물들, 그리고 구석구석, 모든 것이 우리를 감염시키려고 기다리고 있다. 공포를 느끼는가?이 위기는 우리가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듯하다. 두려움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이다. 믿음은 먼 하늘에 떠 있는 별이나 어떤 무명의 신을 믿는 것이 아니다.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가 또한 부활이며 생명이심을 믿는 것이다.예수님만 이 상황을 다스리시고, 이 폭풍 속에서 우리를 잘 인도하실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을 가지라고 당부하신다.6. 하나님께 의지하고 기도할 필요성세계적인 위기 가운데, 개인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잘 대처할 수 있을까? 이 때 스스로 무용지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기도할 수 있다.나라와 도시를 관리하고 있는 당국을 위해 기도하자. 환자를 치료하는 의료진들을 위해 기도하자. 확진 받은 사람들을 위해, 집 밖으로 나가기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위험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다른 기저질환이 있고 연로한 고위험자들을 위해 기도하자. 주님이 우리를 보호해 주시기를 기도하자.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자.또한 예수님이 다시 오기를 기도하자. 그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새 창조로, 다시는 사망과 애통과 눈물과 아픔이 없을 곳(계 21:4)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하자. 7. 헛되고 헛된 삶“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현실의 삶에 몰두해 있다 보면, 균형적 관점을 잃기 쉽다. 우리의 하루하루는 사람과의 만남과 각종 계획들, 일과 소망 사항들, 가정생활과 휴가 등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중요한 것과 긴급한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일상 가운데서 길을 잃을 때가 많다.아마도 이번의 위기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해보게 하는 듯하다. 무엇이 정말로 중요하고 어떤 것이 헛된 것인지를 가르쳐주는 듯하다.이 위기는 삶에서 정말로 고민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또한 중요한 것과 무의미한 것을 분별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프리미어 리그나 새로운 주방시설이나 인스타그램은 내 생존에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코로나19’는 분명 우리에게 무엇이 중요한 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8. 우리의 소망어떤 면에서, “‘코로나19’를 맞이한 현 상황 속에서 어떤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이 그리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도 있다. 예수님은 이미 더 치명적이고 확산이 빠른 바이러스의 존재에 대해 경고하러 오셨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누구도 피할 수 없도록 모든 사람들을 공격한 바이러스 말이다. 이 바이러스는 그냥 사망이 아니라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한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인류는 죄라고 불리는 세계적인 유행병에 사로잡혀 살고 있다. 이 바이러스에 당면한 우리의 소망은 무엇인가?성경말씀은 ‘죄’라 불리는 바이러스로 감염된 세상에 들어오신 하나님의 이야기이다. 그분은 병자들과 함께 살면서, 방역복을 입지도 않고, 우리와 같이 똑같은 공기를 마시며, 똑 같은 음식을 드셨다. 그분은 사람들로부터-아버지 하나님에게서도-제외되고 소외된 상태로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하셨다. 병든 세상에 이 바이러스 해독제를 주시고자, 우리를 치유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셨다. 그분의 말씀을 들어보자.“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8 Things the Coronavirus Should Teach Us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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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바나바의 갈등에서 지금 배울 것들
by Robert Gonzales Jr.
2020-03-20
기독교인들도 종종 서로 간에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곤 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지금 복음주의 진영 속 수많은 교단들의 난립만 봐도, 또 교단적 또는 신학적 노선 사이에서 벌어지는 날카로운 논쟁들만 보아도 이 사실은 잘 알 수 있다. 성경적으로 “사회적 정의(justice)”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를 놓고 벌어지고 있는 지금의 논쟁은 불일치에 대한 하나의 좋은 예이다. 이런 종류의 분열은 사실 우리를 낙망하게 하고 고통을 주며 종종 믿음을 흔들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안에서의 불일치가 결코 새로운 것은 아니다. “같은 마음”(빌 2:2)을 품으라고 강하게 권고했던 사도 바울 본인조차도 항상 다른 이들과 같은 마음을 품었던 건 아니다. 사도행전 15장 36-41절은 바울과 그의 가까운 동료 바나바 사이에서 있었던 날카로운 불일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을 다음 선교 여행에 꼭 데리고 가고 싶어했다. 그러나 마가가 예전에 자신들을 저버렸다는 이유로(행 13:13) 바울이 반대했다. 이 두 사람 사이의 대립이 특히 더 가슴 아픈 것은 그로 인한 결과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슬픈 현실까지 성경이 굳이 드러내는 이유는 우리를 절망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훈을 주기 위해서이다. 일단 이 사건을 간단하게 살펴보고 그 다음에 교훈을 찾아보자.누가 옳은가?먼저 두 사람이 서로 갖고 있는 생각을 살펴보자. 바울의 논리는 이것이다. 마가가 전에 떠났다는 것. 그런 식의 이탈은 사실상 심각한 일이다(눅 9:62; 잠 25:19). 이 세상 그 어떤 대장이 전투 초기에 진영을 이탈한 군인을 데리고 전투를 벌이고 싶겠는가? 겉으로 보기에 바울은 성경적인 원칙을 따르는 것 같다. 그러나 판단을 내리기 전에 우리는 바나바의 이야기도 들어봐야 한다(잠 18:17). 이 구절에서 바나바의 논리는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기존에 알고 있던 그의 성격에 근거해서(행 4:36; 9:26-27) 유추하는 길 밖에 없다. 나는 바나바가 마가의 과거 행동을 감싸고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바나바 또한 복음을 전하는 자는 신실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또 다른 성경적 원칙을 바울에게 제시하지 않았을까 싶다. 과거의 죄와 실수가 꼭 미래의 신실함과 성공을 방해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사도 베드로를 생각해보자. 그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여전히 사용했다. 나는 바나바가 바울에게 이렇게 말했을 거 같다. “아니, 그럼 베드로는? 왜 베드로는 되는데 마가는 안 된다는 거야?”누구 편을 들기 전에 한 가지 기억할 점이 있다. 불일치가 항상 이단 또는 부도덕과 같이 심각한 문제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두 사람은 지금 예수님의 신성과 같은 근본적인 믿음의 문제를 놓고 다투는 게 아니다. 또는 사역자가 간통을 해도 되는가 여부를 놓고 싸우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지금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 헌신한 경건한 두 사람이 성경적 원칙의 적용 문제를 놓고 다투는 장면을 목격하고 있다. 이 두 사람 사이의 긴장은 이들이 각각 다른 성경적 원칙을 강조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만약에 이들이 조금만 더 균형을 가지고 자신들이 주장하는 원칙을 바라보았다면 이 다툼은 그리 오래지 않아 끝났을 것이다. 나는 사도행전을 쓴 누가가 그 어느 쪽의 편도 들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누가가 바울이 실라를 선택하고 다른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한다고 썼다고 해서(행 15:40), 반드시 당시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바울의 편을 들었다고도 말할 수 없다. 이건 단지 바울과 바나바와 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안디옥 교회가 바울과 관계를 끊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그리고 행여 그들이 바울의 편을 들었다고 해도, 그게 그들이 옳았다는 의미도 아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우리가 누가 더 옳았고, 누가 더 틀렸는지에 관심을 갖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배울 점은 무엇인가?자, 이 이야기를 통해서 오늘날 많은 불일치를 경험하는 우리가 배울 점은 무엇인가? 네 가지가 있다.1. 편들고 싶은 마음을 버리라종종 우리는 한쪽을 선택하고, 또 나름의 강한 의견을 고수해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꼭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누구나 다 나름의 고민과 의심스런 구석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 문제를 주님의 손에 맡기는 게 가장 지혜로운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종종 보면 왜 두 명의 훌륭한 기독교 지도자가 각기 다른 영역에서 사역하는지 이해가 안 될 때가 있다. 그 두 사람은 같은 도시에 있고 또 같은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왜 같이 사역하지 않고 따로 하는 걸까? 형제자매들이여, 하나님은 우리가 언제나 어느 한쪽 편을 들기 원하는 분이 아니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싶은 유혹과 싸우라. 그리도 양쪽을 다 주님께 일임하라(빌 3:15). 2. 지금 시대에는 언제나 불일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종종 우리는 교회를 너무도 이상적으로 바라본다. 교회나 목회자가 실망을 주었을 때, 복음의 능력에 대해서 회의를 갖고 더 나아가서 아예 신앙을 포기하는 경우까지 보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적인 현실주의자가 되라고 하신다. 어차피 인간은 유한하고 또 우리 안에 죄가 여전하기에, 성경 속 두 명의 거룩한 사도들까지 서로 싸우게 만들 정도라면, 아무리 경건한 사람들이라도 서로 강하게 대립할 수도 있고 때로는 갈라설 수도 있는 법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가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전체가 다 드러나지는 않은 시대에 살고 있다(고전 13:9-10). 그건 마치 그림 퍼즐의 전체 모양이 뭔지 알 수 있는 것 같지만 중간 중간 몇 조각이 빠져있는 것과 비슷하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진실한 기독교인들조차 성경적 원칙을 적용하려고 할 때, 모두가 다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청교도인 매튜 헨리(Puritan Matthew Henry)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모든 빛과 사랑이 완벽한 천국에 가기 전까지는 결코 이 땅에서는 다 같은 마음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3. 모든 불일치를 선으로 만드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안식을 누리라사탄은 아마도 바울과 바나바의 갈등으로 뭔가 이득을 얻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탄이 도모하는 악을 하나님은 선으로 바꾼다(창 5:20; 롬 8:28). 이 점을 생각해보라. 이 둘의 갈등 덕분에 선교 사역에 투입된 인원은 두 배가 되었다. 더 많은 사역이 가능해졌다. 새로운 교회들이 더 많이 세워졌다. 바울이 애초에 바나바에게 했던 제안은 그들이 이미 세운 교회를 다시 방문하는 것이었지만(행 15:36), 하나님의 계획은 다른 데 있었다. 하나님은 선교가 마케도니아와 그리스까지 뻗기를 원했다. 또 하나님께서 이 갈등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유익을 끼쳤는지도 한번 생각해보라. 마가를 회복시키려는 바나바의 노력은 아마도 마가에게 희망을 주었을 것이다. 게다가 바울의 완고함은 마가로 하여금 다시는 실수를 해서는 안 되겠다는 다짐을 하도록 했을 것이다. 또 바울의 태도 덕분에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있으면서 좀 더 주의 깊게 그를 관찰하고 더 엄격했을 것이다. 또한 은혜를 강조하는 바나바를 통해 바울은 보다 더 예민하게 인내심을 가진 사람으로 그의 후반기 선교사역을 진행했을 것이다. 참으로 우리는 바울이 그의 말년에 이르러서 오네시모라는 이름의 노예에게 어떻게 했는지 알고 있다. 바울의 태도가 바나바가 마가에게 보였던 바로 그 모습이 아닌가!(몬 1장)자, 경건한 사람들 사이에 있는 불일치과 분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위한 선, 우리를 위한 선, 그리고 당신의 이름의 영광을 만들어 가시는지 살펴보자.4. 다름이 사랑을 파괴할 필요는 없다는 점을 기억하라날카로운 불일치와 심지어 분열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이 두 사람이 서로를 신실한 형제로 보았고 또 서로의 사역을 지원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바울은 계속해서 바나바를 그리스도의 사도 그리고 왕국을 위한 신실한 동역자(고전 9:5-6)라고 부르고 있다. 다른 형제들에게 “여러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한(엡 6:18) 바울은 자신부터 그렇게 했을 것이다. 바울은 계속해서 바나바와 마가를 위해서 기도했다. 그리고 바나바와 마가 역시 바울을 위해서 기도했을 것이다.이 모든 게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당신을 반대하는 사람을 기도 목록에서 지우지 말라. 그 사람이 틀리다고 생각한다면, 그를 바른 길로 인도해달라고 기도하라. 그리고 당신과 그 사람이 같은 믿음을 길을 걷고 있다면, 하나님께 그를 축복해달라고 간구하라. 서로간의 불일치가 너무도 깊어서 도저히 화해가 불가능한 상황으로까지 사태를 끌고 가지 말라. 바울은 나중에 마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돌이켰고, 심지어 마가에게 찾아가 도와달라고 말할 정도로 겸손한 사람이 되었다(딤전 4:11). 한 때 자신의 신실함을 믿지 않았던 바울이 곁에 와서 도와달라는 말을 했을 때, 마가가 느꼈을 기쁨을 한번 상상해보라. 형제자매들이여, 우리도 바울처럼 내가 지금 갖고 있는 판단을 바꿀 수도 있다는 의지를 갖도록 하자. 분명한 교리와 성경적 윤리에 대한 확신은 결코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성경적 원칙을 적용하는 문제라면, 최소한 나의 기존 생각을 바꿀 수도 있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서로 간에 형제의 사랑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 사랑이 오래 참는 사랑, 온유한 사랑, 무례히 행하지 않는 사랑, 모든 것을 참는 사랑, 모든 것을 믿는 사랑, 그리고 모든 것을 바라는 사랑이라면, 나를 바꾸겠다는 생각은 그렇게까지 힘든 게 아닐 것이다(고전 13:4-7).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넓은 마음과 깊은 헤아림을 가진 사랑을 허락하시길 바란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en Godly People Disagree: Lessons from Acts 15번역: 무제
바울
바나바
마가
실라
사도행전
불일치
분열
대립
원칙
교회생활
복음을 풍성하게 전달하라 : ‘추방과 귀향’
by 고상섭
2020-03-19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하나의 방식으로 전달하지 않았다. ‘하나님 나라’의 개념으로 또 ‘생명’, ‘칭의’, ‘양자됨’, ‘속량’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복음을 전했다. 모두 동일하지 않고 작은 차이를 보이는데 사이먼 게더콜은 “공관복음이 미래 지향적이기 때문에 ‘영생’ 보다는 ‘나라’라는 개념을 더 자주 사용했다.”라고 말한다. 설교자나 교사들이 복음을 풍성하게 전달하려면, 빛이 프리즘을 통해 다양하게 비치듯이, 다양한 주제를 통해 복음을 다채롭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D.A.카슨은 신구약 성경을 관통하고 있는 주제를 중심으로 읽는 것이 좋다고 하면서 복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20가지 정도의 주제로 설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팀 켈러는 ‘센터처치’에서 그중에서 중요한 세 가지 주제를 언급하며 설명하였다. 추방과 귀향 (The Exile and our homecoming)성경은 집에서 추방되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이것을 단순히 하나의 스토리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다섯 가지 패턴을 중심으로 설명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1) 창조의 목적 2) 죄의 결과 3) 이스라엘의 모습 4) 예수님의 해결책 5) 회복의 모습이다. ‘창조의 목적’은 샬롬과 평강의 장소이다. ‘죄의 결과’는 평강이 파괴되고, 자기중심적이 되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애굽과 바벨론으로 추방되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간의 추방을 대신 경험하셨으며, 그리스도의 속죄로 우리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회복의 모습’은 새 하늘과 새 땅인 하나님의 나라이다. 팀 켈러는 ‘설교’에서 자신의 설교 개요를 위의 다섯 가지 주제와 비슷하게 설명한다. 위에서 언급한 다섯 가지 성경의 패턴에서 초기대지와 도입이 설교의 집중을 위해 바뀌었다. 마지막 하나님 나라의 회복은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우리가 해야 할 적용이 되었다. 이것 외에는 비슷한 패턴으로 구성되어 있다. 팀 켈러는 성경을 관통하는 주제를 설교의 틀로 삼은 것이다. 1. 도입 : 문제가 무엇인가? 우리 시대의 문화적 상황사람들이 만족함 없이 계속해서 무언가를 추구하며 쫓아가는 이유는 평화와 안식이 없기 때문이다. 에덴동산에서도 죄가 들어온 후 아담과 하와는 부끄러워하여 자신을 숨겼고, 또 하나님이 두려워 숨어버렸다. 인간 안에 있는 수치심과 두려움은 인간을 안식하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은 자기 자신의 속박으로 이어지고 다른 사람과의 갈등으로 표출된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죄로 인해 생긴 결과이다. 우리는 죽음과 질병, 노화, 부패와 같은 것을 보면서 이 세상은 영원한 집이 아님을 알게 된다. 온 인류가 하나님을 등지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그 집으로부터 추방된 존재이다. 2. 초기대지 : 성경은 무엇이라 말하는가? 성경에 따르면 최초의 집은 에덴동산이었고 영적, 육체적, 사회적으로 충만한 장소였다. 가장 친밀한 사랑의 관계들로 구성된 곳이었고, 그 사랑 안에서 양육되는 곳이었다. 쉼과 평강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삼위일체의 연합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그 사랑의 연합 안에 인간을 초대하셨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름답게 나타내셨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과 자기 자신과의 회복, 또한 다른 사람들과 하나가 되는 사랑의 공동체가 바로 성경이 말하는 집이다. 그 집을 위해서는 하나님과 완전한 회복,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완전한 순종, 그리고 죄를 해결하는 것이 필요하다. 3. 중간대지 : 우리를 막아서는 것은 무엇인가?인간의 노력으로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리고 이 세상이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할 수도 없다. 부패한 삶의 본성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노력은 늘 한계를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결심해도 자기 자신의 속박으로부터도 자유 할 수 없다. 이웃과 하나 됨도 마찬가지다. 누가복음 15장의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사용하고 후회하면서 집으로 돌아간다. 그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아들의 신분으로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이유는 돌아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긍휼하심, 즉 하나님의 용서에 근거하는 것이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4. 말미대지 : 예수님은 어떻게 성경의 주제를 완성하고 이 핵심문제를 해결하시는가?“인간이 스스로 돌아갈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어떻게 하면 죄로 물든 이 피조세계가 다시 회복될 수 있을까? 우리를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려고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집을 버리고 사람이 되셨다. 또한 예수님은 머리 둘 곳 없이 집을 떠나 떠돌이 생활을 하셨다(마 8:20). 마지막엔 도시 바깥에 있는 예루살렘의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이 십자가의 죽음은 그분이 추방을 당하고 거절을 당하신 표지이다.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히 13:11-12)예수님은 우리가 받아 마땅한 추방(소외된 상태)을 우리 대신 경험하셨다. 결국 그리스도의 추방으로 인해 우리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셨다. 그리고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눅 9:31)을 말씀하셨다. ‘별세’라는 단어는 출애굽을 의미하는 Exodus로 표시되어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가장 궁극적인 출애굽이며, 죄로부터 우리를 건지시고 또한 추방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기쁜 소식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5. 적용 :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우리가 돌아갈 영원한 집인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미 맛보게 하셨다. 그분은 마지막 날에 완전한 회복을 주실 것이며,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이다. 그래서 영원한 집이 있음을 확신하는 사람들은 이 땅의 없어질 것들에 집착하지 않는다. 잘못된 사랑으로 우상을 만들지 않고, 영원한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나그네임을 알고 살게 된다. 복음은 ‘미래를 앞서 경험하는’(Forward-Back) 속성을 통해 우리의 삶은 가시덤불과 엉겅퀴 가운데 있지만 낙심하지 않고 선을 행할 수 있도록 해준다. 왜냐하면 확실한 장래의 은혜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 6:9)팀 켈러의 설교 방식은 신구약 전체의 복음을 관통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구성이 좀 특별한 이유는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 우리가 행해야 한다’라는 인간 중심의 적용이 아니다. 우리는 할 수 없다는 철저한 무기력과 회개를 경험하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할 수 있다는 은혜의 반응으로서의 적용이다. 성경 전체에 흐르는 ‘추방과 귀향’의 메시지를 공부해보라. 복음을 더욱 풍성하게 전달하는 도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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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계속해서 클릭하고 있을까?
by Adam Pohlman
2020-03-19
마침내 아이들을 침대에 눕혔다. 평상시와 다름없이 지친 일과를 보낸 나는 뭔가 재미있는 게 없을까 하는 마음으로 SNS를 열고 살펴보기 시작했다.이곳저곳 클릭을 하면 할수록 나의 영혼은 점점 더 불만족의 구덩이로 빠졌다. 그게 무엇이든지, 뭔가 내 시선을 끌 대상을 찾았다. 그러나 어떤 것도 만족을 주지 못했다. 이미 가지고 있는 물건을 사라는 광고가 수도 없이 화면에 떴다. 정치 토론을 보니 화가 치밀었다. 화려한 꽃을 배경으로 한 최신 뉴스는 내 지친 영혼에 그 어떤 힘도 주지 못했다.내게 필요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계속 찾았다. 거기에 중독되어 있었다. 왜?이곳저곳을 클릭하고 찾아봐도 별다른 게 없다는 것을 알면서 우리는 왜 마우스 클릭하는 것을 멈추지 못할까? “이 정도면 충분해!”라고 내 마음이 외치는데도, 왜 내 손가락은 계속 움직이는 걸까?오래된 문제종종 삶이 지겹게 느껴진다. 일찍 일어나 온종일 일을 하지만 꾸중을 듣기도 한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자고 일어나면 또 다시 같은 일상이 반복된다. 매일매일, 언제나 똑같다. 우리는 이런 단순한 일상을 깨고 싶다. 그래서 소파에 몸을 묻고 넷플릭스 최신 드라마를 보거나, 의자에 앉아 그날 신문을 뒤적인다. SNS를 열고 다른 사람들의 인생은 어떤지 들여다본다. 뭔가 새로운 것을 향한 열망은 쉽게 소모적인 행동으로 바뀐다.스트리밍 영화와 비디오 게임, SNS가 주는 악영향에 맞서 싸워야 한다. 새롭고 흥미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오래된 습성이다. 바울은 사도행전 17장, 아테네에서 전도할 때 바로 이 문제에 직면했다.동역자를 기다리는 동안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바울은 도시가 우상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에 자극을 받았다(행 17:16). 거짓된 신을 예배하는 것으로 가득 채운 것은 어리석은 남자들과 여자들이 아니었다. 나름 위대한 철학으로 무장된 사람들에 의한 우상숭배였다. 위대한 철학자들은 아테네의 언덕(Areopagus)에 모여서 세계관을 토론했고, 또 사회를 위해 가장 좋은 종교가 무엇인지를 탐구했다. SNS의 고대 형태라고도 할 수 있는 이곳에서는 세상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나누는 모든 형태의 의견이 다 환영받았다.그들은 자신의 지식 창고를 채우고, 대화를 더 풍성하게 만들어줄 최신 트렌드와 뉴스를 갈망했다. 온종일 더 큰 흥미를 가져다줄 새로운 정보를 찾아서 보내곤 했다.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행 17:21). 아테네 사람들은 항상 뭔가를 찾았고 결코 만족할 줄을 몰랐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을 기꺼이 그들의 식탁에 초대했다. 그에게서 뭔가 재미있는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다.우리 귀를 간지럽히는 호기심아테네에서 바울이 설교한 주민들은 그가 나중에 디모데에게 말한 사람들과 비슷하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딤후 4:3). 우리는 이런 경고를 번영 복음을 가르치는 설교자 또는 컬트 종교 정도에만 국한한다. 하지만 바울이 그의 제자에게 경고하기 위해 선택한 단어는 그리스어 knēthō로서, 종종 가려움으로 번역된다. 이것은 새로운 것을 탐색하고 싶은 호기심을 묘사하는 것으로 어떤 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새롭고 신선한 정보 조각”을 향한 충동을 의미한다. NET 성경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해서 이 단어의 뉘앙스를 드러냈다. “그들은 욕망을 따르며, 또한 자신들을 위한 선생을 모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코 충족되지 않는 새로운 것을 듣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만족하지 않는 마음을 드러낸다. 언제나 좋은 소식을 찾지만, 결코 찾을 수 없다. “스올과 아바돈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잠 27:20).새로운 소식을 위한 이 끝없는 여정은 미묘한 방식으로 우리 삶에서 드러난다. 현재 세상의 흐름에 대해서 최신 정보를 제공하는 지속적인 뉴스 피드, 운전하는 중에도 우리를 유혹하는 메시지 알림, 한 번 더 클릭하라는 웹 사이트 화면의 유혹, 친구와 함께 나누는 잡담, 최신 기계를 갖고 싶은 욕구, 최신 TV 드라마 또는 스포츠 이벤트에 관한 대화에서 뒤 쳐지고 싶지 않은 욕망.이런 욕망이 과거에 우리를 만족시킨 적이 없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같은 시도를 반복하고 있다. 우리는 얼마나 새로운 무언가를 찾고 있는가? 이렇게 쉬지 않는 호기심으로부터 누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끝없는 육체의 추구를 위해서 우리는 이 죄로 가득한 세상 밖에서부터 오는 뭔가가 필요하다. 다른 세상을 위해서 만들어진‘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에서 C.S. 루이스(C.S. Lewis)는 이렇게 썼다. “이 세상 그 무엇도 만족시킬 수 없는 욕망이 우리 속에 있음을 누구나 알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가장 가능성이 높은 설명은 우리는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136-37). 우리의 욕망은 마치 부츠를 신고 운전할 때 느끼는 발바닥 가려움과 같다. 부츠를 신은 발바닥의 가려움은 그 어떤 것으로도 긁을 수 없다. 우리의 귀를 진정으로 만족하게 하는 것은 오로지 복음뿐이다. 새로운 소식이 만족하게 할 수는 없다. 오래된 이야기, 모든 세대에게 이미 들려진 최고의 소식밖에는 없다. 예수님만이 사탄의 속삭임과 공격하는 유혹을 피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사탄의 유혹을 이길 수 있었다. 승리의 부활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른 소식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헛된 노력에서 해방을 약속했다. 생명을 향한 유일한 길, 충만한 기쁨, 끊임없는 즐거움은 그를 따르는 것이다(시 16:11).육체의 욕망이 끄는 막다른 삶의 길에서 우리를 완벽하게 구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우리에게 성령과 그의 말씀을 주심으로 새로운 것을 향한 호기심을 해소하는 가장 분명한 소식, 그것을 언제나 상기할 수 있도록 하셨다. 수다 떨고 싶은 생각이 들 때, 운전하다가 막 도착한 메시지를 보고 싶을 때, 세상 현안이 궁금할 때,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만이 당신 속에 풍성하게 거하도록 하라.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 107:9).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Scrolling for Significance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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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암의 인생과 노래
by 배경락
2020-03-18
안녕하세요? 저는 모세의 누나 ‘미리암’입니다. 저를 좋아하는 분도 계시지만, 싫어하는 분들도 제법 있답니다. 여러분은 저를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장면 1. 모세와 미리암저는 어려서부터 매우 당돌했습니다. 우리 히브리 민족이 애굽에서 강제 노역하는 상황이 너무 부당해 보였습니다. 여러분은 온종일 사막에서 노동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우리 형제 중에 일사병으로 쓰러지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일을 시키는 애굽 사람들은 그늘에서 부채질하며 노닥거리는데, 우리는 소금물을 먹어가면서 일을 해야 했지요. 저는 어머니 요게벳에게 이런 상황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늘 한결같았어요.“어머니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데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나요?” “얘야! 그런 소리를 함부로 해선 안 된다.” “애굽 사람들은 늘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내리는데 우리는 아무도 말을 못 하고 있잖아요.”실제로 히브리 민족의 수가 많아진다고 애굽 왕 바로는 명령을 내렸어요. 남자아이를 낳으면 다 죽여버리라고 말이죠. 그때 어머니가 임신했어요. 남동생 아론이 있긴 했지만, 어머니는 자식 욕심이 있었어요. 아들을 낳으면 어떡하나 걱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대했습니다. 우리 가족은 식사 때마다 기도했어요. “하나님, 아들을 낳게 되더라도 좋은 산파를 만나 목숨만은 건지게 해 주세요.”열 달이 지난 후 출산할 때가 되었는데 평소 가깝게 지내던 산파 십브라와 부아가 찾아왔습니다.십브라와 부아는 매우 용감한 여인들이었어요. 그녀들은 바로 왕보다 하나님을 더욱 무서워했습니다. 어린 생명을 죽이는 일에는 절대로 동조할 수 없다고 하였어요. 십브라와 부아 같은 여인들이 우리 히브리 민족을 살리는 사람들입니다. 아들을 낳았는데 얼마나 목청이 큰지 엄마는 늘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걱정하셨지요. 저는 그런 엄마에게 말했어요. “엄마. 우리 아이는 하나님이 지켜주실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엄마는 하나뿐인 딸인 나에게 은근히 의지하는 것 같았어요. 무슨 일이든 나에게 상의를 했지요. 석 달이 지나자 더는 아이를 숨겨서 키울 수 없었어요. 엄마는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지요. “엄마, 이제 이 아이는 우리 손을 떠날 때가 된 것 같아요. 이 아이를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할까 봐요. 역청과 나무 진을 사용해서 물이 안 들어오는 갈대 상자를 만들고 거기에 아이를 넣어 나일 강에 띄워 보내면 어떨까요? 분명 하나님께서 우리 아이를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실 거예요.”어머니는 그 생각이 옳다고 하시면서 그렇게 하셨어요. 이런 엄청난 생각을 한 저는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나일 강에 띄운 갈대 상자가 어떻게 되는가 따라갔어요.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해 따라가리라 마음을 먹었지요. 다행히 갈대 상자를 사람들이 보았어요.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왔다가 갈대 상자를 보고 건져오라고 명령했지요. 저는 숨어서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런 긴박한 상황에는 어떻게 대처하는 게 좋을지 몰라서 지혜를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세요. 제 입에 할 말을 담아 주세요.”저는 결례를 무릅쓰고 공주 앞으로 나아갔어요. 자칫하면 가난한 히브리인, 노예 소녀라고 멸시받고 쫓겨날지도 몰랐기에 최대한 겸손하게 그러나 당당하게 나아갔어요. 저의 당당함에 공주는 당황하면서도 제 말을 들어주었지요. “제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찾아서 이 아이에게 젖을 먹이게 하면 어떨까요?저는 공주가 아이를 키우고자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필요로 하는 것이 있어요. 그 필요를 자극하고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면 ‘Yes’라고 답을 하기 마련이지요. 공주는 제 말을 옳게 여기고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그렇게 생명을 구하고 어머니의 품에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출애굽의 영웅 모세의 출발은 이렇게 수많은 여자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어머니 요게벳, 히브리 산파, 애굽의 공주, 그리고 저도 미약하나마 힘을 보탰지요. 예수님의 족보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출발에도 여러 명의 여자가 있었습니다. 장면 2. 미리암의 노래 세월은 흘러 80년이 지나갔습니다. 그동안 있었던 일을 모두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네요. 동생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히브리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어요. 하나님은 모세를 사용하여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셨습니다. 바로 왕을 굴복시키고 수많은 사람과 함께 애굽에서 나오는 장면을 여러분이 보셨더라면,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도 90년 넘게 살아왔지만, 이보다 더 큰 감격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더 감격스러운 장면을 목격했어요. 바로 홍해가 갈라지고 우리는 무사히 건너왔지만, 애굽 군대는 홍해에서 수장되었습니다. 그때 무뚝뚝한 모세조차도 노래를 불렀습니다. 목소리나 음정이나 박자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구원하심이 얼마나 감격스러웠던지. 모세는 홀로 소리를 높여 찬양했습니다.“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출15:1).1)모세의 노래는 길게 이어졌습니다. 사람들은 모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어요. 그 노래는 너무 길어 따라 부르기가 힘들었습니다. 높은 곳에 서서 소리 높여 노래하는 모세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은 존경과 감동과 기쁨이 넘쳐났습니다. 저는 그 순간 생각했어요.2) 영광은 온전히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한다. 그리고 노래는 모든 백성이 함께 따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쉽고 간단해야 한다. 저는 모세의 노래가 끝나자마자 소고를 치고 춤을 추면서 함께 노래하자고 했습니다. 90이 넘었는데 제가 노래를 하면 얼마나 잘하겠습니까? 그래도 정성을 다하여 노래하자 백성이 일제히 따라 부르기 시작했지요.“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출15:21). 독창도 훌륭하지만, 합창은 더욱 훌륭합니다. 백성은 결코 이 노래를 잊지 못할 거에요. 유월절 행사 때마다 우리 민족은 이 노래를 부를 거예요. 이날의 영웅은 모세도 아니고, 이스라엘도 아닙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________________1) 중동의 문화와 역사를 깊이 연구한 예루살렘의 히브리대학 교수인 S. D. Goitein은 모세의 노래가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로 시작하는 것과 달리 미리암의 노래가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는 명령형으로 쓰인 것에 주목하였다(S. D. Goitein, “ Women as Creators of Biblical Genres”, Prooftexts 8( 1988, 1-33 ), 7p). 국제성서 주석 출애굽기를 쓴 Martin Noth도 모세의 노래는 일인칭으로 되어 있는 독창이지만, 미리암의 노래는 회중을 향하여 찬송하라고 요구하고 함께 부른 회중 찬송임을 지적하였다(Noth Martin,’출애굽기’, 서울 : 한국신학연구소, 1981, p147). 미국의 두 구약학자 F.M.Cross와 D.N.Freedman은 “The Song of Miriam”이란 공동 논문에서 미리암의 승전가가 모세의 노래를 반복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리암의 노래가 먼저이며 모세는 그것을 확장한 것이라고 하였다(이영미, “추락하는 것에도 날개는 있다: 여성 지도자 미리암을 회상하며”, 신학연구 56집 (2010, 43-69) p47).2) 미리암은 이스라엘 최초의 여자 선지자로서(출15:20)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지도적 역할을 했다. 탈굼은 출애굽 당시 세 명의 지도자가 있었는데, 모세는 전승과 율법 교사로, 아론은 사람들에게 화해를 가져오는 자로, 미리암은 여성들을 교육하는 자로 제시한다(김민정, ‘민중적 여성 지도자 미리암의 재부상’, 신학사상 183집 (2018년 겨울호, 353-388), p353). (장면 3,4는 다음호에)장면 3. 모세에 대항하는 미리암장면 4. 미리암의 죽음과 그 후
신학
구약
미리암
모세
요게벳
십브라
히브리산파
창조 문제, 어떤 자세로 논쟁해야 하는가
by Samuel Emadi
2020-03-18
상대방이 지구의 연대라든가 창세기 1장 사건이 얼마나 긴지를 따져 보기 시작하면, 금세 눈썹을 치켜 올리고 의혹의 시선을 그에게 보낸다.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그의 견해가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혹 그러한 견해 차이가 신학적인 노선 차이로 여겨질 때면 더욱 그렇다. 흔히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의 여러 가지 이슈에 대해서는 견해가 달라도 관대한 태도를 보이지만, 유독 창조 문제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과 곧잘 싸울 태세를 갖춘다.지나온 상황을 한번 돌아보면, 젊은 지구를 주장하는 입장이든 오랜 지구를 주장하는 입장이든 서로의 도전에 직면할 때 느끼는 불편이나 의혹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가령 20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신학계에서 창조론 대 진화론의 논쟁은 근본주의자(fundamentalist)와 현대주의자(modernist)를 가르는 경계선과 같은 역할을 했다. 그러한 지난 역사가 한몫을 해서인지, 지구의 나이라든가 창세기 1장 사건의 실제 기간 따위를 따지는 문제는 소위 대속의 범위라든가 은사지속론 대 은사중지론에 관한 논쟁보다도 더 큰 부담으로 다가오는 게 사실이다.그 결과,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창조 문제가 언급되면 다소 민감한 반응을 보이게 되었다. 지나친 일반화일지 모르겠지만, 젊은 지구 창조론자는 오랜 지구 창조론자가 경박스럽게도 다윈의 진화론에 이끌려 결국에는 자유주의 신학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길로 빠지게 되었다고 보는 반면, 오랜 지구 창조론자는 젊은 지구 창조론자의 논의가 창세기 1장의 문학적 장르에 대한 고려도 없이 진화론에 대한 우려만 느낀 나머지 지성적으로 천박한 근본주의 신학의 족쇄를 차는 길로 가게 되었다고 비판한다.신학적인 논쟁에서 우선순위를 정하라결국 창조 교리를 대할 때 우리가 겪게 되는 문제는 우선적으로 취급해야 할 신학적인 주제를 올바로 구별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특정 주제가 기독교 세계관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또 복음의 메시지와는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에 따라 그 중요성에 차등을 둘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기독교 신앙에서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가르침은 1차적인 주제로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한 가르침 없이는 복음을 포기해야 하거나 아예 상실하게 될 수도 있는 주제가 그에 해당한다. 2차적인 주제는 교단이나 교회를 분리시킬 정도의 중요성과 영향력을 띠고 있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주제는 신자와 비신자를 가를 만큼 사활이 걸린 문제라고 할 수는 없지만, 가령 침례교인과 장로교인 또는 칼빈주의자와 알미니안주의자 아니면 언약주의자와 세대주의자 등을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 이와 달리 3차적인 주제는 복음이나 기독교 세계관에 훨씬 덜 영향을 미치는 가르침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주제에 대해서는 한 교회 안에서도 서로의 의견이 다를 수 있다. 이렇게 3단계로 구분하는 차등적인 접근이 모든 교리에 우선순위를 매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겠지만, 이러한 접근을 통해 우리가 지닌 신학적인 확신이 본질적인 문제로부터 덜 본질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 중요성을 달리한다는 이해를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런 차원에서 1차적인 주제가 신학 자체의 신뢰성을 판가름하는 문제에 해당한다면, 2차 혹은 3차적인 주제는 형제자매들 간에도 의견의 불일치가 일어날 수 있는 문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와 같은 불일치를 감수할 때 실제로 어떤 결과가 발생하는지는 각각의 상황에 따라 다를 것이다.이처럼 신학적인 주제에 차등을 두는 일은 일부 교리를 가볍게 여기기 위한 작업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교리가 중요하지만 그중에서도 어떤 교리는 다른 교리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한 작업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삼위일체 교리를 포기하면 복음 자체를 잃어버리게 되지만, 천년왕국설에서 당신이 선호하는 견해를 포기한다고 해서 당신이 믿고 있는 신학 체계 전반에 손상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저 특정 본문에 대한 해석을 양보하면 될 뿐이다. 분명히 밝히지만, 나는 여기서 지구의 나이라든가 창세기 1장 사건의 기간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또 그러한 주제에 대해 어떠한 확신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하는 것도 아니다(사실대로 말하면, 나는 문자적으로 6일 창조를 믿는 젊은 지구 창조론을 지지한다). 지금 강조하려는 바는, 창조 교리에 있어 1차적인 주제를 2, 3차적인 주제와 구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의혹을 줄이고, 가능하다면 누군가를 가르칠 때 창조 교리에서 어디에 우선순위를 둬야 하는지를 일깨워 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신학적인 주제에 차등을 두는 일은, 어떤 지점에 있어 서로가 의견의 불일치를 가져도 되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이 될 뿐 아니라 타협할 수 없는 진리에 대해서는 자신의 확신을 공고히 세우는 작업이 되기도 한다.이와 관련된 한 가지 예로서, 최근 복음주의자들이 종말론에 대한 입장 차이를 서로 어떤 자세로 대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다행히도 그들은, 이 글에서 내가 제안하고 있는 신학적인 차등을 고려하는 태도를 매우 잘 보여 주게 되었다. 원래 20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전천년주의를 부정하는 일은 대다수 근본주의자들에게 성경의 무오성을 부정하는 일과 다름없이 여겨졌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 동안 복음주의자들은 종말론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가 무엇인지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재림과 죽은 자의 부활, 그리고 최후 심판과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 등이 1차적인 주제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나아가 이러한 중요성을 전제한 상태에서 천년왕국이라든가 휴거 또는 적그리스도와 같이 부차적인 주제에 대한 견해 차이를 나타내게 되었다.1차적인 주제를 설정하라창조 교리에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주제를 구분하는 작업을 할 때, 이미 유사한 작업을 수행한 역사적인 선례를 참고해 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는 ‘창세기의 시공간성’(Genesis in Space and Time)이라는 작품에서 성경의 나머지 부분이 일관성과 진정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창세기 1-11장 본문을 통해 우선적으로 확립되지 않으면 안 되는 진리가 있음을 밝힌 적이 있다. 그럼으로써 중요한 주제가 무엇인지를 선별하는 작업을 선보인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나도 창조와 관련된 일곱 가지 포인트를 1차적인 주제로 제안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각 포인트가 기독교 세계관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할 뿐 아니라 복음의 메시지와도 분리될 수 없는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의 나머지 부분도 이러한 포인트를 염두에 두고 창조 기사를 읽도록 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1. 하나님은 무(無)로부터 세상을 창조하셨다.2. 하나님은 창조자로서 피조물과 구별되신다.3. 하나님은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다.4.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다.5.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다.6. 아담과 하와는 인류의 첫 조상이다.7. 아담과 하와는 태초의 에덴동산이라고 하는 특정 시간과 장소에서 하나님께 실제로 불순종했던 역사적 인물이다.성경은 첫 번째와 두 번째 포인트를 창조 기사뿐 아니라 여러 본문을 통하여 증언한다(롬 4:17; 고전 1:28; 고후 4:6; 히 11:3). 이 두 가지 포인트는 하나님이 스스로 영존하신다는 자존성의 진리를 대변한다. 세 번째 포인트는 독자가 창세기 1장의 장르와 해석에 대해 어떤 접근을 취하든지 간에 그 본문이 자체적으로 증언하는 사실이다. 게다가 창조에 반영된 하나님의 선한 목적은 성경적 세계관을 구성하는 기본 전제이며, 고금을 막론하고 발흥하는 모든 형태의 영지주의를 반박하는 기독교 변증의 토대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네 번째 포인트는 성경의 거의 모든 내용을 통해 확증된다. 이 포인트는 우리의 신학이 바른 궤도를 따라 돌아가도록 붙들어 주는 중심축과 같은 역할을 한다.다섯 번째에서 일곱 번째 포인트는 모두 아담과 하와의 역사성을 다룬다. 내가 보기에 창세기 1장의 연대는 복음주의자들 간에 혹 이견이 발생하더라도 관대하게 넘어갈 수 있는 문제로 여겨진다. 그러나 창세기 2-3장의 역사성은 논의의 주제로 삼아서는 안 되는 문제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땅을 다스리게 하신 이야기, 또 배우자를 허락하시며 가정을 세우셨으나 이내 그들이 불순종하여 자신의 임재로부터 그들을 쫓아내신 이야기 등은 반드시 실제 발생한 역사적 사건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만일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특별하게 창조되었다는 다섯 번째 포인트를 인정하지 않으면, 인간론의 신학적 토대를 상실하게 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존엄성과 정체성에 대한 의식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인류가 한 시조를 공유한다는 여섯 번째 포인트를 포기하게 되면, 모든 사람이 인종이나 민족성 또는 사회적 신분을 초월하여 인류 공동체를 이루는 형제자매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는 개념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행 17:26). 마지막으로 아담의 타락이 역사적 사건이라는 일곱 번째 포인트를 부정하게 되면, 원죄 교리 역시 부정해야 할 뿐 아니라 아담과 그리스도의 모형론을 위시한 핵심적인 성경신학도 세울 수 없게 된다(롬 5:12-21).서로를 받아주며 논쟁하라이와 같은 1차적인 주제를 인정하기만 한다면, 상대에 대한 의혹을 품지 않고 서로를 받아들이며 신학적으로 논쟁하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며 때로는 필요하기까지 하다. 물론 서로가 성경의 무오성을 힘있게 주장하는 복음주의자들일 경우에 한해서 말이다. 그럴 경우에는 창세기 1장이 내포하는 물리적 시간이라든가 지구의 나이 또는 타락 이전의 동물의 죽음이나 포식 관계 등은 모두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될 수 있다. 그러한 문제에 관해서는 1차적인 교리에 대한 확신과 모순되지 않는 선에서 이해하면 된다. 여기서 우리는, 그러한 문제를 놓고 논쟁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따지기보다 그에 관하여 어떤 자세로 논쟁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한다.결국 창조에 관한 대화 자체를 회피하거나 또는 그에 관해 아예 토론하지 않는 게 우리의 상책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문제를 놓고 토론하며 자신의 견해를 엄격하게 방어하기 위해서는 펜을 들고 얼마간의 잉크를 거기에 쏟아붓는 작업도 필요하다. 그러나 서로의 피를 쏟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게 이 글의 요지이다. 그러므로 바라기는, 누군가의 손길을 통해 창조 교리에서 1차, 2차, 3차적인 주제가 무엇인지를 더욱 세밀하고 명확하게 구분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해 본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ological Triage and the Doctrine of Creation번역: 장성우
신학
교리
창조
복음주의자
역사성
근본주의자
프란시스쉐퍼
창세기
우리는 진정한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
by Kevin DeYoung
2020-03-17
우리 교회는 이 지역에서 “신학을 강조하는 교회”로 알려져 있다. 자랑하고자 함이 아니다. 신학을 강조해도 영적으로 열매 맺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닮은 성숙함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믿음, 소망, 사랑이 있는 교회로 알려지는 것이 신학적 박식함으로 명성을 얻는 것보다 더 안전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여전히 “환경 운동에 힘쓰는 교회”나 “최신 유행을 잘 수용해 중고등부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교회,” 또는 “화려한 무대 장치로 유명한 교회”보다는 “신학을 강조하는 교회”를 택할 것이다.건강한 신학에 뿌리를 내리고, 건강한 신학을 추구하는 교회를 세우는 일은 강단에서 시작된다. 2004년에 유니버시티개혁교회(University Reformed Church)에서 사역을 시작했을 때, 나는 그곳에서 강해 설교라는 확실하고 견고한 유산을 받았다. 이 전통을 지키기 위해 현재까지 긴 시리즈로 설교를 해왔다. 지금까지 해온 주요 시리즈를 소개하자면, 창세기, 레위기, 역대하, 에스라, 전도서, 소선지서, 마가복음, 사도행전 고린도후서, 에베소서, 디모데후서, 베드로후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이다. 주일 오전에 드리는 예배처럼 얕은 물에서만 수영한다면, 교회는 깊은 하나님의 말씀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내가 초점을 맞추는 대상은 대학 신입생들이다. 이들 중에는 스스로 사고할 줄 알고 진지한 가르침에 대해 열려있는 이들도 있지만, 새로운 용어, 이름, 개념들을 이해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도 있다. 다시 말해 회중에게 학습 능력이 있을 것이라 가정하지만, 그들이 내가 말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좋은 내용이 전부가 아니다우리 교회 성도들에게 물어보면 내 설교가 신학적이라 말할 것이다. 그 말은 곧 주중에 본문을 열심히 연구했다는 게 느껴진다는 뜻이고, 내가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한다는 뜻이다. 교회사와 조직신학을 통합한 설교문 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고, 이따금 설교에서 아주 학문적인 용어를 쓴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설교자가 자신의 신학 지식을 뽐내는 설교를 좋은 설교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세계 수준의 신학자가 세계 수준의 신학을 설교하면서도, 회중에게 세계 수준의 지루함을 선사해 신학적 성찰을 어렵게 만드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좋은 내용이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신학적으로 사고하는 성도를 길러내기 위한 신학적 설교에는 다음 두 가지가 꼭 필요하다.첫째, 열정이 있어야 한다. 성도들은 설교자가 하는 모든 말을 다 듣는 것은 아니다. 설교자가 열정적으로 전하는 말만 듣는다. 칼케톤 신조(The Chalcedon Definition)에 대해 전할 때도 “지적인 분들에게는 이 내용이 중요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은 별 관심이 없으시겠죠”라는 식으로 말하는 방법이 있는가 하면, “오늘 정말 엄청난 걸 다룬다는 거 모르셨죠? 오늘 예배에 정말 잘 오신 겁니다”처럼 말할 수도 있다. 벤 프랭클린(Ben Franklin)과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의 이야기가 그런 것이다. 복음을 거부했던 프랭클린이 휫필드의 설교를 한 마디도 믿지 않으면서 왜 자꾸 그의 집회에 가서 설교를 듣는 것인지 누군가 물었다. 프랭클린은 “알아요. 근데 휫필드 저 사람은 믿잖아요”라고 답했다. 설교자 자신을 움직이지 못하는 신학적 성찰은 성도들을 결코 움직일 수 없다.둘째, 우리는 최고의 신학을 먼저 우리의 가슴으로 가지고 가야 하고, 다시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 끌어올려야 한다. 만일 내가 요한복음 10장으로 확실한 속죄에 대해 매우 상세하고도 학구적인 설교를 하면, 헌신된 칼빈주의자들은 좋아하고 나머지는 거부감으로 몸을 뒤틀 것이다. 하지만 내 설교에서 그리스도께서 택자들을 위해서만 죽으셨다는 것이 자신의 양 떼에 대한 그의 특별한 사랑과 자기 신부를 향한 멈출 수 없는 사랑의 표현임을 보여줄 수 있다면,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구원받을만한 존재로 만드실 뿐 아니라 끝까지 구원하심으로써 그 자신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면, 죽음이라는 것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어떻게 완전히 종식되는지를 아름답게 표현해낼 수 있다면, 그리고 이 난해한 교리가 우리의 마음에 호소하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으로까지 이어지게 할 수 있다면, 비로소 나는 성경의 풍부한 가르침을 주는 것이다.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학적 엄밀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성도들이 인식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설교 이상의 것교회 사역에 있어 설교 이외에도 고려해야 할 것들이 있다. 신학 교육과 신학적 반성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에 스며들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삶, 우리가 함께하는 교회 생활을 신학적으로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하는 찬송, 우리가 드리는 기도, 예배의 순서, 심지어 광고를 어디에 넣느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신학적으로 사고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목회자들이 자신의 사역에 신학적으로 묵상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성도들이 자신들의 직업에 신학적으로 사고할 수 있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신학적으로 사고하는 교회 없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신학적 식별력과 소양을 기를 수 있겠는가? 하나님 말씀의 부요함에 대한 그들의 사랑이 어찌 자랄 수 있겠는가? 어찌 하나님의 사고를 좇아 생각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며, 어떻게 신학적인 백성이 될 수 있겠는가? 개혁주의를 고백하는 우리 상황에서는 새신자 교육 내용을 벨직 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그리고 도르트 신경으로 구성할 필요가 있다. 우리 교회 대부분의 새신자들은 개혁교회의 일치를 위한 세 신조(The Three Forms of Unity)를 들어본 적이 없지만, 수 세기 동안 세계 각처에서 하나님 백성들의 신앙을 살찌게 했던 이 신학 문서들을 스스로 읽어보는 것을 항상 새신자 교육의 하이라이트로 생각한다. 최근 우리 교회에서는 1년간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52회에 걸쳐 매 주일 저녁 예배 때 설교했다.우리는 모두 신학자들이다내가 위에서 말한 내용은 리더십 훈련, 장로와 집사를 세우기 위한 검증 과정, 대학부 사역, 소그룹, 주일학교 등에도 적용된다. 우리는 비정상적인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만일 말씀에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신앙고백 전통에 뿌리를 내리는 것, 성도들에게 교리문답을 가르치는 것, 그리고 전적으로 신학을 강조하는 것 모두 비정상적인 일이 된다.피상적인 것만 좇는 이 세상에는 뭔가를 줄 수 있는 교회가 필요하다. 얕디얕은 문화 속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의 예배는 깊이가 있어야 한다. 세속적인 우리 사회에는 선하고 거룩한 사고가 더욱 많이 필요하다. 목사로서 내 사역, 교회로서 사역은 우리 모두 신학자라는 전제, 그 전제가 맞는다면, 우리 모두 좋은 신학자가 되도록 애써야 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e Need Theologians, Not Smarty-Pants번역: 이정훈
목회
리더십
신학적설교
칼케톤신조
조지휫필드
벨직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교리문답
도르트신경
가짜뉴스의 심리학적 이유와 성도의 대처법
by 노승수
2020-03-16
가짜뉴스는 왜 만들어지는가? 그것을 믿고 싶은 사람 때문에 만들어진다. 소문이란 원래 사실을 따라 퍼지지 않고 감정을 따라 퍼진다. 내가 믿는 사람의 나쁜 소문은 “그 사람이 그럴 리가 없어!”로 반응하게 되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의 나쁜 소문은 “내 그럴 줄 알았어!”로 반응하게 된다. 이미 믿고 싶은 게 정해져 있는 것이다. 이 믿고 싶은 것에는 사랑과 미움이란 인간의 감정반응이 내재되어 있다. 그리고 그렇게 믿는 데는 인간의 불안이 자리하고 있다. 아들러(Alfred Adler)는 “거짓말은 진실이 위험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라고 했다. 사람들이 거짓말에 기울어지게 되는 데는 불안이 자리하고 있다는 말이다. 가짜뉴스는 우리 불안에 기생한다. 불안은 우리 내면에 적개심과 미움을 억압했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기도 해서 가짜뉴스가 혐오와 배제, 분노와 적대를 불러일으키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각 나라마다 가짜뉴스와 거기에 따라 붙어서 혐오와 배제가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반복적으로 듣게 된 가짜뉴스는 우리가 혐오와 배제를 정당화하는 기폭제가 된다. 그렇게 가짜뉴스는 어느새 내게 사실이 된다. 가짜뉴스가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 이유다. 그러면 어떻게 가짜뉴스는 우리에게 사실처럼 굳어지게 될까? 이것을 잘 설명해줄만한 심리학적인 실험이 있었다. 이 실험의 결과로 얻은 것은 “환상 진실 효과(The illusory truth effect)”라고 명명된 것이었다. 이 효과는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라고 믿게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방어하기까지 하는 기제를 말한다. 1977년 미국 빌라노바(Villanova)대학과 템플대학에서 린 해셔(Lynn Hasher) 등이 고안한 실험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것을 진실이라고 믿는 경향을 검증한 것이다. 피험자에게 60개의 문장을 주고 실험자들이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물은 후에 2주 후에 2차로, 다시 2주 후에 3차로 참과 거짓을 묻는 것을 같은 방식으로 반복했는데, 피험자들은 이미 읽은 익숙하고 친숙한 글을 얼마나 합리적인가에 관계없이 사실로 간주했다.1) 예를 들어, “첫 번째 공군 기지는 뉴멕시코에 세워졌다”, “농구는 1925년에 올림픽 종목이 되었다” 등과 같은 내용이었다.따라서 반복적으로 가짜뉴스에 노출되면 “환상 진실 효과”로 인해 가짜뉴스를 진실이라고 믿을 뿐 아니라 사실로 방어하기에 이른다. 사람은 생각보다 이성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 자기에게 익숙한 것을 세계관으로 해서 다른 것을 판단하고 행동을 결정하게 된다. 가짜뉴스를 접했을 때, 인간의 인지과정은 새 정보를 이미 사실로 알고 있는 것과 비교하기 때문에 논리적이라고 느끼게 되고 반복된 새 문장은 반복되지 않은 문장에 비해 인지과정에서 처리하기 쉽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반복되고 익숙해진 것이 사실관계 유무와 관계없이 더 진실하다고 믿는다. 그렇게 가짜뉴스는 신자의 삶에서 소비되는 지경에 이른다. 그러면 신자는 가짜뉴스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요시다 도오루의 저서 ‘정치는 감정에 따라 움직인다(원제 : 감정의 정치학)’에 이런 표현이 있다. “인간은 이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목적을 설정하지 않으면, 합리적인 행동을 취할 수 없다.” 이 표현은 인간이란 존재의 정치 활동에 있어서 옳음과 좋음이 함께 경험되는 세계관이 있을 때, 합리성의 감정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장르가 다르지만 이 비슷한 말을 한 신학자가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가 ‘신앙감정론’에서 한 “참된 신앙은 대체로 거룩한 감정에 있다”는 표현이다. 원래 칼빈은 신앙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고하게 아는 것이며 이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신 약속의 진실성에 근거하는 것이고 성령을 통해서 우리 지성에 계시되며 우리 마음이 인친 바 된 것”(Inst. 3. 2. 7.)이라고 말한다. 정치가 흑색선전과 온갖 우상이 난무하는 장이 되는 이유는 인간이 감정적이고 뚜렷한 목적과 방향이 없을 때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고 했다(잠 29:18). 인간 내면의 불안으로 인해서 가짜뉴스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코로나와 같은 역병이 나돌면 인간의 불안은 더 극대화되고 그 기저에 깔린 적대감과 혐오는 가짜뉴스를 명분으로 세상에 역병처럼 퍼진다. 이런 문제에 대한 신자의 대처는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고하게 아는 자리에 서는 것이다. 단지 지성으로만 그렇게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옳음의 자리에 우리 좋음이 함께하게 되는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는 것이다. 과거 이 나라의 세계관 운동은 학적이었다. 최근 세계관 운동이 주목하는 것은 습관이다. 습관이란 좋음을 따라 형성되기 마련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옳음이 그것이 우리 정서로서 활성화되는 그 자리에 참된 신앙이 있고 이 신앙의 자리야 말로 가짜뉴스에 대처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________________1) Hasher, Lynn; Goldstein, David; Toppino, Thomas (1977). "Frequency and the conference of referential validity"(PDF). Journal of Verbal Learning and Verbal Behavior. 16 (1): 107–112. doi:10.1016/S0022-5371(77)80012-1.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16-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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