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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플터치 & 큐티

와플 QT_악보이야기
2021-10-23


주말칼럼_악보이야기

 

2008년 제9회 전주국제영화제의 출품작인 ‘바흐 이전의 침묵(Die stille vor Bach)’이라는 바흐에 관한 영화를 상영한 적이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아주 극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낭만주의 최고의 작곡가 중의 한 사람인 멘델스존의 하인이 한 정육점에서 주인을 위하여 고기를 사는 장면이 나오는데 정육점 주인이 오래된 악보에다 고기를 싸줍니다. 하인은 악보에 싼 고기를 가져오게 되고 악보를 본 멘델스존은 그 악보가 심상치 않음을 발견하여 오래된 악보 한가운데 빨갛게 고깃물이 든 악보를 보며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하게 됩니다. 이 악보가 바로 바흐 최고의 작품 중 하나인 ‘마태수난곡’으로 밝혀집니다. 1829년 멘델스존은 이 곡이 작곡된 후 100년 만에 처음 연주를 하며 잊혀 가던 바흐를 세상 알리는 계기가 된다는 내용입니다. 멘델스존이 바흐 사후 처음으로 마태수난곡을 연주한 것은 사실이지만 정육점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아마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었던 멘델스존이 어찌하여 악보를 구했으리라 짐작합니다. 하여튼 악보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이 위대한 작품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겁니다.


바흐 작품에 관한 또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스페인 출신의 세계적인 첼리스트인 파블로 카잘스가 13살 때 바르셀로나의 한 고서점에서 한 권의 첼로 악보를 구입하게 됩니다. 이 곡이 바로 그 유명한 바흐의 무반주 첼로조곡입니다. 이 곡은 지금도 연주자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곡 중 하나입니다. 카잘스는 피나는 연습과 연구를 거듭하여 12년 후에 드디어 첫 공개 연주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48세가 되는 해에 첫 번째 음반을 녹음하게 됩니다. 그만큼 이 대가에게도 이 곡은 너무 어려운 곡이었습니다. 카잘스에 의하여 이 악보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생각만 해도 너무 슬퍼집니다.


참으로 드라마틱한 악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악보는 음악가들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존재일 수 있습니다. 악보가 있으므로 음악가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악보 자체가 음악은 아닙니다. 음악을 담고 있는 그릇이라고 할까요. 그러나 그릇이 없으면 요리한 음식을 담을 수 없게 됩니다. 


요리하니 요리와 악보의 유사성에 대하여 깊이 깨달은 시기가 있었습니다. 음악가 중에 요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세계적인 한국 지휘자인 정명훈도 요리에 관한 책을 출판할 정도로 요리에 관심이 많은 음악가입니다. 저도 한때 요리에 심취한 적이 있습니다. 요리를 해보니 요리의 맛을 내는 방법과 음악의 맛을 내는 방법이 비슷한 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


요리의 과정을 보면 양념을 만들 때 고춧가루 한 큰술 반, 소금 반 스푼 등으로 이야기합니다. 물론 빵을 만들 때 보면 계량컵으로 그램으로 표시하기도 합니다. 한 스푼을 사실 정의한다는 게 참 어렵습니다. 스푼에 따라서 크기도 다르고 그 양을 정확히 할 수 없습니다. 음악도 매우 비슷합니다. 음악의 맛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한 최소 단위를 한 음의 아티큘레이션이라고 말합니다. 한 음의 강세나 그 음을 얼마나 부드럽게 만들어야 하는지 또는 그 반대로 얼마나 어택을 강하게 해야 하는지 등입니다. 이는 악보에서 강세는 피아노(p)와 포르테(f)를 사용합니다. 피아노 한 개(p)부터 피아노 여섯 개(pppppp)까지도 사용합니다. 포르테(f)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드러움의 정도는 테누토(-)라는 것을 사용하고 어택의 정도는 스타카토(·)나 악센트(>) 기호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음악의 많은 표현을 이 기호들 몇 개로 설명할 수 없음은 요리의 양념을 만들 때 설명하기 어려움과 비슷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레슨 선생님들이 “악보대로 연주하라”라는 말을 자주 하곤 하는데, 이 때 그 문맥을 잘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포르테 한 개(f)를 얼마만 한 크기로 연주해야 하는지 또 포르테 두 개(ff)는 한 개보다 얼마나 더 크게 연주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를 결정하는 요소는 매우 다양합니다. 작곡자의 성향을 이해해야 하고, 작곡가가 살고 있었던 시대를 이해해야 하며, 어떤 음악적 문맥에서 사용되었는지를 심도 있게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악보가 꽤 정확해 보이지만 악보는 정말 많은 요소를 생각해야 하는 체계가 분명합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 음악학자 프레드릭 도리안(Frederick Dorian)은 자신의 저서 음악 연주의 역사(The History of Music in Percofrmance)에서 “연주는 악보의 해석 없이는 불가능하다”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정말 악보의 해석 없이 연주는 불가능합니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돌아보니 악보와 같은 것이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젊었을 때는 내가 느끼는 것과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인생은 악보처럼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닌 그레이한 부분이 정말 많다고 느껴집니다. 내가 만들지 않은 악보는 만든 사람의 입장에서 해석해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내 앞에 펼쳐진 인생도 내가 인생을 만드는 것 같지만 내 앞에 펼쳐지는 일들은 수많은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세상이 분명합니다. 내 앞에 펼쳐진 사건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그것을 나의 것으로 재해석해서 만들어 가느냐가 세상에 나의 인생을 그려나가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공감해 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집니다. 




작성자 : 조익현(용인시립합창단 상임지휘자, 음악평론가)
출처 : 맛있는 QT 문화예술 매거진 <와플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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