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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성의 공포와 싸울 용기
by Marshall Segal
2020-03-31
지난 며칠간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걸린 확진자와 감염된 국가 수가 급격하게 늘면서 그에 대한 공포감이 치솟고 있다.지금까지 이백 개가 넘는 나라에서 약 57만 명의 확진자가 보고 되었고(3월 28일 기준) 수만 명이 사망했다. 가장 큰 타격을 받은 미국과 이탈리아는 말 그대로 국가가 거의 문을 닫은 상태이다. 대부분 대학이 강의를 온라인으로 전환했다. 디즈니랜드도 문을 닫았다. 대학스포츠 협회는 온 국민이 그토록 고대하던 대학 농구 토너먼트 ‘3월의 광란’을 취소했다. 프로 농구, 프로 하키 그리고 프로 야구도 엄청난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모든 리그를 중단했다. 미국은 유럽에서 들어오는 대부분 여행객의 입국을 30일간 금지했다. 어떤 통계에 따르면 궁극적으로 약 2억 명의 미국인이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감염될 거라고 한다. 만약에 이 예상이 맞고, 또 현재의 사망률인 1.6%가 유지된다면, 이 통계가 의미하는 것은 미국에서만 3백 2십만 명이 죽는다는 말이다.이 바이러스에 관해서 점점 더 알아가고 있지만, 사실 우리는 아직도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고, 상당 기간 그런 상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 바이러스가 가진 가장 무서운 힘은 바로 이런 불확실성이 가져다주는 두려움이다. 두려움 중의 두려움‘코로나19’를 향한 두려움의 근간에 숨은 것은 다름 아니라 슬금슬금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다. 이 공포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세상 사람들을 노예로 삼을 정도로 강력하고 교묘하다(히 2:15). 전쟁을 통해 그런 시절을 겪었던 C.S. 루이스(C.S. Lewis)는 지금 우리가 겪는 팬데믹 상황과 모든 면에서 관련이 있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전쟁(‘코로나19’ 바이러스)이 죽음에 어떤 역할을 하는가? 아무리 전쟁이라고 해도 한 번 만날 죽음을 두 번 만나도록 하지 않는다. 어차피 우리는 다 죽는 존재이기에 죽을 확률이 전쟁 때문에 더 높아지는 것도 아니다. 물론 전쟁은 죽음을 더 빨리 만나도록 한다. 그러나 나는 이게 우리가 두려워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전쟁은 죽음을 향해서 뭔가를 한다. 우리로 하여금 죽음을 더 생각하도록 한다…. 전쟁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을 생생한 실제로 느끼도록 만든다. 그리고 과거 위대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사실은 축복으로 간주 되었을 것이다. (“전쟁을 통한 배움Learning in War-Time”)죽음이 가져다주는 현실은 바뀐 게 없다. 지난 몇 주간 바뀐 게 있다면, 우리 중 일부에게는 누구나 만나게 될 미래의 죽음을 지금 현실의 문제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코로나19’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이 치명적인 바이러스조차도 생소하고도 쓴 자비(strange and bitter mercy)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으로서 기독교인은 이 전염병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에 따른 적절한 예방책을 취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나 동시에 ‘코로나19’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의 대사명을 상기시킬 뿐 아니라 경고의 역할을 하고 있다. 죽음의 두려움에서 해방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 사람이 감수하지 않는 위험을 대신 감수할 뿐 아니라, 두려움과 감염, 그리고 죽음 앞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소망을 보여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육신을 부술 수 없는 것이 세계적인 팬데믹 사태를 맞아서 많은 사람은 하나님이 보내시는 경고에 귀를 닫을 것이다. 그러나 우주 속 모든 아름다움과 분자 하나까지도 다스리는 하늘의 주님은 귀 있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사스 또는 메르스 바이러스와 비교하여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치사율이 낮다고는 하지만, 이 바이러스의 전파력은 훨씬 더 빠르고 광범위하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비록 수치상으로는 낮을지 몰라도, 여전히 수백만 명, 특히 약하고 환경이 취약한 사람 중 상당수가 죽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10장의 경고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또 하나님 안에서 피난처를 찾는 자들을 위한 놀라운 약속을 담고 있다. 바로 다음 구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29-31).질병관리센터가 최선을 다해서 ‘코로나19’를 억제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는 지금 당신의 머리카락 하나까지도 세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팬데믹도 다스리시고, 또한 당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채워주신다. 만약에 이 전염병 때문에 당신 또는 내가 죽는다면, 그건 결코 하나님이 우리를 잊었거나 우리를 버렸기 때문이 아니다. 훨씬 더 뛰어난 그리스도생명의 축복을 받은 모든 사람은 다 죽음의 두려움을 알고 있다. 진리와 영원한 삶으로 이끄는 좁은 길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그리스도가 죽음의 두려움을 물리치는 것을 보게 된다. 몇 번이나 죽을 뻔했던 바울 사도는 십자가에 달린 주님의 발자취를 따랐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빌 1:21–23).요즘과 같은 위기의 시대는 우리도 바울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는지, 그 여부를 테스트하게 만든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게 별로 손해 보는 일이 아니고, 또 죽음이 멀게만 느껴지는 상황에서라면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말하는 건 조금도 어렵지 않다. 그러나 전염병이 우리 사이에서 퍼지고 있고, 우리가 아끼는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는 상황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정말로 죽음이 좋은 소식인가? ‘코로나19’는 우리에게 새롭고 어두운 캔버스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 캔버스 위에 하나님은 지금 “죽음 후의 생명이 이 세상에서 만나는 가장 달콤한 삶보다 훨씬 더 좋다”라는 말을 쓰고 있다. 죽음은 그 자체로는 결코 더 나을 게 없다. 죽음은 끔찍하고 증오해야 할 적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라면 죽음조차, 궁극적으로 만족을 주고 완벽하게 안전한 곳으로 들어가게 하는 문이라는 도구(servant)가 될 수 있다. 죽는 것도 유익하다. 그건 그리스도인이 겪는 죽음이 덜 끔찍해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주는 것 때문이다. 아니 궁극적으로 죽음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그분(Who)” 때문이다. 죽음이 그리스도인에게 의미하는 이런 사실 때문에 우리는 지금 이 불확실성의 시간에 용기를 내어 대면할 수 있는가? 기꺼이 위험 부담이 땅에서 몇 년 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훨씬 더 좋다는 사실을 바울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바울은 또한 남은 생애 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를 잘 알고 있었다.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빌 1:23–25).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바울은 더 열심히 그가 섬겨야 할 영혼을 위해 사역하고 또 희생했다. 그들이 예수님 안에서 더 성장하고 믿음 안에서 더 큰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모든 진액을 쏟았다. 세상이 모르는 위대한 지혜를 가지고 있는 교회가 가장 적절한 때에 나아가서 세상의 필요를 채울 수 있을까?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향한 믿음 안에서 더 성장하고 더 기뻐할 수 있도록, 교회가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교회가 보여줘야 할 용기가 방역에 대한 경고를 무시하는 무모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지금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은 이 바이러스가 퍼지는 것을 최대한 막거나 늦추는 데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라면 또한 가져야 할 용기가 있다. 그것은 언젠가 다른 사람들이 나서려고 하지 않는 어떤 위기를 맞았을 때, 용기 있게 앞으로 나서는 것이다. 데이비드 브룩스(David Brooks)는 그런 상황이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1918년, 스페인 플루 팬데믹이 미국을 강타했다… 상황이 점점 더 악화되고 있는 도시에서 일하는 의료 종사자들은 자원봉사자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필라델피아에서 응급 의료 책임자는 아픈 아이들을 돌보아줄 봉사자를 간곡하게 요청했지만, 아무도 거기에 응하지 않았다.만약에 우리 앞에 그런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면,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보다도 먼저 돕겠다고 나설 수 있을 것이다. 정말로 병원에 환자가 넘치고 그들을 도울 의료인력이 충분하지 않을 때, 그래서 봉사자들에 대한 요청이 있을 때 우리가 기꺼이 나설 수 있을까? ‘나는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1519년 흑사병이 종교개혁가이자 목사인 울리히 쯔빙글리(Ulrich Zwingli)의 고향인 스위스 쮜리히에 이르렀다. 흑사병은 결국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쓸어버렸다. 쯔빙글리는 당시 휴가 중에 있었다. 모든 사람이 다 도시를 떠나 도망갔지만, 쯔빙글리는 용감하게도 다시 도시로 돌아가서 아픈 이들을 보살폈다. 또한 예수님 안에서 찾을 수 있는 희망을 전했다. 이미 오염된 이 도시 안에도 그리스도가 구원할 사람들은 여전히 많을 뿐 아니라(행 18:9–10) 환난 중에도 그리스도는 함께 할 것이라는(사 43:1–3; 마 28:20) 믿음으로 쯔빙글리는 자신의 생명을 걸었다. 그 결과 그는 흑사병에 걸려서 거의 죽을 뻔했다. 그 모든 것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고 희망이 없는 게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쯔빙글리가 사랑의 길(path of Love)을 걸으면서 받은 고통이기 때문이다. 쯔빙글리는 병마가 주는 가시 속에서 여러 편의 시를 지었다. 믿음과 희망 안에서나는 이 땅을 떠납니다.천국이 주는 안전함나는 당신의 것입니다.그리고 병이 더 심해졌을 때는 이런 시를 썼다. 그는 내게 해를 입힐 수 없다나는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내가 지금 누워 있는 이곳은바로 당신의 십자가 아래이니까.천국을 향한 쯔빙글리의 소망은 병과 죽음 앞에서 무모하거나 이기적으로 만들지 않았다. 대신 그를 용기로 채웠고, 그에게 다른 이들의 필요를 볼 수 있는 눈과 그 필요를 채우는 능력을 주었다. 지금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알았고, 죽음 저편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그는 자신을 향한 엄청난 위기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위험을 받아들였고, 고통받는 자들을 도왔는데 특히 영원한 지옥의 고통에 처한 이들을 더 도왔다. 쯔빙글리의 모습이 우리 기독교인에게 그대로 드러날 수 있을까?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서 멀어지지 않고, 오히려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까? 병원이 환자들로 차고 넘칠 때 교회가 도움의 손을 내밀고, 우리가 위기를 기꺼이 감수함으로 이 두려움에 찬 도시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채울 수 있을까? 지금이 바로 그때다세상이 평안할 때면 사람들은 복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세상에 무서울 게 없으니까. 그러나 이런 팬데믹 사태를 맞으면 상황이 달라진다. 런던에서 콜레라가 발병했을 때,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이에게 다음과 같이 도전했다.영혼을 사랑하는 당신에게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람들은 평소보다 훨씬 더 경계심에 쌓여있고, 당신이 그런 사람들에게 기꺼이 도움의 손길이 될 수 있도록 스스로 열어놓아야 한다. 당신에게는 생명나무(Balm of Gilead, 길르앗의 향유)가 있고, 그들의 상처에 그것이 필요하다면, 그 생명나무를 바르도록 하라(역자 주: 복음을 전하라는 뜻). 당신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죽은 이를 알고 있다. 그들에게 그를 전하라. 그들의 눈앞에서 십자가를 높이 들라.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고, 또 인간이 언젠가는 하나님 앞으로 들려 올려질 것이라고 말하라. 갈보리에 대해서, 갈보리에서 울려 퍼진 신음과 비명 그리고 피에 대해서 말하라. 예수님이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매달렸다고 말하라.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라.“저기 십자가에 못 박힌 자를 바라볼 때 생명을 얻을 수 있다.”예수님은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를 구원하신다고 그들에게 말하라.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예수님이 강도에게 말한 것처럼, 마지막 순간에라도 믿는 자를 예수님은 구원하신다고 그들에게 말하라.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좋은 것을 준비해 놓으셨다(엡 2:10). 하나님은 오늘날과 같은 위기에 대비해 우리를 준비시키셨다. 하나님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마비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용기 있는 행동을 통해 당신의 풍성한 자비함을 드러내시려고 한다. 하나님 아버지, 교회를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What Courage Might Corona Unleash?번역: 무제
찰스스펄전
C.S.루이스
두려움
코로나19
예수그리스도
COVID-19
쯔빙글리
팬데믹
복음
포르노그래피 산업에 반대해야 하는 이유
by Joe Carter
2020-03-30
얼마 전, 네 명의 미국 하원의원이 법무장관에게 편지를 보내어 “외설적인 음란물 생산과 유포를 중대한 범죄 사항으로 기소”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주기를 당부했다. 법조계 인사들을 통해서도 “그러한 자료를 생산하고 유포하는 자들”에 대한 기소를 조속히 실행해 주기를 요청했다.그 네 명의 의원은 트럼프 대통령이 후보자 시절에 음란물을 단속하는 법안을 마련하기로 공약하며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가는 포르노그래피의 확산을 막기 위해 외설금지법을 시행하겠다고 말한 사실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지금까지 트럼프 정부는 그 공약을 간과해 왔다. 결과적으로 불법적인 음란물의 유해성은 감소하지 않은 채 노소를 막론하고 큰 영향을 미쳐 15개 주 의회에서는 포르노그래피가 국민의 건강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한다.”그런데 이 편지와 그 내용을 지지하는 일부 사회단체의 목소리는 정치적으로 우익 성향을 지닌 대중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그래서 (스스로 기독교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을 포함해) 수많은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는 음란물을 단속하거나 금지하는 법안이 다름 아닌 자신들의 정치적 원리에 위배가 된다고 우려를 표명하는 상황이다. 이처럼 외설금지법을 반대하는 보수주의자들에 대해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로스 도댓(Ross Douthat)은 다음과 같이 냉소적으로 반응했다. “포르노 자체에 대해서 법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어떤 다툼이 일어나든 간에 ‘외설금지법은 반(反)보수적이다’라는 주장은 20세기 후반 미국 정치계의 미스터리를 파악하고 있는 학자들을 제외하곤 거의 모든 이들에게 난센스로 들릴 거다.”기독교인이 음란물에 대한 혐오를 공표하던 시절이러한 변화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수많은 기독교인이 외설금지법을 반대하는 입장을 내세우거나 그런 입장을 은밀히 지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특별히 복음주의자들은 음란물의 확산과 보급을 막는 일을 자신들의 사명으로 여길 정도였다.1976년을 예로 들면, 당시 복음주의자들은 한 대통령 후보자가 ‘플레이보이’ 잡지사와 인터뷰 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분개했다. 이에 침례교 목사이자 ‘모럴 머저리티’(the Moral Majority)의 공동 창립자인 제리 폴웰(Jerry Falwell)은 이렇게 말했다. “플레이보이와 인터뷰하는 짓은 단시간도 내줄 가치가 없는 추잡하고 야한 잡지에 국가의 최고직이 지녀야 할 신용과 위엄을 넘겨 버리는 행위와 같다.”그러나 40년 후 (폴웰의 아들을 포함한) 여러 복음주의자는 플레이보이 잡지사와 인터뷰를 했을 뿐 아니라 그 표지에 등장하기도 한 대통령 후보자를, 심지어는 플레이보이가 만든 소프트코어 포르노 영화에 카메오로 출연하기도 했으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어느 플레이보이 모델과 바람까지 피운 대통령 후보자를 지지하게 되었다.누구나 음란물의 발칙한 영향을 생각하며 걱정을 표출할 순 있지만, 자신이 진정으로 믿는 바가 무엇인지는 그 행동을 통해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 같은 기독교인이 포르노그래피의 해악을 다시 한번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지 여기에 그 네 가지 이유를 설명해 보도록 하겠다.1. 포르노는 대부분 규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위험하리만치 해롭게 제작된 상품이다정부는 공공의 안전을 위해 음식을 포함하여 다양한 상품을 통제 및 관리한다. 예를 들어 사람과 동물이 섭취하는 약품이라든가 인간에게 사용하기 위해 개발된 생물학적 약제와 의료 기구, 또 식품 보조제와 방사선이 방출되는 전자기기 또는 화장품과 담배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상품을 관리한다. 2018년에 도댓은 ‘포르노를 금지하자’(Let’s Ban Porn)라는 제목이 달린 한 칼럼에서 이렇게 말한 바가 있다. “좌익과 우익의 도덕주의자들이 함께 씨름하는 구조적인 문제와 달리, 포르노는 단지 하나의 상품일 뿐이다. 다시 말해, 제작되고 분배되고 판매되는 상품이다. 따라서 우리가 원한다면, 규제와 단속을 받는 게 마땅하다.”육체의 외관과 성적인 기능 면에서 볼 때, 포르노는 사회 불안과 우울증, 동기 저하, 발기 부전, 집중력 감소, 부정적인 자기 인식 등 여러 가지 문제를 유발하는 상품이다. 게다가 이 상품은 외로움과 이혼 증가, 성폭행, 성희롱이 수용되는 현상과도 관련이 깊다. 그럼에도 포르노는 소비 시장에서 가장 유해한 상품으로 취급되지 않고 정부의 규제 없이 대부분 자유롭게 유통되고 있다.2. 포르노는 두뇌 활동을 방해한다성적으로 노골적인 행위를 다루는 소재는 남성의 두뇌에 있는 거울 신경을 자극한다. 행동을 모방하는 방식과 관련하여 활동하는 거울 신경은 특정 행동을 계획해 내는 운동계를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포르노그래피를 보게 되면, 거울 신경은 흥분을 일으키는데 이는 성적인 긴장감과 더불어 그 충동을 분출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게 만든다. 그러니까 음란물을 통해 욕구를 해소하려고 하면, 당연히 호르몬 분비와 신경계 활동에 변화가 일어나 결국에는 자기가 주목하는 대상에 종속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하나님의 계획대로 바로 그 대상은 자기 아내가 되어야 하는데, 많은 남성에게 그 대상은 스크린에서 본 이미지가 되고 말았다”라고 휘튼대학교 심리학과 부교수인 윌리엄 스트러더스(William Struthers)는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이처럼 포르노그래피는 그 장면을 보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특정 이미지에 종속시키고 만다. 그리고 한 남성이 자기 아내와 연합하는 데 사용되는 생물학적 반응을 강탈함으로써 마침내는 그 연합의 끈을 풀어 버린다.”3. 포르노는 성매매를 조장한다2019년 10월, 두 군데의 유명한 포르노 웹사이트 운영자들과 직원들이 성매매 및 다른 범죄 사실로 인해 기소되었다. 그 범죄에는 몇몇 여성을 강제로 인터넷에 올라가는 포르노 비디오에 출연하도록 한 혐의까지 포함되었다. 이러한 범죄에 대한 수사가 상대적으로 드물게 일어나긴 하지만, 실제로 포르노 산업은 성매매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성매매를 반대하는 비영리단체인 ‘레스큐 프리덤’(Rescue:Freedom)이 아홉 개 나라를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성적으로 착취당한 여성의 49퍼센트가 자신들이 성매매에 이용당하는 동안 포르노그래피가 제작되었다고 밝힌 바가 있다.“만일 저들의 상품 중 일부가 아동의 노동력까지 동원하여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 회사의 상품을 구매하겠는가?” 음란물 제작에 반대하는 단체인 ‘파이트 더 뉴 드러그’(Fight the New Drug)가 던진 질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도전한다. “과연 어떻게 ‘포르노는 거기에 출연하는 자들의 동의를 얻어 만들어지기 때문에 괜찮다’라는 말을 할 수 있는가? 실제로는 당신이 생각하는 정도보다 훨씬 더 많은 경우가 그렇지 않은데 말이다.”이에 말로 사피(Marlo Safi)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혹 누군가가 지난해만 285억 뷰를 기록한 무료 포르노 웹사이트에 단 한 건이라도 접속했다면, 그는 협박을 당해 어쩔 수 없이 카메라 앞에 서게 된 성매매 희생자를 본 셈이다.” 기독교인은 음란물을 보며 자신의 몸에 해를 끼쳐서는 안 되듯이, 그렇게 악한 상품에 대한 수요를 조금이라도 늘려 타인의 몸에 해를 끼쳐서도 안 된다. 이런 차원에서 포르노가 대량으로 소비되는 현실을 알면서도 눈감고 지나간다면, 이는 수많은 아동과 여성 그리고 남성까지 포함해 심각하게 벌어지는 강간 및 성폭행에 공범으로 참여하는 거나 마찬가지다.4. 포르노는 미성년자의 정신을 해친다아동 노동 착취를 예방하려고 설립된 기구인 ‘프리벤트 차일드 어뷰스 어메리카’(Prevent Child Abuse America)는 어린아이나 청소년이 포르노그래피를 볼 때 자동으로 성적 흥분이 일어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이런 경험은 그들이 눈앞에 있는 장면을 실제로 ‘좋다고’ 여기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사실은 그들의 두뇌에서 그 장면이 좋다는 ‘승인’이 떨어지기도 전에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과정일 뿐인데 말이다. 게다가 어린아이와 청소년은 그러한 음란물에 둔감하게 되어 아무렇지도 않게 성적인 행동을 다른 아이에게 묘사할 수 있으며, 특히 청소년은 위험 수위가 높은 행동까지 따라 할 수 있다.많은 사람은 포르노그래피에 자녀들이 노출되지 않도록 막아야 할 책임이 부모에게 있다고 쉽게 말하지만, 여러 조사에서 드러나듯이 부모 홀로 그 책임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다.10년 전 몬트리올대학교의 한 연구팀은 가정과 여성 폭력에 관한 학제 간 연구를 진행하는 센터의 후원으로 포르노그래피가 남성에게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게 되었다. 당시 연구자 중 한 명이었던 사이먼 루이스 라쥬네스(Simon Louis Lajeunesse)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원래 우리는 20대 남성 중 포르노그래피를 본 적이 없는 대상부터 조사를 시작하려 했는데, 그에 해당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포르노는 젊은 세대 가운데 너무 많이 퍼져 있어 18세 미만 남성 중 93퍼센트가 또 같은 연령대의 여성 중 62퍼센트가 포르노를 본 적이 있다고 추정된다. 미국에서는 자녀들의 성 의식이 형성되는 데 포르노만큼 악영향을 미치는 상품이 없다. 따라서 포르노 산업을 더 강력히 규제하고 가능한 대로 금지해서라도 우리 가족과 다음 세대를 지키는 게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다.때로는 ‘어린아이를 생각하라’는 식의 대의를 내세우는 접근이 사람들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에 대한 변명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포르노는 존재해서는 안 될, 그야말로 구제 불능의 악독한 상품이다. 따라서 포르노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는 일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이 아니라, 잘못된 성 의식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우리 아이들을 지키는 일이다.모든 시대와 문화에는 극도로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는 죄악 된 행동이나 관습이 나타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영혼을 파괴하는 가장 끔찍한 관행을 들라면, 포르노를 소비하는 행태를 꼽을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이웃을, 그중에서도 어린아이와 성적으로 착취당하는 이들을 사랑한다면, 더 이상 포르노가 유통되는 현실에 대한 어떤 구실도 만들지 말고 그 산업을 금지하는 운동에 동참해야 한다.만일 당신이 기독교인이면서도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상식적인 의무나 인류 사회가 건강하게 성장하도록 도와야 한다는 하나님의 기준과 다른 정치적 원리를 고수하고 있다면, 바로 그 견해를 재평가해 보길 바란다. 혹 당신의 정치철학으로 빚어진 우상을 만들고 있진 않은지 확인해야 할 테니 말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4 Reasons Christians Should Support Banning Pornography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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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예배당에서 설교하는 당신에게
by Jonathan Landry Cruse
2020-03-29
이번 주일에 나는 그동안 해본 적 없는 일을 해보려고 한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예배당에서 설교를 해보는 것이다. 교인들이 집이나 또는 소그룹을 만들어 예배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하는, 기존의 예배 형태를 벗어난 온라인 예배 말이다.‘코로나19’의 팬데믹 사태 때문에 아마도 예배의 대안을 찾는, 몇 천 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몇 백 명의 목사 또는 예배 인도자가 나처럼 예배를 드릴 것이다. 이런 온라인 예배를 가능케 하는 현대 기술에 나는 감사한다. 그리고 나는 공공장소에서 사람들을 모이지 못하게 하는 정부의 지침에 조금도 반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런 정부의 정책은 우리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서이고, 이 명령에 따르는 것은 우리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 번째 가장 큰 계명에 순종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럼 나는 기쁜가?그럼에도 불구하고 텅 빈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은, 솔직히 말해서 별로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예배를 드리러 가는 것, 즉 주님의 백성들과 함께 주님의 전에 거하는 것은 시편 기자에게 기쁨에 가득차게 만드는 일이었기에 말이다.“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시 122:1)그러나 이번 주,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몇 주 동안 예배를 놓고 그 기쁨을 만끽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그걸 생각할 때 내 안의 기쁨도 사그라짐을 느낀다.목사로서 나의 한주간은 항상 주일을 향하고 있다. 서재에서 설교를 준비하고 또 관련한 여러 회의를 가질 뿐 아니라 성도들과 교제하는 등의 모든 과정은 결국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삶의 자리에서 필요한 때에 복음의 은혜를 누리도록 만드는 일이다. 그 일련의 과정은 오로지 하나님의 도움으로만 가능한 예배 시간으로 그 정점을 이룬다. 물론 나는 이번 주에도 그 사역을 감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 주일은 상황이 다를 것이다. 아니, 다른 정도가 아니라 아주 이상할 것이다.예배 시간 내내 아무런 반응이 없을 것이다. 함께 드려야 하는 기도를 나 혼자 하게 될 것이고, “찬송가 몇 장을 펴시지요”라는 말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말씀을 듣는 교인들의 반응에 따라서 상당 부분 그 느낌이 달라질 수 있는 나의 설교는,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어색하기만 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기운이 빠진다. 그럼에도 이런 온라인 예배에 참석하는 이들에게 큰 은혜가 임하기를 나는 기도하고 있을 뿐이다. 이건 목사에게 정말로 영적인 도전이다.보이지 않는 교회목사라면 예배에 참석하는 교인 숫자에 무척 민감할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코로나19’의 위기가 목사에게 주는 한 가지 유익이 있다면, 영혼을 돌보는 것 보다 교인 숫자 세는 데에 더 바쁜 우리의 습관에 제동을 걸어준다는 사실이다. 텅 빈 예배당을 보면서, 교인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비로소 신학자들이 말하는 ‘보이지 않는 교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 것이다.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은 보이지 않는 교회를 “모든 것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이미 모인 또는 앞으로 모이게 될, 선택받은 모든 사람들”(WCF 25.1)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것은 히브리서 12장 22-23절에서 온 것으로, 우리가 예배를 드린다고 할 때, 그것은 장소와 관계없이,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내가 매주 인도하는 예배에 참석하는 믿는 자들의 숫자가 우리 교회 지붕을 뚫고 나갈 정도로 많다는 것이다. 물론 이건 나의 설교 능력과 비전을 주는 리더십, 또는 나의 매력적인 그 무엇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 모든 것은 다 새 언약의 중보자 되신 예수님의 피가 뿌려졌기 때문이다(히 12:24).사랑하는 목회자들이여, 지금 당신 앞에서 당신이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교인들이 모여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주일 예배 시간에 완전히 텅 빈 예배당을 내게 준비해 주신 것이 아닐까? 단 한 분의 청중앞으로 다가올 주일을 맞으며 또 하나 우리 목회자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진리는, 우리가 설교하는 유일한 이유가 되시는 그 분은 언제나 우리 앞에 앉아 계신다는 사실이다.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설교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비록 교인들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은 영으로 우리 앞에 앉아계신다. 그동안 수많은 교인이 예배에 참석한 사실에 초점이 맞추어져 우리는 얼마나 쉽게 이 사실을 잊고 살아왔던가?지난 주일에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우리 교회는 동네에서 예배를 취소하지 않은 몇 개 안 되는 교회 중 하나였는데, 그래서 그런지 예배를 취소한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이 우리 교회를 찾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날 우리 교회 역사상 가장 많은 교인이 예배에 참석했고, 나는 교인으로 꽉 찬 예배당을 보면서 예배가 궁극적으로 누구를 위한 것인지 잊어버릴 정도로 강한 유혹을 느꼈다. 참석한 숫자로 보면 이번 주는 지난주와 정 반대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 한 분으로 예배당이 꽉 차게 보이게끔 느끼기 위해서 내게 텅 빈 예배당이 필요한 것이다. 내가 하나님으로만 온전히 채워지기 위해서 그게 무엇이 되었든, 나는 그게 필요한 사람이다. 바로 이 메시지가 내게 필요했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내가 내 자신에게 간곡하게 요청한 것을 당신에게도 들려주고 싶다. 사랑하는 목회자여, 온 마음을 쏟아서 이번 주일에 설교하라. 낙담하지 마라.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카메라를 향해 쏟아 부어라. 격리된 당신 자신을 예배의 도구로 사용하라. 하나님은 지금의 이 기이한 상황조차도 당신을 위해서 또 맡겨주신 양떼를 위해서 선하게 사용하실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ake Heart, Pastor. Your Church Won’t Be Empty Sunday.번역: 무제
COVID-19
온라인예배
절망
보이지않는교회
웨스터민스터신앙고백
히브리서
팬데믹
N번방에 나타난 악의 심리학
by 노승수
2020-03-28
‘유에스뉴스앤월드리포트’(U.S. News & World Report)에 보도된 “포르노 산업”이라는 기사에 의하면 한 해 동안 미국인들이 도색 잡지, 음란 컴퓨터 프로그램, 성인용 유선 방송, 나체 쇼, 음란 연극, 음란 비디오, 성행위 보조 기구 등을 위해 쓴 돈이 약 80억 달러이며, 이 중 7억 5천만 달러 내지는 10억 달러 정도가 음란 전화비용으로 지출되었다고 보도했다. 20년도 더 된 통계라는 점을 고려하면 현재의 실태는 더 심각하다는 것을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얼마 전 한국 사회는 텔레그램에서 N번방, 박사방 등을 만들어 미성년자들을 성적으로 착취해서 만든 음란물을 공유한 일당이 붙잡혔다. 여기 가입자만 30만 명이라고 하니 앞서 소개한 리포트가 국내에서도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여기에는 미성년자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사회적 약자인 여성과 소녀들을 성적으로 착취해서 그것으로 돈벌이한 자들이나, 관음증처럼 그것을 보려고 수십 수백만 원을 내고 기웃거린 남자들이나 모두 지탄받아 마땅하다. 경찰 발표에 의하면 N번방 가입자의 명단을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필자가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이들 중에 어떤 이들은 기독교 신자이며 직분 자일 것이라는 점이다. 익명성이 보장되는 인터넷 공간으로 인해서 이런 범죄에 빠진 그리스도인들이 적지 않을 것은 쉽게 예상된다. 성은 인간이 가장 통제하기 힘든 욕망이며 가장 사회화될 수 없는 욕망이기도 하다. 이런 인간의 연약함을 알았던 바울도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전 7:2)고 권면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아내를 둘 수 있는 형편이 아니고, 아내나 남편이 있더라도 원만한 성생활이 이뤄지는 것도 아니다. 이런 현실을 감안하면, 이런 범죄를 부르는 내면의 심리가 무엇이며, 신자는 무엇으로 이것을 예방하고 벗어날 수 있는지를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런 심리를 잘 보여주는 연구 조사가 하나 있다. 미국 보스턴 지역의 성 구매 남성 101명과 비 구매 남성 101명을 대상으로 각각 두 시간씩 면접 조사를 한 결과에 의하면, 성 구매자들은 비 구매자들과 비교하여 성매매 여성의 감정 상태를 예측하지 못하는 특성을 보였고, 여성들의 실제 느낌과 벗어난 감정 상태를 표현했다. 이것은 성 구매자들이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의 성매매를 하는 이유이며, 동시에 그들의 호색적인 특징이 폭력적이고 지배적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박사방 운영자는 고액 아르바이트로 어린 여성들을 유인한 후 그들의 주민등록증을 통해 정보를 캐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지인들에게 알리겠다는 협박으로 그녀들을 수렁에 몰아넣었다. “협박”으로 대표되는 그의 성격적 특성은 이런 공격적이고 지배적인 특성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의 관계 방식은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를 띠고 있다. 성이 사디즘과 마조히즘과 같은 변태적 문제를 일으키는 것 역시 이런 성향과 무관하지 않다.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였던 스캇 팩은 ‘거짓의 사람들’에서 마귀의 핵심적인 심리를 자기애라고 밝혔다. 자기애란 소통은 없이 타인을 대상화하고, 그 대상을 통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의 필요를 채우는 일종의 “인간 소비”라 할 수 있다. 이들에게 타인과 하나님은 그저 자기 욕망의 대상이며 소비의 대상에 불과하다. 이런 태도가 N번방 사태를 관통한다. 그 30만 명은 누군가의 아버지이고 남편이었을 것이다. 자기 딸 같은 아이를 보고도 공감과 소통의 반응은 없이 자기 욕망의 대상으로 소비하는 형태가 도덕적 무감각을 만들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방법은 무엇인가? 단지 금욕이 답이 될 수는 없다. 우리 몸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으며, 그 문제에서 넘어져도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제대로 된 지식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몸이 지닌 성적 지향과 에너지들을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에 맞게끔 잘 흐르도록 해야 한다. 예컨대, 어거스틴은 ‘그리스도교 교양’(De Doctrina Christiana)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성경해석의 목적이라면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이바지하지 않는 해석을 하는 사람은 아직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했다. 제대로 성경이 이해되지 않는데 그것이 삶에 반영될 리가 없다. 예수님께서도 율법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셨다. 신앙생활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삶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가 사람 편에서의 삼위일체적인 구조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사랑의 교제를 나누시는 곳에 우리는 성자 예수를 통해서 초대받은 것이다. 성부와 성자 간 사랑의 교제, 그리고 그 교제를 중재하시는 성령의 연합을 따라 우리도 성자 예수와 연합하고, 그 안으로 들어감으로 성부와 사랑의 교제에 초대를 받았다. 창조주이신 삼위 하나님께서도 관계적 존재이시다. 성부는 성자를 사랑하셨다(요한복음 3:35, 15:9, 17:23). 성자도 성부를 사랑하신다(요한복음 14:31). 그렇게 영원 전부터 성부와 성자는 사랑의 관계에 계셨고 우리를 그 관계로 초대하셨다.(요한복음 15:9) 성부와 성자의 이런 사랑의 관계는 성령의 중재를 통해서 드러난다(누가복음 3:22). 성적 문제들은 대부분 관계적 위기에서 비롯된다. 로마서 1장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부정했던 사람들에게 나타난 대표적인 죄가 성적인 무질서였다. 원래 성적 에너지는 관계적 에너지다. 동시에 다른 것으로도 쉽게 변환되는 에너지이기도 하다. 운동으로도 성 에너지는 발산이 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 에너지는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관계적 에너지다. 단지 영혼뿐만 아니라 우리 온몸과 온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관계의 확장과 실천이 그 해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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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는 세계 기독교를 어떻게 섬길까?
by 옥성득
2020-03-27
1차 대전이 끝나고 국제화 바람과 함께 스페인 독감이 유행하면서 20세기 국제 질서가 바뀌었다. 100년이 지난 올해,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유행하는 세계적 전염병(pandemic) ‘코로나19’는 21세기 대전환을 예고하고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유럽과 미국에서 맹위를 떨치며 사망자가 급격히 늘어나자, 먼저 경험한 중국과 한국의 사례를 주시하며, 특히 한국을 모델로 삼아 지역을 봉쇄하는 등 사태 극복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전염병으로 문명사의 전환기를 맞이한 오늘, 한국의 방역 모델이 세계에 통한다면, 과연 전염병을 대처하는 한국 교회 모델도 세계 교회에 통할 수 있을까?한국의 투명하고 민주적인 항바이러스 모델지난 2주 동안 각국의 정치 지도자나 방역 책임자들은 ‘코로나19’와의 전쟁에서 중국과 한국 중 어느 쪽을 모델로 할 것인가를 논의했다. 동아시아 3국 중에서 올림픽에 매달려 환자 수를 은폐한 것으로 의심되는 일본은 의료 후진국이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은 언론 통제, 환자 인권 무시, 도시의 강제 봉쇄를 통해 환자 수를 줄일 수 있었다. 반면 한국은 보편적 의료 보험과 발달한 기술을 이용하여 대량의 신속한 검사와 투명한 정보 공개를 했다. 그리고 초중고 임시 휴교, 대학 온라인 강의, 교회 온라인 예배, 상가 폐쇄 등의 비약물적 대응을 병행하면서 우수한 의료진과 시설을 통해 완치자를 늘려 의료 체계의 우수성을 증명했다. 무엇보다 시민 개개인이 방역의 주체로 위생 수칙을 지키고, 물리적 거리 두기를 실천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공유하게 된 재난에 대한 공동체 의식으로 사재기를 하지 않고, 방역에 자원봉사로 나서는 건강한 시민의식을 보여주었다. 이는 국민 생명 보전과 경제 활동 유지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모델이다. 이 모델은 준비(의료 보험, 의료시설, 의료진, 방역 관료)와 기술(IT 산업, 의학기술)과 국민 의식의 3박자가 들어맞아야 하므로, 다른 나라에서 바로 선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최선의 모델이다. 미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는 당장 손쉬운 것, 강력한 정부의 통제와 봉쇄에 의존하는 중국식 모델을 택했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 모델을 배우기 위해서 발 벗고 뛰어오고 있다. 만일 한국이 없었다면 세계는 국가주의 모델로 가면서 자유와 민주, 경제 안정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국이 팬데믹 시대에 세계 민주주의의 첨병이 되었다.위생 오리엔탈리즘의 종언이로써 지난 150년간 주도권을 잡아 온 서구의 오리엔탈리즘(Western Orientalism)과 그를 모방한 일본의 이중적 오리엔탈리즘(서구의 오리엔탈리즘에 일본 제국주의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으로 한국과 중국을 바라보는 동아주의 Pan-Asianism)의 시대는 종언을 고했다. 과거 한국을 소개한 그리피스(William E. Griffis)의 Korea, The Hermit Nation(1882)과 1883년 로웰(Percival Lowell)의 Chosőn the Land of Morning Calm(1883)은 “떠오르는 태양의 나라”인 일본과 비교하면서 한국을 우물 안의 은둔국, 잠자는 미개국으로 비하했다. 정치는 불안하고, 관리는 타락했고, 경제는 가난 속에 정체되었고, 사람들은 더럽고 게으르며 미신적이라고 묘사했다.일본은 이를 모방하여 야만과 불결의 땅 한국은 일본이 식민지로 만들어 계몽하면 근대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 일본 작가는 1898년 일본 도쿄의 긴자 거리와 시궁창에서 돼지가 노는 서울의 불결한 이미지를 대조했다. (사실 서울은 이듬해 도쿄보다 먼저 전차를 개통시키면서 근대 도시로 탈바꿈하던 때였다.) 이제 그런 제국주의의 시대 위생 오리엔탈리즘의 시대는 역전되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 일본이나 서구의 여러 나라가 위생 후진국이 되었지만, 한국은 전염병 방역 체계를 선도하는 나라가 되었다. △1898년 일본 화가가 그린 서울의 왜곡된 모습과 2020년 서울의 드라이브 스루 선별 진료소세계 기독교 시대 한국 기독교의 모습은?1984년 전후에 남반구의 기독교 인구가 북반구의 기독교 인구를 능가하기 시작하면서 세계 기독교(world Christianity) 시대가 열렸다. 기독교의 무게 중심이 서구에서 비서구로 이동한 탈서구 기독교(post-Western Christianity)의 한 무게 중심인 한국 기독교가 과연 팬데믹으로 고통받는 지구촌과 세계 기독교에 희망이 될 수 있을까?일부 교회는 예배나 기도회를 지속하면서 바이러스 차단의 훼방꾼 이미지를 심기도 했다. 정부가 온라인 예배를 권고하자, “술집은 영업하는데 왜 교회만 문을 닫아야 하는가?”라며 교회의 공공성을 무시하고 사설 영업소와 동일시하기도 했다. “우리는 자영업자랑 똑같아. 예배 몇 번 건너뛰면 문 닫아야 해"라고 말하는 자칭 자영업자 목사도 있다.그러나 다수의 교회는 위생 수칙을 준수하고 온라인 예배를 드리면서 적극적인 디아코니아 사역에 나섰다. (1) 유명한 대형교회들이 앞장서 수양관을 경증환자 입원시설로 제공했다. (2) 많은 교회가 방역진과 의료진에게 성금을 전달하고 커피와 빵을 대접했다. (3) 대전의 한 교회는 대구의 중증장애인들을 위해 속옷을 제공하고,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제작한 마스크를 제공했으며, 교인 중에 월세를 내지 못하는 자들을 파악해서 도왔다. (4) 평택의 한 교회는 마루 공방에서 수제 마스크 수천 개와 손 세정제 수백 개를 제작해서 지원했다. (5) 상가의 방역 지원, (6) 외국 유학생에게 마스크 전달 등을 했다. 또한 교회 간의 코이노니아 사역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분당의 어떤 교회는 700개 미자립 교회의 월세를 대납하기로 했으며, 많은 교회가 작은 교회의 온라인 예배 시설과 방송을 지원하는 등 교회가 하나 된 모습을 보였다.이제 재난은 밀려오고 세계적 전염병은 토착화하면서 주기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교회는 전도와 예배만 영적인 일로 여길 것이 아니다. 사회와 세상의 치유, 방역, 자비 사역도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임을 깨닫게 되었다. 나아가 바이러스와 싸우는 영성으로 교회 내의 성범죄, 성차별, 세습, 설교 표절과 전투하고, 사회 정의와 평화를 위해 부조리한 악과 싸우는 정의의 십자군들도 양성해야 할 것이다. 오랫동안 한국 교회의 방향은 교회 성장을 위해서였다. 이제 팬데믹 시대에 새로운 선교적 교회 모델을 세계 기독교 앞에 내어놓자. 건물을 짓는 해외 선교가 아니라, 세상과 세계 교회를 살리는 영적 프로그램을 수출하는 한국 교회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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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진정한 공교회를 생각할 때
by 정요석
2020-03-26
여러 언론 매체들이 불교계의 스님 환자는 한 명도 없다고 보도했다. 이에 비하여 개신교는 성남의 어떤 교회를 비롯해 많은 확진자가 나온다고 했다. 왜 불교와 천주교보다 개신교에 확진자들이 많이 나올까? 그 이유를 개신교 교회는 목사 개인의 운영으로 인해 전체적인 통제가 취약하지만, 불교의 사찰과 천주교의 성당은 중앙에서 통제가 되기 때문이라고 언론은 분석했다. 불교계 대표 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은 총 3번에 걸쳐 모든 법회와 행사를 중단하라는 공문을 보냈고, 전국 24곳의 교구 본사와 각 사찰이 잘 지키고 있다고 말했다. 조계종은 불교 최대 명절인 초파일 행사 일정을 4월 30일에서 5월 30일로 한 달간 연기했다. 불교계 내부에서도 강력한 반대와 논쟁이 있었겠지만, 국가적 재난극복이란 차원에서 결단이 이루어졌고, 모든 사찰이 중앙의 결정에 따르고 있다.한국 천주교는 236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미사를 전면 중단했다. 3월 19일에 한국 천주교주교회의는 지역 상황에 맞춰 교구장의 재량에 따르면서도 정부 방침을 적극적으로 반영하여, 초중고교 개학일인 4월 6일 즈음 미사 재개 일정을 정하기로 했다. 이런 중앙의 결정을 일반 성당들이 잘 따르고 있다.이에 비해 개신교는 개별 교회의 권한이 강해서 교회당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교회도 있고,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교회도 있다고 보도했다. 언론은 재정의 어려움을 겪는 소규모 교회들은 주일에 헌금을 걷기 위해 주말 예배를 거행하는 비율이 높다고 덧붙였다. 어떤 언론은 지방 정부가 여의도순복음교회와 같은 대형교회에 전화해서 소규모 교회들의 임대료 납부를 도와서 주말 예배가 열리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했다는 소식까지 전했다.개신교에 중앙 조직이 없는 것이 아니다. 총회와 노회가 있다. 총회와 노회에서 정한 결정을 각 지교회들은 충실히 잘 따르고 있다. 문제는 개신교가 여러 교파와 교단으로 분열된 것이다.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오순절교 등으로 나뉘었고, 각 교파는 또 여러 교단으로 나뉘었다. 한국의 대표적 교파인 장로교는 무려 200개 이상의 교단으로 나뉘어 있다. 그래서 많은 교단의 총회와 노회에서 정부 방침에 협조할 것을 결정해도, 다른 교파와 교단들이 문제를 일으키면 개신교 전체가 비난을 받게 된다.천주교는 다른 교파와 교단이 없다. 천주교에서 이단이 나와도 교파와 교단으로 형성되지 않고 개인 몇 명의 문제로 국한된다. 그런데 개신교는 신천지와 같은 이상한 집단이 수십만 명의 규모로 성장하기까지 한다. 별의별 신학과 신앙을 가진 교파와 교단들이 존재하고, 이들에 대하여 다른 교파와 교단이 간섭하거나 영향을 미치기 힘들다. 70명이 넘는 확진자가 나와 큰 물의를 일으킨 성남 은혜의강교회는 한국독립교회선교단체연합회 소속인데, 이 연합회는 명칭 그대로 교회들이 독립적으로 행하는 것을 보장하는 조직체이므로 강한 영향이 없고, 간섭할 수도 없다.건전한 교단들은 소속된 교회에게 바른 내용의 결정을 전달하고, 지교회들은 충실히 따르고 있다. 코로나19 감염 예방을 위한 정부의 7대 수칙도 잘 따르고 있다. 그런데 건전하지 못한 일부 교회들, 즉 정상을 벗어난 일부 지교회들과 목사들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개신교의 부끄러운 점은 지교회들 간에 재정 차이가 크다는 것이다. 지교회들이 천주교처럼 평균을 이루지 못하고, 개교회주의가 되어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정부의 주일 예배 제한에 대하여 적지 않은 교회와 목사들이 반발하는데, 반발하는 대부분은 정부의 7대 수칙을 잘 따르는 분들이다. 정부가 문제 삼는 것은 이렇게 잘 따르는 교회들이 아니라, 정부 방침에 협조하지 않는 소수의 몇몇 교회들이다. 전염병이라는 것은 슈퍼 전파자 몇 명만 있으면 지역감염수준으로 빠르게 퍼진다. 게다가 신천지 집단이나 몇몇 교회처럼 밀접하게 모여서 예배를 드리면 슈퍼 전파자들이 대거 양산되어 전국으로 퍼질 수도 있다.정부의 주일 예배 제한을 종교탄압이라며 반발하는 일부 목사들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되지만, 그러기에 앞서 개신교의 분열과 조직의 질서가 없는 것에 대하여 반성해야 한다. 정부는 천주교와 불교 등과 대화할 때는 연락할 중앙 기관이 분명하지만, 개신교는 특정할 수 없어 곤란을 겪는다고 한다. 어느 교파, 어느 교단에 연락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개신교는 늘 교파와 교단으로 이루어진 연합기관을 만들어 정부 등을 상대해왔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연합기관마저 분열되고 있다. 이권과 권력과 이념에 빠져 통일된 공신력을 확보한 연합기관을 갖지 못한 것이다. 개신교는 천주교를 개혁하겠다고 나왔지만, 최소한 교파와 교단의 분열과 교회 간의 빈부 격차 면에서는 천주교보다 못하다.코로나19 감염 방역을 위해 정부는 교회들에 소독액과 분무기 등을 제공하고, 각 교회의 주일 예배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 정부의 도움 없이 개신교 자체가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개신교에는 이렇게 할 수 있는 행정과 재정 능력이 부족하고, 의지 자체도 약하다. 개신교는 정부가 교회에 내린 여러 지침에 대하여 비판과 변호도 해야 하지만, 동시에 일탈한 몇몇 교회들을 자체적으로 통제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며 개선방법을 찾고자 골몰해야 한다. 개신교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행정 능력과 신뢰받는 연합기관을 갖추지 못하면 유사한 일들이 계속 발생할 것이다. 정부가 나서서 큰 교회들에게 작은 교회들을 도와주라고 당부했다니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정부가 교회들을 돌아다니며 7대 수칙을 지키는지 살피기 이전에 개신교가 자체적으로 교회들을 점검하고 안내한다면 개신교는 사회의 신뢰를 얻을 것이다. 일반인은 일그러진 교회들도 똑같은 교회로 여긴다. 우리에게 억울한 면이 있지만, 우리의 관점보다 그들의 관점에 서서 그들의 요구를 경청하고 대응하려고 해야 한다. 이것이 진리와 사랑을 가진 신자들이 이웃을 넉넉하게 대하는 자세일 것이고, 이런 노력이 쌓일 때 개신교는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어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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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암을 재평가할 수 있을까요?
by 배경락
2020-03-25
장면 3. 모세에 맞서는 미리암홍해의 기적을 맛본 우리는 함께 기뻐 춤추며 노래하였습니다. 이제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가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홍해의 기적을 경험한 우리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습니다. 광야 생활은 만만치 않았습니다.광야에서 뜨거운 모래바람이 불어오면 앞으로 나아가기 정말 힘들었습니다. 눈을 뜰 수가 없어 우리는 바람을 등지고 뒷걸음치며 걸어야 했습니다. 바람이 불 땐 눈, 코, 입으로 모래가 들어와 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여기저기서 불평이 터져 나왔습니다. 아무도 이럴 줄은 몰랐습니다. 행군 속도는 늦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식량도 바닥을 보이자 다들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면서 웬만한 고생은 다 해보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백성이 먹을 것을 요구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모세는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하나님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은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사실 60만 명을 이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모세, 아론, 저는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미 애굽의 제국주의를 경험하였습니다. 한 사람이 독재하면 백성이 얼마나 고통받는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평화와 평등으로 가득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였습니다. 우리는 백성의 장로 70인을 불러서 그들에게도 리더십을 주기로 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이 일을 기뻐하셔서 70인 장로에게도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었습니다. 그러자 칠십 명의 장로도 모두 예언하였습니다(민 11:24-25). 심지어 함께 있지 않은 엘닷과 메닷도 여호와의 영이 임하여 예언하였습니다(민 11:26). 이제 하나님의 나라는 독재하는 전제국가가 아닙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이 함께 마음을 모아서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후일 이스라엘이 12지파 연합 공동체가 된 것도 어떻게 해서든 제국주의만큼은 피하자는 뜻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새로운 질서, 새로운 리더십, 새로운 국가를 향하여 나아갈 것입니다.1)이때 모세를 섬기는 여호수아는 강력히 반발하였습니다. 그는 모세를 중심으로 하나 되기를 원했습니다.“나의 주인 모세여! 저들을 말리셔야 합니다!”(민 11:28, 메시지성경)그때 지혜로운 모세는 대답하였지요.“네가 나를 위해 시기하는 것이냐?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 다 예언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하나님께서 모든 백성에게 그분의 영을 내려주셨으면 좋겠다.”(민 11:29, 메시지 성경)모세와 아론과 저는 이스라엘이 만들어가야 할 나라에 대해 마음을 같이 했습니다. 그래도 마음속에 한 가지 걱정이 있었습니다. 일인이 지도하는 체제를 주장하는 여호수아와 구스 여인 십보라가 모세 곁에 항상 있었기 때문입니다.2)십보라의 아버지이자 미디안 족속의 족장인 이드로가 방문했을 때, 그는 애굽의 정치제도와 흡사한 계급제도를 만들라고 모세에게 권면하였습니다. 그는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 제도를 소개했습니다(출 18:24-25). 그건 명백히 계급제도(hierarchy)입니다. 십보라와 여호수아는 이스라엘도 애굽처럼 계급제도를 만들어서 일인이 지도하는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계속하여 설득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세워갈 나라의 방향성과는 반대입니다.아론과 저와 70인 장로는 이 문제가 심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제일 연장자이고 모세의 누나인 저에게 대표가 되어 모세에게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모세는 누나를 존경하고 잘 따르니까 그렇게 하라는 거였지요. 저는 모세의 리더십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은 분명히 하고 싶었습니다. 부족하지만, 제가 나아가 모세에게 말하였습니다.“구스 여인 십보라와 여호수아가 뒤에서 일인 지도체제를 이야기하는 것을 저희가 알고 있습니다. 만일 이스라엘이 계급제도를 갖춘다면 그건 애굽과 똑같아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애굽에서 나온 이유는 애굽과 다른 나라, 평화의 나라, 하나님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이미 70인의 장로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셔서 예언하게 하신 일을 기억하십시요.”3)모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하는 말이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달랐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 그리고 저를 따로 불러내어 말씀하셨습니다.“모세는 다른 지도자들과 분명히 다른 영적 지도자이다. 그러므로 너희 두 사람은 모세를 잘 받들어 이스라엘을 다스려 나가야 할 것이다”저는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우리도 모세의 지도력을 부인하거나 시기하려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다만 이스라엘의 장래를 걱정하였던 것입니다.4)불행한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습니다. 여러분이 아실지 모르겠지만, 고대에는 피부병이 많이 발생하였습니다. 진영에 피부병이 한 번 돌면 많은 사람이 자가 격리를 하며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환자를 돕는 일은 온전히 여자들의 몫이었습니다. 저는 광야로 들어선 이후로 많은 환자를 만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치료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저는 제가 피부병에 전염되었다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하필 그즈음 저에게 피부병이 생겼습니다.5)제가 걸린 피부병은 전화위복이 되었습니다. 잠시나마 모세, 아론, 제가 갈등과 불화한 것처럼 보였지만, 저의 피부병 덕분에 세 명은 다시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아론은 모세에게, 모세는 하나님에게 제 피부병이 낫기를 간절히 구하였지요. 저는 율법이 정한 대로 진영 밖에서 일주일간 자가 격리하며 지냈지만, 하나도 외롭지 않았습니다. 때마다 천막 앞에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 도움의 손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장로와 백성은 제가 치료받기까지 한 명도 행진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6) 제가 완치되어 다시 진영으로 돌아올 때 백성은 크게 기뻐하며 저를 반겨 맞이하였습니다.장면 4. 미리암의 죽음과 그 후저의 죽음은 민수기 20장 1절에 짤막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는 법입니다. 하지만 저를 비방하는 사람은 끊이지 않고 계속 나오더군요. 대부분 남성 구약학자들이었습니다. 제가 모세를 시기하고 질투하다가 명예욕에 사로잡혀 모세를 비방한 것이라고요. 90이 넘어 죽을 날이 가까운 제가 무슨 권력을 탐하였길래 그렇게 해석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이 저를 오해하고 욕하는 것을 알지만, 저는 섭섭하지 않습니다.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여성이 멸시와 천대를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지요. 저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서 저를 알아주시고 인정해 주시기를 소망할 따름입니다.하나님은 그런 저의 마음을 아시고 이스라엘의 족보를 이야기할 때마다 제 이름을 빼놓지 않고 꼭 넣어주시더군요. 민수기 26장 59절과 역대상 6장 3절이 대표적인 구절입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도 모자라 미가 선지자를 통하여 저의 명예를 완전히 회복해 주셨습니다. 제가 죽은 지 몇백 년이 지났지만, 하나님은 저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말씀은 이러합니다.“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종노릇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네 앞에 보냈느니라”(미 6:4).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 세 명의 공동 지도자(co-leader)를 세우셨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맡았던 역할을 자세히 기록하진 않았지만,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선지자로 인정하셨고(출 15:20) 백성을 이끌어 하나님을 찬양하게 했던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제가 꿈꾸었던 평화와 평등의 나라가 되지는 못했지만,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고 완성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믿는 여러분 모두를 기다릴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 나라에서 뵐 때까지 주 안에서 승리하십시오. 안녕히 계십시오.___________1) 최종원은 “새로운 지도자에 대한 개념은 예언 현상을 통하여 새롭게 정의된다. 예언자적 권위가 특정인에게 전달되고 모든 일반 백성에게로 확장된다는 것은 분명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상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은 요엘서의 예언자적 사고와 비교될 수 있다.”“이 사고는 일반적으로 ‘평민 공동체’ (Laien -Gemeinde)를 지향하는 신명기 신학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최종원, ‘소위 “불평”이야기의 문맥 안에 있는 예언자적 현상에 관한 연구’, 구약논단 제22권 3호 통권 61집, 105-136, p111-112)2) 구스 여인이 에티오피아 여인이었는지, 아니면 십보라를 지칭한 말인지 분명하지 않다. 모세가 80이 넘은 나이에 새롭게 젊은 구스 여자와 결혼했다는 것은 정황상 맞지 않다. 오히려 하박국 선지자는 미디안과 구스를 같은 지역으로 보고 예언을 한다(합 3:7). 이로 구스 여인을 십보라로 볼 수 있지 않을까?3) 유진 피터슨은 중립적인 견해로 이 본문을 해석하였다. “(모세가 아내로 맞아들인) 구스 여인 때문에 미리암과 아론이 뒤에서 모세를 비방했다. 그들이 말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만 말씀하시느냐? 우리를 통해서도 말씀하시지 않느냐?” 하나님께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셨다.”(민 12:1-2)4) 왕대일은 민수기 11장에서 지도력을 분배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민수기 12장 1,2을 해석해야 한다고 하였다(왕대일, ‘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년 기념 성서주석 민수기’,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2007년, p309).5) 피부병의 특성은 체내에 세균이 들어간 후 당장 밖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적어도 한 달부터 3달까지의 잠복 기간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미리암의 피부병은 환자들을 대하며 치료하다 옮긴 것이라는 연구도 있다(정숙자, ‘출애굽 이야기에 나타난 여성폭력 극복’, 한국 여성신학 제58호, 2004.10, 64-72 p70). 6) “이에 미리암이 진영 밖에 이레 동안 갇혀 있었고, 백성은 그를 다시 들어오게 하기까지 행진하지 아니하다가”(민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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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보라
‘코로나19’와 디지털 교회
by 박용기
2020-03-24
2020년 3월 전 세계는 ‘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자가격리, 재택근무, 온라인 예배가 낯설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직장인은 이메일, 컨퍼런스콜, 온라인 영상 회의로 소통하며 재택근무를 한다. 가족 구성원들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주부들은 식사 준비와 자녀 교육으로 분주하고, 자녀들은 개학이 연장되면서 집에서 헤드셋으로 친구와 대화하면서 게임을 한다. 미국은 3월 중순부터 코로나19 확진자가 급속하게 증가하여 현재 1만 5천 명을 넘어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3월 13일 ‘국가비상사태’(National Emergency)를 선포했고, 주별로 250명에서 50명 이상의 집회 금지 행정명령이 내려졌다. 지난 월요일(16일)에 미국 행정부는 앞으로 15일 동안 10명 이상의 모임을 피하라고 권고했다. 이로 인하여 많은 미국 교회들은 3월 22일부터 예배당에서 모이지 못하고 온라인 예배를 드려야 한다. 이런 특수한 상황에서 교회는 그 본질적 기능을 완수하기 위해서 어떻게 디지털 리소스들을 활용해야 할까? 1. 온라인 예배를 영과 진리로 드리자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예배를 어느 장소에서 드려야 하는지 예수님께 질문했다. 우리는 예배를 어느 장소에서 드려야 하는지에 관심이 많다. 예수님은 그 질문의 대답으로 특정 지리적 ‘장소’ 보다 ‘영과 진리’(in the Sprit and in true)안에서 아버지(the Father)께 예배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눅 4:20, 23-24).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 아버지이시며, 그 방법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이다. ‘영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란 ‘성령님’의 조명하심으로 ‘진리 되신 예수님’을 구원자로 고백하며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예배이다. 예배자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면 어느 장소에서든 예배가 가능하다. 재난의 상황에서 교회는 사회적 책임과 안전수칙을 준수하면서 다양한 형식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예배당에 모여서 예배드릴 수 있다. 온라인으로 예배드릴 수 있다. 모두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이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이런 예배 형식을 존중해 주는 넓은 마음이 필요하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성도들의 모임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주일 오전에 온 가족이 집에서 온라인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은 평안할 때는 경험하지 못했던 축복으로 볼 수 있다. 예배당 안에서 경험했던 그리스도의 임재를 가정, 골방, 직장에서 누리는 기회로 삼자.2. 디지털 자료를 공유하자미국에서 코로나19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각 교단 총회, 선교단체, 기독교 대학 등에서 코로나19 대처를 위한 다양한 디지털 자료를 공유하고 있다. 미 남침례교출판사 라이프웨이(Lifeway)는 코로나19 대처를 위한 다양한 디지털 리소스들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https://ministrygrid.com/coronavirus). 휘튼대학교와 빌리그래함센터와 새들백교회는 함께 웹사이트를 개설(https://coronavirusandthechurch.com)하고, 코로나19 대처를 위한 팟캐스트, 웨비나(Webinar)를 비롯한 다양한 자료를 업데이트하고 있다. 웨비나는 웹 세미나의 줄임말로 공간적 제약 없이 여러 사람이 소통하며 양질의 정보를 제공하는 온라인 세미나이다. 재난의 상황에서 인력이 부족한 작은 교회들은 재정적 도움도 필요하지만, 위기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정보도 필요하다. 텍사스침례교단(BGCT, SBTC) 홈페이지에는 재난 상황에서 교회의 대처, 예배 생방송 방법, 디지털 목양. 디지털 소그룹, 교회학교 자료, 홈스쿨 자료 등을 신속하게 업데이트하고 있다.작은 교회도 긴급 상황에서 유튜브, 페이스북 라이브, 카카오 TV 같은 플랫폼으로 온라인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카카오 라이브 톡 기능을 사용하면 최대 30명까지 생방송 예배를 진행할 수 있다. 유튜브 라이브 방송을 위해서 프리즘(PRISM Live Studio) 앱을 설치하면 스마트폰에서 직접 예배를 생중계할 수 있다. 줌(Zoom)은 무료 화상회의 소프트웨어로 멀리 떨어진 사람들과 최대 100명까지 서로 얼굴을 보며 모임을 할 수 있다. 최근 코로나19로 북미, 이탈리아, 스페인 등의 국가에서 화상회의 앱 사용이 급증하고 있다.3. 온라인 소그룹을 시도하자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얼굴 보기를 간절히 원했다. 바울이 얼굴 보기 원했던 이유는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굳건한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해서이다.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함이라"(살전 3:10). 성도의 교제는 교회의 본질적 요소이다. 사도행전과 서신서에서 신약교회는 가정에서 소그룹으로 모여 떡을 떼고 가르침을 받고 함께 기도했다. 신약교회는 이러한 소그룹 모임을 통해서 성도들의 믿음을 굳건하게 세워갔다. 교회는 코로나19와 같은 사태를 다시 만날 수 있다. 위기의 순간에 소그룹(다락방, 목장, 구역, 목장, 셀 모임)을 중단하는 것보다는 디지털 리소스를 선용하여 모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재난의 상황에서 무슨 온라인 소그룹이냐? 라고 반문할 수 있다. 재난의 상황에서 세상 사람들은 재택근무를 한다. 미국 대학들은 2020년 봄 학기 수업을 온라인 수업으로 전환하고 있다. 필자가 사는 지역 공립 중고등학교는 4월 10일까지 가정 온라인 수업(Virtual Home-Based Learning)으로 수업방식을 전환하고 있다.교회도 코로나19 시대에 안전하게 소그룹 모임을 할 수 있도록 변화해야 한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화상회의 앱인 줌(Zoom)이나 스카이프(Skye) 앱, 구글 행아웃(Hangout) 등을 이용하여 각자 집에서 서로 얼굴을 보며 성도의 교제를 나눌 수 있다. 비록 화면이지만 서로 얼굴을 보고 주안에서 교제를 나눌 때, 성도들은 위로와 소망을 경험하게 된다. 새들백 교회는 이미 수년 전부터 약 1,000개 온라인 소그룹을 운영해 오고 있다. 예를 들면 주일 설교 말씀을 듣고 소그룹별로 준비된 질문지 내용으로 40분 정도 나누는 방식이다. 이런 소그룹을 통해서 새신자들이 교회 예배당으로 유입되고 침례를 받는 비율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 디지털 사각지대에 있는 성도에게는 전화심방으로 안부를 묻고 함께 기도한다면 큰 힘을 얻을 것이다.4. 온라인 합심 기도에 집중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말렉과 전투할 때, 모세의 기도 손이 올라가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기도의 손이 내려오면 아말렉이 이겼다(출 17:8-11). 국가적 위기의 상황에서 교회의 기도 손이 올라가야 한다. 코로나19와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 미국은 3월 15일 국가 기도의 날로 선포하고, 교회가 연합해서 나라를 위해서 기도했다. 싱가폴의 한 교회는 COVID 19:00 기도회 제안하고 매일 오후 7시에 온라인 기도회를 진행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기도하는 교회이다. 많은 한국교회가 긴급 온라인 기도회를 선포하고 매일 합심해서 기도하고 있다. 하루에 세 번 온라인 기도회를 진행하는 교회들도 있는데, 수천 명의 참여자가 동시에 접속해서 합심 기도를 한다. 규모가 큰 교회뿐만 아니라 작은 교회들도 합심하여 기도하고 있다. 한 개척교회 목사는 카카오 라이브 톡을 통해서 15명 정도 그룹과 매일 저녁 온라인 라이브 기도회를 하는데, 참여한 성도 대부분은 ‘요즘 우울한 소식밖에 없는데 이렇게 함께 온라인으로 만나서 말씀을 나누고 기도하는 것으로 큰 힘과 위로를 얻는다’라고 고백한다. 한국의 드라이브 스루(Drive through) 선별 진료소가 전 세계에 찬사를 받고 있다. 미국, 이탈리아, 영국, 독일에서도 한국의 드라이브 스루 방식을 도입하여 시행하고 있다. 한국 교회는 열심 있는 기도, 뜨거운 온라인 합심 기도로 코로나19를 통과하고 있다. 필자는 이렇게 열심히 온라인 합심 기도를 통하여 위기의 상황을 대처하는 방식을 ‘코리안 처지 프레이어 스루’(Prayer through) 방식이라고 부르고 싶다. 한국교회의 ‘프레이어 스루’ 방식은 전 세계 교회에 모범이 될 만한 사례이다. 이러한 기도의 능력으로 한국에서 코로나19 사태가 급진전 되고 있다고 믿는다. 한국교회의 기도운동이 온 세계 교회로 확산되기를 소망한다. 5. 온라인 헌금으로 선행에 동참하자 세계적 큰 흉년(a great famine over all the world) 때문에 안디옥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는 함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행 11:28). 안디옥 교회는 본인들도 힘들 텐데 예루살렘 교회가 더 어렵다는 소식을 듣고 구제헌금을 모아서 바나바와 사울을 통해서 예루살렘교회에 전달했다(행 11:28-30). 세상 사람들은 이런 안디옥 교회 성도들을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행 11:26). 코로나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죄 바이러스로 감염되어 확진 판정을 받은 세상은 탐욕, 이기심, 자기 중심성으로 충만하다. 복음으로 죄의 바이러스에서 완치 판정을 받은 교회에 나타나는 증상은 섬김과 나눔과 희생이다. 복음은 신자들에게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 나눔과 섬김의 가치를 실현하며 세상 문화에 맞서게 한다. 코로나19 사태로 온라인으로만 예배드리는 가운데 분당의 한 교회는 14억 넘는 온라인 헌금을 대구지역 병원을 돕고, 개척교회 월세를 지원하고 있다. 강남의 한 교회는 한 주일 온라인 헌금 전액인 수억 원을 대구, 경북 지역에 기부했다. 수많은 교회가 함께 고통당하면서도 더 어려운 지역으로 사랑의 헌금을 보내고 있다. 재난의 상황에서 온라인 헌금이 예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필수적 도구로 자리 잡고 있다. 온라인 헌금으로 선행에 동참할 때 우리 사회에 코로나19의 두려움을 이기고 사랑의 복음을 확산할 수 있을 것이다.디지털 세계에 그물을 던지자 예수님께서 밤새도록 수고하였지만, 물고기를 잡지 못한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을 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았다(눅5:4-6). 21세기는 디지털 세계(digital world)이다. 코로나19 상황을 통해서 마치 예수님께서 한국 교회에게 전통적 방법만을 고수하지 말고 깊은 곳인 디지털 세계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시는 듯하다. 디지털 세계에 빠르게 적응한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넷플릭스 등은 모두 30년이 안 되는 신생 기업들이지만 21세기를 대표하는 기업들로 세상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복음의 본질은 변할 수 없지만, 복음을 담는 그릇은 그 시대의 문화에 맞게 변해야 한다. 코로나19 사태를 통해서 교회는 ‘가서 제자 삼으라’(go and make disciples)는 예수님의 명령을 기억하며 디지털 세계 한복판으로 나아가서 그물을 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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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라
by Jon Bloom
2020-03-23
열한 명의 제자가 부활한 예수님을 보았을 때, 지상명령을 받은 순간에도, 마태는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마 28:17)라고 전한다. 몇몇 제자들이 이 놀라운 광경을 의심했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놀랍지만 일리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위로가 된다. 왜냐하면 의심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형제자매들이 걱정할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의심”으로 번역한 그리스어(디스타조)는 흔들리며 주저하는 불확실성, 즉 일반적으로 자신감이 결여된 것을 의미한다. 무엇이 몇몇 제자들을 흔들리게 했는가? 마태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지 않지만 나는 주의 자비라고 생각한다. 의심하는 사람의 의심하는 내용은 그들의 경험과 기질에 따라 어느 정도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과 만난 낯선 만남은 그들이 일반적으로 경험한 일과는 전혀 달랐다. 기존의 모든 개념과 충돌하는 초현실적인 경험이었을 것이다. 의심하지 않는 것이 어쩌면 더 이상할 것이다. 의심하는 제자들학자들 사이에서 열한 명의 제자가 의심했는지 아니면 제자들과 동반한 사람 중에 의심하는 자들이 있었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 성경 본문은 열한 명을 가리키고 있는 듯하다. 의심은 부활하신 그날과 그날 이후에도 열한 명의 제자들과 더 많은 사람 사이에 존재했다. 우리는 도마가 예수님을 직접 보기 전까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던 것을 알고 있다(요 20:25-29). 열한 명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났을 때, 그들이 목격한 것을 믿기 어려워한 사실을 알고 있다(눅 24:36-43). 우리는 또한 더 많은 제자가 그들이 들은 부활의 소식을 의심했던 것을 알고 있다(눅 24:13-34).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사실은 예수님 제자들의 몇몇은 직접 보고 들은 놀라운 것들을 의심했다는 것이다. 우리 중에 누군가가 본 것과 들은 것, 경험한 것이 모두 사실일까 하고 의심하는 것, 흔들리고 주저하는 불확실성을 경험하는 것은 놀라울 만큼 특별한 일이 아니다.그래서 나는 예수님의 형제, 유다가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유 1:22)라고 쓴 것에 매우 감사한다유다의 자비짧은 유다서는 주로 거짓 선생에 대한 냉철한 경고이다. 요한의 편지나 베드로의 두 번째 편지와 히브리서처럼 유다는 우리가 왜곡된 복음과 복음으로부터 떠나는 것의 심각성을 느끼고 신실함으로 인내하기를 바랐다.맺음말에서 그는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라고 말한다. 유다는 의심이라는 말을 그리스 단어(디이아 크리노)를 사용하는데, 이는 흔들리는 불확실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다른 사전에서는 “자신과 대립한다”라고 정의한다. 다시 말해 경쟁적으로 진리를 주장하느라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에게 자비심을 가져라. 그들을 짓밟거나 비난하지 말고 도우라고 말한다.유다는 예수님이 어떻게 그에게 자비를 베풀었는지를 떠올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형제의 주장을 의심했을 때가 있었지만, 어느 순간 예수가 그를 도왔기 때문이다. 의심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자비를 베푸신 예가 많이 있다.예수님의 다양한 자비신약성서에서는 의심에 대해 여러 가지 다른 그리스 단어를 사용한다. 왜냐하면 모든 의심이 같지 않고, 모든 의심하는 자들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의심하는 자들을 향한 자비 또한 항상 똑같은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 인내심과 동정 어린 이해와 격려가 필요하다. 어떤 경우에는 권면하거나 심지어 질책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의심하는 자들에 대해 예수님의 다양한 반응을 살펴볼 수 있다.세례 요한마태복음 11장 2-6절에서 우리는 의심하는 자인 세례 요한에게 자비를 베푸신 예수님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태중에 있는(눅 1:41) 요한에게 특별한 계시로(요 1:29-34) 예수님의 정체성을 드러내셨다. 헤롯의 감옥에 갇혀 살아서 나오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상당한 영적 억압을 경험했을 요한은 선구자로서 자신의 소명이 맞는지 두 번째로 의심했다. 그래서 그의 제자를 예수께 보내 묻도록 하였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 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 11:3).예수님의 대답은 자비롭고 친절했으며, 그의 마지막 날에 요한의 믿음을 굳건히 하려고 하셨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신다(마 12:20). 그분은 고통과 고립의 어둠 속에서 우리를 괴롭히는 의심을 어떻게 부드럽게 다루어야 할지 알고 계신다.베드로마태복음 14장 28-33절에서 예수님은 다른 의심을 다른 방법의 자비로 다루신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으로, 폭풍우 가운데 물 위를 걷기 위해 배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께 가는 도중에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깨달았다. 사람들은 물 위를 걷지 못하는 것 말이다.!그는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을 잃었기 때문에 가라앉았다. 베드로가 소리친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마 14:30). 예수님은 그를 구하시고 꾸짖으셨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마 14:31). 예수님은 베드로(그리고 다른 제자들)에게 말씀을 향한 초점이 세상으로 옮겨지는 것의(그의 두려움에 나타난) 위험을 각인시키고자 하셨다. 집중적이고 끈기 있는 신앙을 요구하는 삶의 폭풍에서 우리를 공격하는 의심을 어떻게 단호히 다룰지 알고 계셨다.도마요한복음 20장 24-29절은 예수님이 제자의 의심을 다룬 가장 유명한 장면이다. 도마는 열 명의 제자들이 살아난 예수님을 보았다는 말을 듣고,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라고 하였다(요 20:25). 우리는 도마 내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도마의 의심은 세례 요한과 베드로와는 다른 것이다. 이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것을 의심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도마가 알았던 사람들의 목격자적 진술을 의심하는 것이다.예수님은 자비한 마음으로 기다리셨다. 그분은 비참하고, 외롭고, 어쩌면 두려웠을 8일이란 시간 동안 도마를 불신에 있도록 두셨다. 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언제 그리고 얼마간 우리를 의심 속에 두신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의심하는 존재냉정한 관찰자로서 의심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위의 세 가지 예에서 묘사된 종류를 포함하여 여러 종류의 의심을 잘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말하고 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의심에 대한 반응으로 예수님의 자비로운 격려와 자비로운 질책, 그리고 그의 자비로운 침묵을 받았다고 믿는다.우리는 어떤 모양이든 의심을 한다. 이는 당신처럼 나도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논리적인 생각을 하는 동시에, 오류투성이인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불확실성, 오류, 그리고 속임수가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끊임없이 무엇이 사실이고 아닌지 분별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나는 예민한 양심을 가지고 있기에 내 관점이 정확하고,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는가를 곧잘 의심하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 나는 야고보가 우리에게 경고한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에 익숙하다(야 1:6). 다른 사도들처럼 그의 경고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야고보의 형제 유다가 의심하는 자들과 목회자들에게 긍휼한 마음을 갖도록 한 것에 감사한다.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유 1:22). 그리고 예수님이 의심하는 자들에게 보이셨던 다양한 형태의 자비에 감사한다.우리의 자비믿음의 싸움은 힘들다. 어떤 형태건 의심은 힘겨운 싸움의 일부이다. 믿음에 위협적이고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유다 1:3)가 언제나 공격을 받고 있고, 우리를 겨냥한 “불화살”이 쏟아지고(옙 6:16) 있다. 믿는 자들은 오직 “희미하게 거울로 보고” “부분적으로” 아는 시대에 의심은 믿는 자들이 바른 방향을 설정하도록 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이 거울은 정말로 흐릿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그러니 의심하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자. 그들을 짓뭉개거나 비난하지 말자. 다른 의심에 대해 다양한 자비의 방식을(짓누르거나 비난하지 않는) 예수님으로부터 배우자. 그리고 조심스럽게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면서 자기를 지키는” 이곳을 디뎌보자(유다 20-21).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Have Mercy on Those Who Doubt번역: 송유희
영성
신앙과소명
의심
긍휼
자비
격려
질책
침묵
교회는 팬데믹에 어떻게 반응해 왔는가
by Glen Scrivener
2020-03-22
세상의 이목을 받지 못한 소외된 군중 사이에서 일어난 기독교 신앙이 어떻게 몇 세기만에 서구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을까?이 질문은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가 쓴 책 ‘기독교의 발흥’(The Rise of Christianity: How Did the Obscure, Marginal, Jesus Movement Become the Dominant Religious Force in the Western World in a Few Centuries?)에 달린 부제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기독교의 성장 요인을 다양한 측면에서 살펴보는데, 그중 한 요인이 바로 전염병이다. 정말로 ‘세상의 이목을 받지 못한 소외된 군중 사이에서 일어난 기독교 신앙’이 어떻게 발흥하게 됐는지를 이해하려면, 전염병의 확산에 교회가 얼마나 눈에 띄게 대처해 왔는지를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여기서 나는 지난 역사에서 일어난 네 번의 팬데믹, 즉 세계적인 전염병 현상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면서, 어떻게 교회가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그 현상에 대처해 왔는지를 설명하려고 한다. 이 각각의 사례를 살펴볼 때 (혹시 현시대와 상황 속에 우리 스스로 적응할 수 있는 길을 찾고 있다 하더라도) 그들의 신앙을 통해 다시금 우리의 신앙이 새롭게 고양되는 변화가 있길 소망한다. 왜냐하면 저들이 용기 있게 희생을 감수하며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다가간 모습은 그야말로 그리스도의 모습을 방불케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실현하고자 하는 사랑도 바로 그와 같이 큰 희생을 요구한다. 더불어 우리 자신이 병을 옮기는 당사자가 될 수도 있는 이 시대엔 저들이 보여 준 지혜가 더욱 사려 깊게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지난 역사를 살펴볼 때,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이끄셔서 바른 적용점을 찾을 수 있도록 도우시길 구한다. 동시에 우리 자신의 심령도 깨어나 믿음, 소망, 사랑을 추구하게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작금의 팬데믹을 겪는 우리 모두가 세상의 시선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그 지혜를 올바로 발휘하게 되길 소망해 본다.1.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디오니시우스(Dionysius)주후 160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가 로마 제국을 통치하던 시절, 전염병이 발생했다(혹자는 이에 대해 천연두라고 추정한다). 약 15년간이나 지속된 그 병은 제국의 4분의 1 내지 3분의 1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스타크의 추정에 의하면, 당시 기독교 인구는 4만 5천 명 정도였고, 이는 전체 인구의 0.08퍼센트에 불과했다. 이 미약한 수치에도 불구하고, 전염병 확산에 대한 교회의 대처는 세상의 칭송과 커다란 호응을 얻어내었다.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였던 디오니시우스는 이러한 보고서를 남겼다.“그리스도인이 된 우리 형제 중 대부분은 끝없는 사랑과 성실로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고 다른 이들만 생각하였다. 큰 위험을 무릅쓰고 환자들을 도맡아 온갖 필요를 돌보며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섬기다가 때론 저들과 함께 평온한 행복을 바라며 이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다름 아닌 이웃의 병환을 짊어지며 기꺼이 그 고통을 끌어안다 자기들까지 감염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형제가 그처럼 다른 이들을 간호하고 치료하다 환자들을 따라 죽거나 그들을 대신하여 죽음을 맞이했다.”이렇듯 ‘타인을 살리기 위해 죽음을 끌어안는’ 모습은 그리스도와 흡사했는데, 이는 교회 밖에 있던 다른 이들과는 극명한 대조를 보였다. 디오니시우스는 다음과 같이 글을 이어갔다.“그런데 이교도의 모습은 완전 달랐다. 그들은 누군가 병들어 아프기 시작하면 멀리 떠났으며, 가장 가까운 친구로부터도 도망쳤다. 죽음을 맞이할지 몰라 어디에도 관여하지 않거나 누구와도 사귀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모든 방법을 동원해 주의를 기울였으나, 그들이 죽음을 피해 달아나기는 쉽지 않았다”(유세비우스 교회사 7권 22장 7-10절).전염병은 죽음과 같은 인생의 귀로를 여실히 드러낸다. 또한 우리 모두가 죽음을 피할 수 없으며 약하고 덧없는 존재일 뿐임을 알려 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염병은 반문화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2세기 당시 교회도 그러한 모습을 세상에 보여 주며 저들의 칭찬을 얻고 그들로 하여금 회심케 만들었다. 이와 같은 모습이 한 세기 후에 다시 펼쳐지게 된다.2.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안(Cyprian)스타크의 추정에 의하면, 주후 251년 기독교 인구는 120만 명에 조금 못 미쳤는데, 이는 제국 전체에서 1.9퍼센트 정도에 해당했다. 2세기 때와 비교하면 놀라운 성장이었지만, 여전히 교회는 제국의 마이너 그룹에 속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타깝게도 또 다른 전염병이 발생해 교회의 앞길을 가로막았다.그 전염병은 아마도 홍역이 아니었을까 추측되는데,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질병이었음에도 사망률은 한 세기 전과 마찬가지로 매우 높았다. 그래서 이탈리아의 여러 마을이 버려졌고, 어떤 마을은 영원히 발길이 끊어지기도 했다. 로마의 군대와 기간 시설은 전반적으로 쇠퇴했다. 바로 이 시련의 한복판에서 또 다시 그리스도인이 빛을 발하게 되었다.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안은 이렇게 기록했다.“이 무섭고 치명적인 유행성 역병이 우리 가운데 정의로운 사람을 찾아내고 인간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드러내니 이 얼마나 시기적절하고 필요한 일인지 모른다. 건강한 사람이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일이든, 동족 간에 마땅히 그래야 하듯 서로를 신실하게 사랑하는 일이든 [중략] 의사가 환자를 버리지 않고 돌보는 일이든 간에 말이다.”전염병은 우리를 ‘수색한다’. 우리 안에 (자기만 보호하려는) 육신의 방식이 자리하고 있는지, 아니면 (자기를 희생하려는) 성령의 방식이 자리하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3세기에 발생한 그 전염병은 교회 안에 있는 자들, 즉 성령에 이끌려 앞선 주인이 걸어가신 길을 기꺼이 따르려는 자들을 세상에 드러내었다.그리스도인의 치사율은 일반인의 치사율보다 훨씬 낮았다(단지 10퍼센트 정도의 치사율을 보였다. ‘단지’라고 하기엔 그조차 안타까운 수치지만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이, 환자를 돌보는 자의 입장에서는 감염될 위험에 처하는 결과를 낳았고, 감염된 자의 입장에서는 생존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죽음에 노출시킴으로써 더 풍성한 생명을 누렸다. 전염병이 휩쓸고 지나갔지만, 그들은 더욱 강해졌다. 더욱 강력한 사회의 일원이 되어 더욱 많은 수가 생존했다. 그 회복력도 더 강했는데, 다름 아닌 죽음 앞에서도 확고한 소망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공동체로서도 더 강해져서 각자가 직면한 고통을 통해 서로에 대한 결속이 더욱 끈끈해졌다.이처럼 세상의 이목을 받지 못한 소외된 운동으로 시작된 기독교가 어떻게 주후 300년경에 이르러 6백만 명에 이를 정도로 성장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로드니 스타크는 전염병 확산이 그 주된 요인 중 하나였다는 답변을 제시한다.3. 비텐베르크의 마틴 루터(Martin Luther)14세기부터 흑사병이 유럽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불과 5년 만에 유럽 인구 절반이 사라졌고, 그중 도시 지역은 감염 상태가 더 심각해졌다. 이러한 역병은 이어지는 세기에도 반복적으로 발생했는데, 1527년 비텐베르크를 강타한 전염병도 거기에 포함되었다. 이에 수많은 자가 도망갔다. 그러나 루터와 당시 임신 중이던 그의 아내 카타리나는 남아서 아픈 자들을 돌보았다. 마태복음 25장 41-46절을 자신들의 지침으로 삼았기 때문이다.“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존중해야 한다. ‘내가 병들었을 때에 너희가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본문에 따르면, 우리는 서로에게 묶여 있어 누구도 고통 중에 있는 다른 사람을 버릴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람이 도움을 받고자 할 때 기꺼이 그를 돕고 거들어 줘야 할 책임을 안고 있다.”루터는 도망가는 일이 용인되던 당시의 상황을 언급한다. 그는 자기 의를 추구하는 우리 모두의 성향을 알고 있었기에 스스로와 다른 결정을 내린다고 타인을 판단해선 안 된다고 경고했다. 다만 자신의 신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겼다.“이제 우리만 몇몇 집사들과 더불어 남았으나, 그리스도 역시 함께 계시므로 우리만 남았다고 해선 안 되겠지요. 저 옛 뱀, 살인자, 죄악의 장본인인 사탄과의 싸움에서 그리스도는 반드시 승리하실 거요. 그분의 발꿈치를 저가 얼마나 상하게 하였든 말이요. 다만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기를 바라며”(1527년 8월 19일자 편지).여기서 우리는 루터의 사고 속에 사탄과 그리스도가 얼마나 뚜렷이 대조되고 있는지 주목해야 한다. 사탄은 처음부터 살인자며(여기서 루터는 창세기 3장 15절을 염두에 두고 있다), 전염병 배후에 있는 자로 인식되고 있다.그와 달리 그리스도는 훨씬 더 강력한 분으로, 훨씬 더 현재 상황 속에 깊이 관여하는 분으로 인식된다. 그분은 아픈 자들을 돌보는 이들 가운데 계시면서, 또한 아픈 자들 가운데도 계신다(마 25장). 또한 사탄과의 싸움에서 교회가 이겨 마침내 거머쥘 승리 가운데도 계신다. 그 승리에는 전염병에서 회복되는 일처럼 작은 의미의 ‘구원’ 사건까지도 포함된다. 이처럼 루터와 카타리나는 살아남아 그 극심한 시련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본을 보여 주었다.4. 런던의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1850년대까지 런던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부유한 도시였으며 인구도 2백만 명을 넘었다. 그러다가 1854년에 콜레라가 발생하며 런던 시민들의 마음에 공포감이 조성되었다.당시 스무 살밖에 되지 않던 찰스 스펄전은 뉴파크스트리트 교회(New Park Street Chapel)의 목사로 부름을 받아 영국의 수도로 가게 되었다. 훗날 그는 당시의 전염병이야말로 자기 자신과 런던이라는 도시를 알아갈 수 있는 중요한 모멘트가 되었다고 회고한다.“우리의 마음이 민감하게 각성되는 때가 있다. 바로 죽음이 도처에 널려있을 때이다. 내가 처음으로 런던에 왔을 때, 얼마나 깊은 절망 속에서 사람들이 복음에 귀를 기울였는지 떠오른다. 콜레라가 무서울 정도로 기승을 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는 가볍게 조소하며 설교를 듣는 이가 거의 없었다.”스펄전은 그 당시 죽음을 앞두고 있던 한 사람을 방문하게 된 이야기도 들려주는데, 그는 자신의 사역을 심히 반대하던 자였다고 한다.“그 사람은 생전에 나를 늘 조롱하던 자였다. 더 격하게 표현하자면, 나에 대해 위선자라고 하며 공공연히 비난하고 다닌 자였다. 그러던 그가 죽음의 화살을 맞게 되자, 곧바로 나를 찾으며 상담해 주기를 요청해 왔다. 그때 그의 마음속에는 내가 하나님의 일꾼이었다는 사실에 대한 일말의 의심도 자리하지 못했다. 비록 입술로는 그 사실을 고백하진 않았더라도 말이다.”세상의 기반은 늘 흔들리고 위태롭다. 하지만 그러한 위기는 종종, 인생의 진실을 드러내는 폭풍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스펄전은 당시 전염병이 수많은 이들을 휘몰아쳐 유일한 반석 되시는 그리스도를 찾아 도망치게 만드는 폭풍이라고 생각했다.오늘 우리는 어떠한가분명 이 시대는 이전과는 다르다. 그 차이가 있게 하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가령 현대식 병원이 등장하기 전에는 전문적으로 특화된 의료 시스템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또 앞선 세대는 환자를 돌보며 그 병이 어떻게 전염되는지에 관한 지식도 거의 갖추지 못했다. 환자를 돌보는 사람이, 심지어 아무 증상이 나타나지 않더라도 병을 옮기는 사람이 될 수도 있는데도 말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우리가 사랑하려는 대상에게 병을 옮기기보다 차라리 자가 격리하는 편이 사랑을 실천하는 최선의 방법일 수도 있다. 이처럼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은 시대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사랑 자체가 여전히 우리가 추구할 최고의 목표임에는 틀림이 없다. 자기중심적인 육신의 소욕이 아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하는 사랑이라면 말이다.그렇기에 우리는 세상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음을 사람들에게 일깨워 줘야 한다. 우리의 육신은 연약하고, 세계 시장은 불확실하며, 우리는 모두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 줘야 한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만이 폭풍을 잠잠케 하실 수 있으며, 반드시 그렇게 하시리라는 믿음 가운데 유일한 반석 되시는 그분을 세상에 전파하며 영화롭게 해야 한다. 나아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다가가며 진정한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아무쪼록 하나님이 이 시련의 때, 다시금 그리스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고 그 나라를 넓혀 가시기 위해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길 기도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Responding to Pandemics: 4 Lessons from Church History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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