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dition
한국어
UNITED STATES
AFRICA
عربي
AUSTRALIA
BRASIL
CANADA
正體中文
简体中文
ESPAÑOL
فارسی
FRANÇAIS
ITALIA
NEDERLANDS
SHQIP
SLOVENSKÝ
후원
하기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시리즈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리뷰
서평
새로 나온 책
뉴시티교리문답
뉴스
국내
국제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검색
사이트 내 전체검색
검색어 필수
검색
추천 검색어
마음
여성
배움
성경
신앙과일
크리스찬
전체메뉴
01
ARTICLES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02
VIDEOS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03
SERIES
시리즈
04
CONTACT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05
QT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06
REVIEWS
도서
서평
새로 나온 책
07
The New City Catechism
뉴시티교리문답
08
NEWS
뉴스
국내
국제
09
ABOUT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10
GIVE
후원
ARTICLES
ARTICELS
연도별
SELECT CONCAT(YEAR(wr_4)) ym FROM g5_write_articles where wr_4 <= '2025' GROUP BY ym order by wr_4 desc
2024
2023
2022
2021
2020
2019
2018
날짜순
조회순
이름순
참 자유,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선택하는 자유
by 정현구
2023-02-04
하나님과의 관계는 우리 인간의 존재 조건이다. 그 관계가 복된 관계가 되려면, 관계를 이루는 법칙과 원리가 제대로 작동해야 한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동물처럼 본능을 따라 반응하는 관계가 아니다. 하나님과 사귀고 교제하는 인격적인 관계이다. 인격적 관계가 되려면 그렇게 만드는 조건이 필요하다. 자유가 바로 그 조건이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강요하여 맺어진 관계에서는 인격적인 관계가 나오지 않는다.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어떤 왕이 한 마을을 시찰하다가 아주 마음에 드는 아가씨를 만났다. 그가 왕으로서 그녀에게 청혼하면, 그녀는 왕이 가진 권력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마지못해서 승낙할 수 있다. 혹은 왕에 대한 사랑보다 화려한 왕궁 생활에 매력을 느껴 청혼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참된 사랑의 관계가 될 수 없다. 왕은 평민으로 변장해서 그 마을로 들어가 그녀와 사귄 후 한 남자로서 청혼했다. 그녀가 자신의 자유의지를 따라 왕을 선택함으로써 두 사람의 관계는 참된 사랑의 관계가 될 수 있었다. 이처럼 자유는 인격적 관계의 기초다.하나님은 아담이 에덴동산에 있는 수많은 나무의 열매를 “임의로”(창 2:16) 먹을 수 있도록 자유를 허락하셨다. 어떤 것을 선택할지, 상황에 어떻게 반응할지를 자신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서도 ‘예’라도 응답할 수도, ‘아니요’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인간은 항상 ‘예’로만 반응하도록 만들어진 로봇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자유 때문에 인간은 인격적인 존재가 된다. 자유가 바로 인간을 인간되게 하고, 자기 결정에 책임을 지는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이다.자유는 인간됨의 조건이지만 동시에 위험한 도구이기도 하다. 잘 선택하면 좋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무엇을 선택하는 자유가 있다고 해도, 선택의 결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므로 자유를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자유를 가지고 선하고 높은 가치를 선택하면 다음에도 선하고 높은 가치를 선택할 가능성이 더 커지고, 그 선택의 결과는 선택한 자기 자신과 관계된 이웃을 이롭게 한다. 그러나 그 자유로 그릇된 것을 선택하면 다음에도 그릇된 것을 선택할 가능성이 더 커지며, 그 선택의 결과는 자신과 관계된 이웃을 해롭게 한다. 피아노 연주자가 화성학과 연주법의 바른 원리를 따라 연주하기를 선택하고 계속 연습할 때 결국에는 어떤 곡이든지 자유자재로 연주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되어 자기와 이웃을 이롭게 하는 것과 같다.하나님은 우리와의 인격적 관계를 위해서 인간을 자유의 존재로 만드셨다. 그 자유로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에게 속한 진리와 사랑을 선택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세워지고 유지된다. 하나님이 동산의 많은 열매를 임의로 먹을 수 있게 하시면서도 선악과는 금지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가 자유를 행사할 때 그 자유를 하나님이 정하신 선과 악을 기준으로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선택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고, 그런 선택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유지하게 만든다.하나님이 인간에게 기대하시는 관계는 자유가 없는 일방적 복종의 관계도, 순종이 없는 거역의 관계도 아니다. 자유를 가진 순종의 관계다. 자유를 가지되 그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의 법 안에서 하나님에게 속한 선과 사랑을 선택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풍성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법 안에서 참되고 옳은 것을 계속 선택하는 사람이 참자유자이다. 그러한 사람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을 닮은 모습을 발견하고 또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정현구, 그러면 어떻게 살 것인가(두란노)에서 간추린 글입니다.
자유
자유와복종
자유와순종
인간됨
남자가 주도하는 교회에서 내가 기쁘게 순종하는 이유
by Emily Anderson
2023-02-03
“여봐, 여자도 남자랑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야. 절대 남자보다 뒤떨어지지 않아.” 교회 리더십에서 여자가 차지하는 위치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응답으로 쓴 그녀의 인스타그램 게시물을 처음 읽었을 때, 불편함이 나를 휩쓸고 지나갔다. 수년 동안 나는 남자가 주도하는 교회 리더십이라는 성경의 구조를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인스타그램을 읽는 순간 갑자기 교회에서 내 역할이 가지는 가치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의과대학을 다니는 젊은 여성으로서, 나는 내 의견이 제대로 인정받거나 또는 남자에 상응하는 존경을 얻기 위해서는 두 배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현실에 익숙한 상태였다. 그럼 나는 위선자인 걸까? 여성 리더를 금지하는 교리에는 복종하면서, 직장에서는 여성의 지위 상승을 위해서 노력하는 이중적인 사람 말이다. 지난 일 년 동안 하나님은 내게 여성 사역의 가치를 알려주셨다. 동시에 교회의 가르침, 경건한 여성 멘토, 그리고 성경 공부를 통해서 남자를 교회의 리더로 세운 것이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이라는 확신까지 확고히 하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다음 세 가지 핵심 진리 덕분에 나는 남성 주도의 목회 환경 속에서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즐겁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1. 사역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삶의 주인은 내가 되어야 한다고 촉구하는 현대 문화와는 달리, 베드로전서 4:10-11은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맡은 청지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바울은 사도행전 20:24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내가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하기만 하면, 나는 내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이 구절에서 주목할 점이 있다. 바울이 사역을 자신의 사역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하나님을 사역의 근원이자 핵심으로 인정하고 있다. 사역의 주인이 내가 아니기에, 아무리 목회의 소명 또는 말씀의 은사를 받았다고 확신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여자가 교회에서 리더십을 행사해도 된다는 충분한 자격 요건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은 교회 감독자가 갖추어야 할 구체적인 자격을 명시하셨다. 디모데전서 2:12에서 바울은 분명하게 말했다. “여자가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나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조용해야 합니다.”현대 문화를 고려할 때,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이런 명령은 무시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13절과 14절을 같이 고려하면 새로운 해석이 드러난다. “사실, 아담이 먼저 지으심을 받고, 그다음에 하와가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아담이 속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여자가 속임을 당하고 죄에 빠진 것입니다.” 첫 인간을 언급하면서 바울은 남자와 여자를 묶는 결혼 속에 담긴 하나님의 창조 질서가 교회 리더십 속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는, 하나님의 보편적 설계 구조를 강조한다. 그렇기에 성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는 문화에서도 우리는 1세기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되었던 동일한 모델이 오늘날 교회에도 변함없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확신할 수 있다. 2. 중요한 사역이 단지 설교로 한정되지 않는다. 목회 리더십에서 여자를 배제하는 것이 아예 영향력 있는 사역을 할 수 없게 한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단지 목회적 가르침만을 최우선으로 생각할 때 우리는 강단 밖에서도 얼마나 아름다운 사역이 넓게 뻗어갈 수 있는지를 간과하는 우를 범한다. 복음 설교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나의 신앙생활이 지속적으로 축복을 받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내 신앙을 강하게 한 것은 설교와 더불어서 가장 힘든 학업의 시기를 보내던 중에 깊은 관계를 맺게 된 자매들 때문이었다. 그들이 보여준 사랑과 환대를 모델로 해서 나는 학교에서 믿지 않는 이들을 위한 사역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들의 모범 덕에 나는 불신자 동료들과 관계를 구축할 수 있었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계기를 만들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여성 사역을 통해서 교회 벽을 넘어서까지 불신자의 마음에 복음의 씨를 심으시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다. 히브리서 6:10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우리를 격려한다. “하나님은 불의하신 분이 아니므로, 여러분의 행위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을 잊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은 성도들을 섬겼으며, 또 지금도 섬기고 있습니다.” 여성 사역이 목회자의 설교보다 눈에 띄지 않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 구절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봉사와 신실함을 지켜보시고 축복하실 것을 확신할 수 있다. 3.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를 신뢰할 때 기쁨이 따라온다. 몇 년 전부터 나는 삶에서 목격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최근 과거에 쓴 내용을 보면서 나는 더 겸손해졌다. 내가 기도한 내용과 정반대의 결과가 시간이 지나고 보니 다 하나님의 일하심이었던 것이다. 나의 제한된 통찰력과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가 대조되는 것을 확인하면서 나는 그분의 뜻에 더 깊이 복종하게 되었다.하나님의 길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나는 그분의 무한한 지혜를 신뢰하는 법을 배웠다. 그 덕분에 교회 리더십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 기꺼이 복종할 수 있게 되었다. 제러마이어 버로스(Jeremiah Burroughs)는 The Rare Jewel of Christian Contentment(그리스도인의 자족이라는 드문 보석)에서 다음과 같이 꼭 필요한 말을 썼다. “자족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처분을 바라보고 또 하나님의 처분에 복종한다. … 어떻게 일을 처리하는 게 더 나은지 주님은 나보다 더 잘 알고 계신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매들이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회의 감독자로 세우시지는 않았다. 그러함에도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역을 주시고 또 그분이 세우신 교회에 꼭 필요한 존재로 우리를 준비시키시는 은혜에 감사하고 기뻐하자. 참으로 그렇다. 우리는 결코 남자보다 뒤떨어지지 않는,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이다. 원제: Why I Joyfully Submit to Male Church Leadership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교회리더십
여성리더십
보완주의
가장 힘들었던 대화, 그러나 후회하지 않는 이유
by Garrett Kell
2023-02-02
할아버지가 언제 일어나셨는지 정확하게는 몰라도, 해가 뜨기 훨씬 전이라는 건 분명했다. 할아버지에 관한 내 최초의 기억은 그가 매일 아침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또 신문을 읽던 작은 식탁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할아버지의 지하실 벽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받은 각종 상과 사냥감을 들고 찍은 사진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욕을 섞지 않고서는 단 몇 문장도 하지 않는 할아버지에게서 나는 욕을 배웠다. 보기에 따라서 무섭게 느낄 수도 있지만, 할아버지의 미소와 배꼽이 빠져라 웃는 모습을 보는 순간 그런 느낌은 바로 사라졌다. 할머니를 향한 할아버지의 사랑은 내가 살면서 거의 본 적이 없는 수준의 서비스와 부드러움으로 가득했다. 할머니가 방에 들어오면 할아버지는 바로 일어나서 모든 수발을 들었다. 할아버지는 가끔 교회에 갔다. 지극히 사적인(private) 믿음을 갖고 있었다는 게 가장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우리 가족의 최고 어른으로서 식사 기도는 할아버지의 몫이었는데, 우리나라를 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 백악관의 주인을 향한 욕이 주된 내용이었다. 나는 할아버지가 성경을 읽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예수님의 이름도 욕할 때 외에는 들어본 적이 없다. 영적 부담2011년, 우리 부부는 노스캐롤라이나 윌밍턴으로 가는 여름휴가 여행을 계획했다. 해변 때문이기도 했지만, 진짜 이유는 거기 사는 조부모님이 우리 갓난아이를 보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휴가 날이 가까워질수록 우리 가족은 바빠졌지만, 내 마음에는 어떤 묵직한 부담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할아버지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강권하심이었다. 사실 몇 년 동안 할아버지의 구원 때문에 부담을 느낀 건 사실이지만, 그런 대화를 직접 나누는 것을 왠지 나는 꺼리고 있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이제 여든이 넘었고, 건강이 나쁜 건 아니었지만, 나는 주님께서 이번 휴가를 허락하신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할아버지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다. 복음을 나누는 데에 있어서 나는 다른 사람과 하나 다를 게 없다. 복음을 믿는 내 마음은 진심이지만,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할 때마다 언제나 긴장한다. 할아버지와 나눴던 오래전 어렴풋한 대화는 내가 느끼는 긴장과 두려움을 아예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렸는데,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먼저,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할아버지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말 그대로 강철의 사나이, 나보다 거의 네 배나 더 오래 산 사람에게 진리를 말한다는 건 두려운 일이었다. 내가 앞으로 알게 될 지식보다 할아버지가 이미 잊어버린 게 아마도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런 할아버지에게 죄를 회개하고 왕이신 예수님을 믿으라고 선포할 생각을 하니, 너무 초조해서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둘째, 할아버지는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가 들은 설교만 해도 수천 번이 넘는다. 그러나 좋게 말해야, 할아버지는 복음에 조금 관심을 보이는 정도의 선데이 크리스천이었다. 비록 흠잡을 데 없이 반듯하고 성실한 분이지만,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보여주는 열매와는 상관없는 사람이었다(마 7:16; 갈 5:22-23).셋째, 그는 가족이었다. 나에 대해서 좋은 점, 나쁜 점, 모르는 게 없는 가족이었다. 그런 할아버지에게 복음을 전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종교를 조롱하고 우리 가족을 욕되게 하던 바람둥이 시절의 내 모습도 고스란히 지켜본 사람이었다. 비록 예수님이 내 인생에서 놀라운 일을 하신 건 사실이지만, 할아버지가 내 과거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할아버지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내게 진리를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간구했다. 또 주변에 중보기도를 부탁했다. 그리고 내 기도에 주님께서 응답하셨다. 여행 마지막 날, 우리는 약 30분 동안 복음에 관해서 분명하게 대화를 나눴다. 할아버지는 의문을 제기하고 또 의심 가는 부분을 지적하기도 했지만, 기꺼이 복음을 고려해 보겠다고 말했다. 나중에 나는 할아버지의 질문에 대한 답을 적은 편지와 그와 관련한 성경 구절, 그리고 내 친구 마이크 맥킨리가 쓴 훌륭한 책, 나는 참 기독교인인가?(Am I Really a Christian?)를 보냈다. 그 후로 우리는 한 번 더 대화를 나눴는데,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말하는 중생이라는 거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한 적이 없었는데, 요즘 들어 조금 알 것 같기도 해.” 2012년 12월 17일, 할아버지는 55년 동안 함께한 아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의 출생지인 노스캐롤라이나 커리턱에서 추도예배를 인도하는 영광을 누렸다.씨가 뿌려지다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몇 년 동안, 나는 종종 할아버지의 영혼에 뿌려진 씨앗이 뿌리를 내렸는지 궁금했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에 회개와 믿음을 일으키셨기를 바라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러함에도 한 가지 믿는 건 성경 말씀이 참되다는 것이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느니라”(잠 29:25). 두려움은 복음을 전하려는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 칼 헨리(Carl Henry)는 복음이 진짜 좋은 소식이 되려면 제시간에 도착해야만 한다고 지적했다. 복음을 나누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내가 항상 순종한 건 아니었다. 아니, 거의 순종한 적이 없다. 그러함에도 이런 나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는 끊어진 적이 없다. 할아버지와 나눈 대화는 정말로 쉽지 않았지만, 그날을 돌이켜볼 때마다 정신이 번쩍 들곤 한다. 영원의 관점에서, 내가 오늘 느끼는 두려움은 근시안적이다. 영원의 무게는 오늘도 우리를 압박한다. 복음 전파라는 맡은 사명을 더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더 의지하는 길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가정과 이웃, 그리고 학교와 일터에서 왕의 대사로 세우셨다(고후 5:20). 우리가 지금 속한 곳은 우연의 결과가 아니다. 그렇기에 낭비할 시간이 없다. 복음의 문을 활짝 열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라. 담대하게 그분의 이름을 선포하는 용기를 달라고 간구하라. 언젠가 우리가 그분의 아들 앞에 서는 날, 이 땅에서 나눴던 힘든 대화를 기억하고 더 감사하게 될 것이다. 원제: The Toughest Conversation I Don’t Regre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전도
가족전도
중생
종말적전도
선데이크리스천
설교자를 위한 세 가지 경고
by Kenneth Mbugua
2023-02-01
타락한 세상에서 설교라는 특권을 능가하는 소명은 많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설교에 기름 부으심으로 죄로 어두워진 영혼에 그의 영광의 빛이 비취도록 정하셨다. 정기적인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은 오랫동안 그의 백성의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고 있던 거짓말이 그리스도의 발 앞에 굴복하도록 만드셨다. 그리고 하나님에 관한 거룩한 지식이 교회에서 울려 퍼지는 설교를 통하여 이 세상에 전파되기를 원하신다. 간단히 말해서, 설교는 실로 위대한 소명이다. 그러나 강단 안팎에는 영혼을 저주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당신과 나보다 훨씬 더 뛰어난 사람들도 강단의 함정에 빠졌다. 사역을 완수하고자 하는 설교자로서 내 영혼을 위협하는 세 가지 위험을 이 글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싶다. 나와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를 하나님이 지켜주셔서 설교라는 높고 거룩한 부르심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1. 진리를 아는 것을 진리를 믿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은 강해 설교자로서 우리의 의무이다. 설교 강단에 무지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 우리의 임무는 성경의 진리를 발굴하여 정확하고 설득력 있게 또 열정적으로 교인에게 선포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슬프게도 강단에서 선포되는 진리가 흔하지 않은 곳이다. 그러나 분명한 진리를 바로 배우고자 하는 최소한의 소망을 가진 적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서 우리는 바로 외쳐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위험이 있다. 신학적으로 건전한 설교를 하는 설교자도 얼마든지 지옥에 갈 수 있다. 성경이 무어라고 가르치는가? “그런데 귀신들도 그렇게 믿고 떱니다”(약 2:19). 사람들을 통제하고 싶은 우상에 빠진 사람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주권을 외칠 수 있다. 나 자신의 영광을 구하면서 입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설교하는 건 어렵지 않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설교하면서 정작 그 설교 속에서 의를 찾는 것, 그래서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내가 살을 붙이는 건 쉽다. 말씀은 참으로 옳다. “나는 내 속에 곧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여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롬 7:18-19). 속아서는 안 된다. 약을 팔아서는 아무도 고칠 수 없다. “의사여, 너 자신을 치유하라”는 모욕은 참으로 우리를 겸허하게 만들어야 한다. 강단에서 교인을 향해서 처방하는 동일한 치료법에 우리도 환자로서 참여해야 한다. 우리의 첫 소명은 강해 설교자가 아니라 진짜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일주일 사역의 목표가 단지 하나님의 진리를 설명하는 원고를 들고 강단에 오르는 것 이상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해진 양심, 비길 데 없는 그의 사랑을 찬양하는 영혼,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사로잡힌 마음을 가지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강단에 오르기 전과 후에 믿음과 회개의 마음으로 내 설교에 나부터 응답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이 점과 관련해서 내가 목격한 좋은 예가 있다. 설교가 끝나고 교인들과 간담회를 가지면서 자신의 설교 내용 중에서도 특히 자기에게 영향을 끼쳤던 부분을 얘기하는 어느 목사의 모습이었다. 설교자로서 하나님 말씀의 통치 아래 자신을 위치시키는 좋은 모델의 한 사례이다.형제여, 교인에게 감동을 주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지 말라. 정작 교인을 위한 말씀을 준비하는 당신이 예배를 마치고 매주 굶주린 상태로 집에 가게 될 것을 두려워하라. 말씀을 연구하는 당신이 먼저 그 말씀의 열매에 먼저 참여하도록, 설교자에게 필요한 겸손과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라. 2. 설교 사역의 열매와 내 안에 있는 성령의 열매를 혼동할 수 있다이 위험을 나는 팀 켈러의 설교 덕에 알게 되었다. 2016년 비슨 신학교(Beeson Divinity School) 졸업식에 참석한 그는 좀 기이하고 작은 강단에서 이 점에 관해서 설교했다. 이 간교한 거짓말을 폭로한 켈러에게 나는 영원히 감사할 것이다. 사탄 원수가 말씀 사역자를 죄에 안주하도록 유인하는 데에 있어서, 과연 이것보다 더 기만적인 방법이 있을지 의심이 들 정도이다. 사역의 성공이라는 목표에 눈이 멀어 성령의 경고를 무시하고 전력 질주하다가 결국 믿음의 난파라는 결과를 맞는 설교자가 얼마나 많은가? 사역 내내 그들은 “추종자들”에게서 격려를 받는다. 사역의 열매가 자신이 특별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며, 더불어서 자신에게는 평범한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하는 규칙이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자랑스럽게 믿기까지 한다. 우리는 종종 예수님을 배반한 바로 그 유다가 귀신도 쫓아냈다는 사실을 얼마나 쉽게 잊어버리는지 모른다. 우리는 지금 설교의 은사를 경건보다 더 높이 평가하는 시대에 사역하고 있다. 설교의 은사는 있지만 성숙하지 못한 설교자를 선택하는 교회는 많지만 경건하지만 평범한 설교자를 선택하는 교회는 거의 없다. 오늘날 교회는 분명하게 드러나는 부족한 경건의 모습을 합리화하는 데에 익숙하다. 그러나 부족한 설교를 눈감아주는 데에는 그리 너그럽지 않다. 형제여, 이런 현실이야말로 우리가 현재 두 개의 전선에서 싸우도록 부르심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안에서는, 우리는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두려워해야 한다. 밖으로는, 우리의 설교를 듣는 청중의 판단에서 위안을 찾으려는 유혹을 피해야 한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교훈이 우리의 표준이 될 수 있다. “나는 하나님 앞과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분의 나타나심과 그분의 나라를 두고 엄숙히 명령합니다. 그대는 말씀을 선포하십시오”(딤후 4:1-2). 강단에 선 우리를 보는 교인들처럼 내가 나를 본다면, 설교의 반응을 성령의 열매로 혼동하는 유혹을 더 많이 받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최후의 그날에 눈을 떼지 않을 수만 있다면, 사탄의 치명적인 거짓말에 빠지지 않고, 나의 영혼만이 아니라 내 설교를 듣는 교인들의 영혼까지 구원하는 삶과 사역을 갖춘 설교자로서 자격을 얻을 것이다. 3. 모든 사역(설교도 포함)의 궁극적인 목적은 예배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다정확한 의미를 알기 어려운 구절을 본문으로 설교 준비를 할 때. 내 기도는 정확한 의미를 알려달라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자녀가 영적으로 충족하지 못한 채 교회를 떠나는 일이 생기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이단적인 말을 하지 않고 설교를 잘 마무리하는 것을 목표로 기도할 수도 있다. 물론 이것은 나름 중요하지만, 핵심은 아니다. 종종 설교 준비를 하면서 생기는 염려를 보면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애쓰고 있는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두려움의 이유가 하나님이 나쁘게 보일까가 아니라 내 명성에 흠이 갈까이다. 가끔 설교를 망치고 절망한 마음에 앞자리에 내려와 앉을 때 나를 채우는 괴로움은 내가 하나님을 제대로 높이지 않았다는 데에서 오는 슬픔이 아니다. 내가 대단한 설교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럴 때 내게 가장 필요한 건, 설교자로서의 내 정체성을 붙잡아주는, 그래도 설교가 괜찮았다는 교인들의 격려가 아니다. 내게는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속한 영광을 도둑질하려고 했던 내 마음을 뉘우치는 상한 마음이 필요하다. 워필드(B. B. Warfield)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참된 신학은 송영(doxology)으로 이어져야 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를 주장하면서,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라”(고전 1:31)라는 훈계로 끝맺는다. 나의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가 실제로 나 자신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느끼는 괴로움과 기쁨의 본질로 바로 드러날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라는 “율법”은 제대로 선포하는지 몰라도,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라”는 정신은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설교자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복음의 목적을 왜곡한다면, 그들도 복음의 내용을 왜곡하고 사람들을 하나님의 영광에서 돌아서게 하는 번영 복음 설교자들과 하나 다르지 않다.형제여, 영광은 인간의 몫이 아니다. 인간의 모든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가 전파하는 복음으로 우리까지도 지키실 것이다. 내 영광을 추구하는 자존심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자. 내 영광만을 바라는 비열한 죄까지도 용서하는 큰 자비가 십자가에는 있다. 내가 전하는 바로 그 복음이 교만한 설교에 대항하는 최고의 무기가 되도록 하자. 내 영혼과 성도들에게 분명하게 하자. 내가 자랑하고 싶은 모든 것, 심지어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조차도 죄 없는 진공 상태가 될 수 없음을 말이다. 그러나 나 자신과 우리가 드리는 제물이 예수의 보혈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음을 찬송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돌아가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시간 다시 한번 기뻐하고 찬양한다. 주님의 자비로 인해 주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우리가 정작 나중에 주님의 은혜에서 제외되는 비극이 생기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원제: Three Warnings for Those Who Preach the Word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설교자
삯꾼
거짓설교
설교
우영우는 어디에나 있다
by 이재훈
2023-01-31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한국 사회에 실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 드라마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있는 변호사 우영우의 사회 탐험기이다. 우영우 변호사가 의뢰인의 풀릴 것 같지 않은 상황을 고민하다가 고래가 등장하는 환상을 보면서 시원하게 해결책을 찾아내는 장면이 아무래도 이 드라마의 백미이지 싶다. 시청자는 모두 한마음이 되어 우영우를 응원했고, 통쾌한 승리에 함께 기뻐했다.사회적 약자를 응원하고 또 그가 승리할 때 함께 기뻐하는 사회는 그 자체로 깊은 감동을 준다. 이것은 매우 어렵지만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우영우처럼 천재적인 지능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도 아니다. 사회 전체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요구 수준을 낮추고 그들이 이루어 내는 작은 성취에도 함께 기뻐하면 우영우의 감동은 멈춤 없이 이어질 수 있다. 대한민국에는 장애인 촉진법이 엄연히 있다. 이 법에 따르면 사업장은 법으로 정한 인원의 장애인을 고용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대다수 사업자가 장애인을 고용하는 대신에 과태료를 내고 그 의무에서 벗어난다. 남들 얘기일까? 우리 교회 안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 물론 그 사실을 파악한 즉시 시정하여 몇 명의 장애인이 정규직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성도들의 요청사항을 제대로 해결해 주지 못해 항의도 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성도들이 이해해 주게 되었고, 고용된 장애인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가게 되었다.교회에도 경영을 고려해야 하는 적지 않은 영역이 있다. 그런 데서는 비용을 낮추고 효율을 높이려는 경제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며, 많은 일을 잘 처리하는 직원을 고용하려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장애인을 고용하는 것은 매우 비경제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효율성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 우영우가, 그 드라마가 보여 준 것이 바로 그 가치이다.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일하는 곳에서, 그렇게 함께하는 일터를 만들어 나가려고 애쓰는 곳에서, 우리는 경쟁이 가져다줄 수 없는 감동을 경험하게 된다. 그 감동에는 돈과 지식과 과학이 줄 수 없는, 세상을 살맛 나게 하는 힘이 있다. 그러한 감동이 교회 공동체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은 교회와 복음에 주목할 것이다.이재훈, 방황의 시대, 방향이 되다(두란도) 중 “우영우는 어디에나 있다”를 간추렸습니다.
이상한변호사우영우
장애인
장애인촉진법
신에 관한 소문
심플리 미셔널 | Simply Missional
by 김선일
2023-01-30
심플리 미셔널Simply Missional탈교회화, 비종교화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선교 과제로서 복음을 새롭게 제시합니다. 기독교의 변증 유산으로부터 오늘을 위한 복음 변증의 지혜를 발굴하고, 현대 한국의 문화적 표현들과 복음의 대면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무신론자가 신앙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첫 관문은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일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회심이 있고 엄밀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된다. 하지만 유신론적 신앙으로의 전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밑그림이 되기도 한다. 최근 이른바 “가나안” 성도와 탈교회 현상이 심각한 이슈로 제기됐는데, 그 배경에는 일반인들의 비종교화라는 흐름이 있고, 비종교화의 중심에는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의 약화가 있다.2022년 12월에 여론조사 기관인 한국리서치에서는 “별난 리서치” 결과를 발표했다. 이 조사는 한국인들의 “신의 존재, 그리고 신이 내 삶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제하의 조사였는데(이런 주제를 별나다고 보는 인식이 좀 별나기는 하다),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왔다. 신은 존재한다고 보는 응답은 48퍼센트,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33퍼센트, 그리고 모르겠다는 응답은 19퍼센트이다. 일단 이 결과는 2021년 5월에 발표된 한국갤럽의 종교에 대한 인식조사에서 신의 존재를 믿는다는 응답이 39퍼센트였고, 존재하지 않는다가 47퍼센트였던 것과는 다소 상반된 수치다. 다른 기관의 조사이지만, 한국리서치의 조사에서는 신을 믿는다는 응답이 갤럽의 조사보다 9퍼센트가 올라간 것이다. 갤럽은 1,500명을 대상으로 면접조사를 벌였고 정기적으로 해오던 연구이지만, 한국리서치는 1,000명에게 문자와 이메일을 수반한 웹 조사여서 양쪽의 결과를 대등하게 비교, 평가하기는 힘들다. 다만 필자가 한국리서치의 조사에서 신의 존재를 믿는다고 응답한 이들이 더 높게 이유를 추측하다가, 한 가지 흥미롭게 발견한 것은 신의 존재를 믿는다는 응답 자체가 두 갈래였다는 점이다. 즉, 신은 존재한다는 응답은 총 48퍼센트였지만, “단 하나의 신만이 존재한다”는 21퍼센트이고, “하나가 아닌, 여러 신이 존재한다”는 26퍼센트로 나왔다. 갤럽의 2021년 조사에서는 여러 신이 존재한다는 응답 항목은 나타나지 않는다. 정리하자면, 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하나의 신이 존재할 가능성, 여러 신이 존재할 가능성을 모두 감안해서 물었을 때, 절대자로서의 신이 존재하느냐(갤럽 방식)는 질문에 대한 응답보다 더 높게 나왔으리라는 짐작이다. 필자의 추측이긴 하지만, 이 문항이 흥미로운 이유는 한국인에게 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인식은 기독교 세계를 기반에 두고 있는 서구사회와는 다를 수 있고, 이는 신과 인생의 관계에 대해서도 다른 기대와 전망을 품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도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묻는 조사들이 있다. 저명한 조사기관인 퓨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에서 2014년에 실시한 조사의 첫 질문은 신(God), 또는 보편적 영(universal spirit)의 존재를 믿느냐는 것이다. 그다음 질문에서는 어느 정도로 신, 또는 보편적 영을 믿느냐고 묻는다. 절대적으로 확신한다(absolutely certain), 상당히 확신한다(fairly certain), 그다지 확신하지는 않는다(not too certain), 전혀 확신하지 않는다(not at all certain)로 응답이 구성되어 있다. 결과는 절대적으로 확신한다가 63퍼센트, 상당히 확신한다가 20퍼센트이며, 그다지, 혹은 전혀 확신하지 않는다가 합쳐서 5퍼센트이다. 절대적 확신과 상당한 확신을 합치면 83퍼센트이고, 미국갤럽의 2022년 조사에서 81퍼센트가 신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과 큰 차이 없는 수치다. 흥미로운 차이점은 미국에서는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의 정도를 묻는데, 반면 한국의 조사에서는 어떤 신을 믿느냐, 더 구체적으로 유일신이냐, 여러 신을 믿느냐로 나눠서 물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조사들에서도 신, 보편적 영, 더 높은 존재(higher being) 등으로 선택지를 넓히는 추세이긴 하지만, 여러 신이 공존한다는 인식은 아니다. 더군다나, 한국리서치의 조사에서는 유일신을 믿는다는 응답이 21퍼센트이지만, 여러 신이 존재한다는 응답은 26퍼센트로 더 높게 나왔다. 여기서 추론할 수 있는 점은 한국인들에게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신에 대한 인식의 토양이 강하게 형성되어 있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수년 전에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서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한 미국인 선교사가 암살당했는데, 먼저 화면에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경 구절이 나온다. 그다음 장면에서는 드라마의 주인공이 ‘극락보전’이라고 써 있는 절에 가서 보살에게 그 선교사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건네주며 그를 위해 초를 밝혀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면서 주인공이 “이이가 하나님을 믿는 분이긴 한데…”라며 말을 흐리자, 보살은 웃으며 이렇게 대답한다. (하늘을 가리키며) “저기 계신 분들이야 서로 잘 알고 지내시겠지요. 부처님께서 하나님 품으로 잘 인도해 주실 겁니다.” 드라마의 한 대사이지만, 필자는 이와 같은 신들의 공존 사상이 한국인의 종교적 의식을 상당히 반영한다고 본다. 종교들이 혼합하고 공존하는 현상은 한국의 종교문화에 특유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어쩌면 한국 사회에서는 종교 간 갈등과 분쟁이 그리 심각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종종 결혼하면서 가족의 화목을 위해 상대방의 종교로 개종한다든지, 여전히 부모의 종교에 자녀들이 큰 고민 없이 순응하는 현상은 단지 가족주의 때문만이 아니라 특정 종교에 배타적으로 헌신하는 문화가 고착되지 않아서 일 수 있다. 그것은 기존 종교보다 사람들의 관습 속에 깊이 스며든 더 큰 종교가 있다는 의미다. 철학자 탁석산은 그것을 한국인들의 현세 구복주의라고 지적하며, 한국인에게는 현세와 내세의 이분법이나 절대적 유일 신앙이 약하다고 주장한다(탁석산,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그래서 신학자 김기현은 한국 문화와 기독교 세계관의 관계를 면밀히 분석하면서 이원론보다 혼합주의의 극복이 한국 교회가 직시해야 할 주된 사안이라고 한다(김기현, “이원론 대 혼합주의: 한국 기독교 세계관의 재구성을 위한 제안”). 필자는 비종교화 시대의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하나님과 신앙에 대한 담론을 제시할 것인가의 의도를 갖고 이 글을 쓰고 있다. 우선, 한국 문화에는 오랜 기독교 문명을 배경으로 하는 서구사회와 같이 우주를 통치하고 섭리하는 절대 신에 대한 전제가 없었다. 근대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서구사회는 이성과 과학으로 세계에 대한 설명체계를 구축하며 세상을 경영하는 신의 은총과 질서를 배제하였고, 그것이 인본주의 세속화로 이어졌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비록 20세기 중반 이후로 폭발적이고 압축적인 교회 성장을 경험하긴 했지만, 그와 같은 유신론적 세계관이 한국 사회의 습속을 형성하긴 힘들었다. 따라서 한국 문화의 고유한 현세지향적이고 혼합종교적인 성향이 여전히 강한 기제로 작동한다고 본다. 그러한 마음의 틀은 복음의 변증을 위해서 마주하고 돌파해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모든 결핍에는 그 배후에 갈급한 열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하나님과 유일하신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신앙은 오히려 그와 같은 신앙에 저항하는 마음의 틀을 근본에서 변혁시키는 해답이 된다. 팀 켈러가 말한 것처럼, 문화를 변혁시키는 복음은 거대한 바위를 깨뜨리기 위해서 중심부에 폭탄을 설치하는 것과 같다.최근 큰 인기를 얻는 드라마 ‘더 글로리’는 학교 폭력 피해자가 성인이 돼서 가해자들에게 통쾌한 복수를 한다는 줄거리이다. 여기서도 흥미로운 점은 동일한 악의 결속체인 가해자들이 각각 다른 종교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폭력 주동자의 어머니는 무속신앙 신봉자이고, 가해 동조자는 중견 교회 목사의 딸이며, 또 다른 가해자의 예비 시어머니는 독실한 불교 신자다. 이러한 설정이 얼마나 현실적이냐를 떠나서, 사실상 이 드라마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종교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내가 아플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이 질문은 기독교 전통에서 고통의 문제와 신의 섭리에 관한 고전적 물음이다. 또한 이 질문은 시대와 문화를 넘어서 인간의 본성적인 탐구이기도 하며, 특히 비종교화/탈교회화되어가는 한국 사회에서 하나님에 관한 신앙을 제시하려 할 때도 관련지어서 고민하게 하는 숙제이기도 하다. 나의 가정, 경제 문제, 일과 경력, 건강, 인간관계 등에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이다. 예수께서 성육신하신 바로 그 땅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야 할 곳이다. 선교학자 폴 히버트는 비서구 문화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즉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실제의 삶이 이루어지는 현장인 “중간영역”에서 신앙의 가치와 효능이 입증되는 것이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근대 서구 기독교는 하나님과 신앙을 초월과 내세의 형이상학적 영역에 가두었고, 이것이 곧 실제 삶의 문제들이 중첩한 중간영역을 배제했다고 지적한다(폴 히버트, 선교현장의 문화이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생생한 고통과 슬픔, 고민과 희망이 교차하는 일상에서 경험하며, 그 일상을 변혁시키는 차원의 문제이다.물론 하나님이 우리의 현안과 필요를 해결하셔야만 존재 입증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욕망을 채우시는 하나님은 더더욱 성경적 신앙과 무관하다. 그러나 그 어떤 삶의 고민과 관심도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서 벗어날 수 없다. 현세지향적이고 혼합주의적인 한국 문화에서 기독교 신앙을 제시하려면 때로 복음의 현실적 효능과 선택으로서의 신앙이라는 가치를 제시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문화적 접촉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느끼는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들의 필요에 대한 돌봄으로부터 절대 주권자와의 만남을 통해 더욱 진정한 필요가 채워지게 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 되어야 한다. 신의 존재에 관한 믿음을 묻는 조사에서 항상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절대성과 유일성, 그리고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가장 확고하게 믿는 집단이다. 견고한 복음적 기초는 모든 사역의 전제다. 그래야 세속적 문화의 한복판에서 복음을 현실적으로 전달하면서도 복음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로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무신론자
유신론
신의존재
가나안성도
탈종교화
혼합주의
기복신앙
신정론
위대한 설교자가 되려는 욕망에 도사린 위험
by Kwazi Buthelezi
2023-01-29
잭 에즈윈(Zack Eswine)의 글이다. “하나님을 위해 전력을 다한다는 것은 단지 설교를 위해 또 청중을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그의 책을 읽었고 또 설교까지 들었지만, 나는 그의 말을 제대로 듣고 있지 않았다. 나는 이미 기독교 사역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에즈윈이 하는 이야기는 내게 익숙했다. 왜 안 그렇겠는가? 그러나 에즈윈의 메시지를 무시하는 내가 사실상 듣고 있는 건 따로 있었다. 은연중에 나는 그를 나와 비교하고 있었다. 그가 아무리 과거에도 또 지금도 대단하다고들 하지만, 그는 결코 내가 꿈꾸는 위대한 설교자, 미래의 나와는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나는 내가 사역하는 캠퍼스 사역에서 누구나 손에 꼽는 대단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내 속에서 꿈틀거리는 욕망에서 풍기던 지독한 무지와 오만의 냄새를 맡느냐고, 굳이 당신에게 물을 필요가 없겠다. 그러나 이런 무지와 오만이야말로 주님의 영광보다 위대한 사역이 우리의 야망이 될 때 따라오는 결과 중 하나이다. 그리고 그런 비극이 내게 일어났다. 목사여, 위대한 설교자 이상을 갈망하라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항상 설교하는 걸 좋아했다. 어느 날 그리스도인이 되고 또 목회를 하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을 때, 그 중심에는 설교가 있었다. 나는 성공적인 (다른 말로 신실한) 사역에 필요한 게 무엇인지 몰랐다. 물론 적지 않은 설교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단지 설교만으로는 제자를 만들어낼 수 없다.물론 설교로 교인을 예수님과 사랑에 빠지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제자도는 관계 유지가 따라오는 헌신의 문제이다. 목회 훈련 첫해에 내가 발견한 게 바로 이 점이었다. 그러나 이 원칙을 사역에 대한 실질적인 나의 접근 방식으로 결정한 것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서였다. 설교는 사역의 일면에 불과하다훈련하는 동안 나는 지도자들에게서 다소 실망감을 느꼈다. 일 년 내내 내게 주어진 설교 기회는 몇 번에 불과했다. 신학교에 들어가자 사정은 더 나빠졌다. 신학교에서는 당연히 설교 기술을 연마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할 것으로 생각했다. 실망스럽게도, 신학교 삼 년을 통틀어서 내가 실제로 설교한 시간은 한 시간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은 나의 주된 관심인 설교, 그러니까 내게서 설교할 시간을 뺏는 다른 모든 사역에서 내가 눈을 돌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학업을 마치자마자, 대학생 사역을 하게 되었다. 드디어 원하는 만큼 설교할 기회를 맞았다고 생각했다. 내 예상은 적중했고, 마침내 꿈이 이루어졌다. 최소한 한 달에 한 번은 설교했으니까. 어떤 달은 두 번에서 네 번 설교한 적도 있었다. 나는 그런 상황을 즐겼다. 그러나 설교를 하면 할수록, 내 속에서 뭔가 점점 커지는 괴로움이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위대한 설교자의 모범을 조심스럽게 따르라설교를 사랑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는 훌륭한 많은 설교자를 따르려고 노력했다. 그들의 스타일과 방법을 관찰했다. 그러는 중에 무의식적으로 특별히 좋아하거나 싫어하게 된 특정 설교 스타일이 생겼다. 열린 귀와 배우겠다는 지혜로 어떤 이야기를 듣는 대신에, 나는 너무도 많은 것을 묵살해 버렸다. 그 결과 내가 존경하고 배울 수 있는 사람들의 숫자는 지극히 적었다. 한 가지를 분명히 해야겠다. 나는 지금 내가 완전히 틀렸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정말로 간절하게 내가 존경하는 사람들처럼 설교하고 싶어졌을 때, 문제가 생겼다. 나는 존경하는 설교자들처럼 소리 내고 또 글을 쓰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내가 그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내가 그들의 사역 경험에 관해서 전혀 아는 게 없다는 사실에도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일하시는 성장 수준에 만족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나도 모르게 다른 목사의 사역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설교에 대한 열정보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랑에 더 집중했더라면, 나는 설교에서 무언가를 깨달았을 것이다. 건강하지 않은 설교의 세 가지 특징1. 불만족첫째, 설교가 점점 더 나를 마비시켰다. 모든 목회자가 짊어져야 할 설교의 부담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감당해야 할 책임의 결과로 따라오는 부담이다. 그러나 메시지를 간과하고 강대상 그 자체에만 집중할 때, 설교자를 마비시키는 또 다른 부담이 있다. 내 설교에 나는 결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건 내가 하나님의 과정(process)에 만족하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내가 꿈꾸는 설교자의 모습이 있는데, 나를 만드는 하나님의 손길은 너무도 느렸다. 2. 지나치게 기술적이고 영적으로 메마른 설교 준비둘째, 설교가 점점 단순노동으로 전락했다. “단순”(pure)이라는 말이 순수함에 가까운 무엇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설교에 접근하는 내 방식은 순수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기보다는, 이해 능력이 부족한 교인에게 필요한 메시지가 숨겨진 암호 책, 그래서 힘들게 해독해야만 하는 일종의 전문 서적으로 읽어 내려갔다. 그런 내 해석 능력은 매우 폭이 좁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심하게 주석을 의존하게 되었다. 3. 인정 갈구마침내, 설교는 내가 괜찮은 목사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시금석이 되었다. 본문 연구를 마쳤으니, 이제 남은 건 내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교인들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설교로 그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뭐가 있겠는가? 나를 응원하고 또 나를 위해 기도하는 교인들의 투자가 헛되지 않았음을 설교를 통해서 증명하고 싶었다. 잊지 말자: 우리가 섬기는 대상은 구주이시다 이 모든 과정 내내 나는 신학교에서 배운 매우 중요한 한 가지를 잊고 있었다. ‘우리의 청중은 오직 한 분이다.’ 바로 하나님이다. 이 사실을 제대로 깨닫는 것보다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마음을 고치는 더 좋은 해독제는 없다. 내가 기쁘게 해야 할 유일한 분은 이미 그의 아들 안에서 나를 기뻐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설교 잘하는 목사가 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힘으로 그분을 섬기기만 하면 된다. 원제: The Danger in Desiring to be a Great Preach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설교
설교학
설교자
교회 교육에도 색깔이 있다
by 최창국
2023-01-28
교회 교육의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는 일생을 통해 끊임없이 성장하고 발달해 가는 세대별 신앙의 색깔을 이해하고, 그들이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 양육하는 것이다. 때문에, 교회 교육의 목적으로 신앙교육을 생각할 때 발달과 관련된 많은 문제가 필연적으로 제기된다. 비록 성숙한 신앙과 더욱더 나은 신앙에 대한 보편적인 이해와 신앙발달의 보편적인 단계를 이론화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지만, 세대별 신앙의 다양한 색깔과 형태를 이해하고, 그에 따른 신앙발달의 역동적인 과정을 이해하는 것은 교회 교육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대별 신앙의 특징과 형태를 통해 그들의 변화와 성장을 돕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교회는 교회 안의 세대별 그리고 다양한 그룹의 특성에 맞는 교육을 할 때 변화와 성장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세대별 특징을 이해하고 교육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유아부와 유치부는 교회 공동체의 본질적인 차원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시각, 미각, 촉각, 청각, 후각 등 공감각적으로 교회의 사랑을 느끼도록’(feeling the church) 서술하고 이러한 방법으로 그들을 교육해야 한다. 교회에 오면 가정과 같이 따뜻하게 맞아주는 곳으로 느껴지도록 안내하고 교육해야 한다. 다시 서술하면, 어떤 지식적인 내용을 주입하려고 해서는 안 되고 교회에 오면 어머니 품같이 따뜻한 곳으로 느끼도록 해야 한다. 성경적, 교리적 지식을 주입하는 교육이 아니라 성경에서 가르치는 사랑을 몸으로 느끼도록 교육해야 한다. 초등부와 소년부는 논리보다는 감각과 환경의 영향을 받는 시기이므로 성경 말씀이나 교리를 시각, 미각, 촉각, 청각, 후각 등 공감각적으로 교회를 알도록(knowing the church) 교육해야 한다. 초등부와 소년부는 추상적인 진리와 지식을 가르치려고 해서는 안 되고 단순하게 알 수 있는 것들을 가르쳐야 한다. 이 시기에는 주기도문, 사도신경, 십계명, 팔복, 성령의 열매 등과 같이 추상적 사고를 요구하는 교육보다는 단순하게 알 수 있는 내용을 교육해야 한다. 예를 들면, 삼위일체 교리와 같은 것을 가르치기보다는, 성경의 주요 인물들인 아브라함, 모세, 다윗, 예수님, 베드로, 바울 등을 소개하는 형태의 교육을 해야 한다.청소년부는 성경의 교회 정체성 등을 인식하도록 교회의 해석화(interpreting the church)가 가능한 시기이다. 교회가 왜 그리스도의 생명의 몸인지, 삼위일체의 교리, 십일조 문제, 교회의 사명. 사회적 사명 등을 인식하게 한다. 성경의 정신을 내면화할 수 있는 시기이다. 청소년의 시기에는 자기 생각이나 느낌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상당히 향상되고,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도 활발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종교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많은 교회 교육 전문가들은 신앙의 여정에서 청소년기의 중요성을 밝혀냈다. 신앙적 회심과 발달은 청소년기에 가장 활발하게 일어난다는 것을 밝혀내고 있다. 일반적으로 삶의 여정에서 종교적 체험 또는 회심이 대부분의 기독교 청소년, 여자는 16세, 남자는 13중에 가장 활발하게 일어난다는 것을 보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 청소년기에 회심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가? 청소년기는 자아 정체감이 생기기 시작하며, 생리적 변화와 추상적 사고가 가능하게 되는 인지 발달이 이루어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정체감을 추구하는 과정으로 청소년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특정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다. 청소년기에 영적 체험 혹은 회심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난다는 것은 그들의 육체적, 정서적, 지적 혹은 사회적 발달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교회는 청소년기가 신앙 형성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그들의 특성에 맞게 소통하는 교육을 실행할 필요가 있다.특히 교회는 청소년기는 탐구하는 신앙(searching faith)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탐구하는 신앙은 주로 청소년에 나타나는 유형으로, 이전에 가졌던 신앙에 대한 이해에 대해 회의하면서 지적이고 비판적인 성찰과 탐구를 하게 되며, 공동체의 이야기들과 가르침 그리고 행동들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 해석적 경향을 보이고 질문을 제기하는 경향을 보인다(John Westerhoff III, Will Our Children Have Faith?, 96-97). 이 단계의 사람들은 배움의 목적과 다양한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된다. 자신을 위해서 배우지만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며 배우는 단계에 이른다. 하지만 이 단계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상당히 성찰적인 신앙이 형성되는 시기이기 때문에 전통적인 교육 방식에 비판적이고 저항적일 수 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러한 현상은 신앙이 퇴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기존의 전통적인 방식에 대한 비판은 저항으로 표현된 믿음이며, 거부로 표현된 성장의 과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청소년기에는 비평적 사고(critical thinking)를 많이 하는 시기이므로 교회의 문제에 대해 비판적인 이야기를 할 때, 성숙하지 못한 신앙이라고 꾸중을 쉽게 해서는 안 된다. 이 시기의 비평적 사고는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교회 지도자들이 이들의 비평적 사고를 잘못된 신앙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 장년부는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정체성을 실천할 수 있도록 교회의 생활화(living the church) 차원으로 교육을 경험하기를 원한다. 이 시기에는 지식을 추구하려는 경향보다는 삶을 중요하게 여기는 시기이므로 성경을 교육할 때도 단지 성경 분석이나 해석에 관심이 있기보다는 삶의 지혜를 얻기를 원하는 경향이 강하다. 장년부는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 모인 신앙공동체이며, 화해와 선교의 생명공동체라는 것을 인식하고 청지기 직에 대해 논하는 것을 좋아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주기도문, 사도신경, 팔복, 십계명과 교회의 절기를 내면화하도록 교육하면 좋다. 장년부는 성경적 삶의 의미를 깊이 내면화하도록 교육해야 한다. 교회 교육은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 내용을 교육할 대상자에 대한 바른 이해 없이 효율적인 교육을 기대할 수 없다. 교회 교육에도 색깔이 있다. 바로 세대별 색깔이다. 빨간색을 노란색으로 이해하고 교육하게 되면, 그러한 교육은 오히려 왜곡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교회 공동체 안의 세대별 색깔을 바르게 이해하고 교육할 때 효과적인 교육을 할 수 있다.
교회교육
세대별교육
세대별신앙
교리교육
나는 트위터 청중에게 설교하고 있었다
by Brandon Cooper
2023-01-27
꽤나 벼르고 있다가 던진 농담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요즘 시대를 관통하는 중요한 문화와 관련해서 퍽 재치 있는 해석을 담은 유머인데, 아무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평소라면 내 유머에 어김없이 예의 바른 웃음을 짓던 아내조차도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게다가 내가 다룬 주제는 지난 며칠 내내 사람들이 계속 이야기하던 주제, 다름 아니라 트위터에 관한 것이었기에 내 놀라움은 더 컸다. 그게 바로 문제였다. 내가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지, 나는 몸서리쳤다. 온라인이라는 배타적이고 왜곡된 세계에서 빠져서 산다는 건 설교에도 영향을 미쳤다. 지난 설교를 검토하니, 설교의 주제, 태도, 그리고 적용에까지 내게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았다. 언젠가부터 나는 사람들에게 하던 설교를 중단하고, 대신 조작된 증오와 비인간적인 내용으로 넘치는 알고리즘에게 설교하고 있었다. 내 실수의 심각성을 깨닫는 데에는 기도도, 깊은 수준의 성찰도 필요 없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을 열정이 대신할 수는 없다. 정치와 문화 전쟁과 관련해서 얼마든지 바른 소리를 할 수 있지만, 사랑 없는 설교는 열매 맺지 못한다. 트위터에 신경 쓰는 설교는 사람들을 갈라놓고 논란을 불러일으킬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훨씬 더 나은 목표를 달성하는 “더 나은 길”이 있다(고전 12:31).설교의 목표 디모데전서 1장에서 바울은 젊은 목사 디모데에게 논란이 되는 추측을 피하라고 조언한다. 왜 그럴까? 바울은 “이 명령의 목적은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딤전 1:5)라고 썼다. 설교의 목적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더 키우는 것이다. 우리가 소셜 미디어 논쟁에 집중한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진짜로 함께함으로만 가능하다. 예수님도 우리 가운데 함께 거하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요 1:14; 3:16).예수님은 오로지 사랑의 사명에만 일편단심 초점을 두셨고, 사람들을 갈라놓기보다 다양한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셨다. 예수님은 정반대의 두 사람, 열심당원 시몬과 로마에 고용된 세금 징수원 마태를 택해서 제자로 삼으셨다. 현대의 관점에서 볼 때, 그건 샌더스를 추종하는 사람과 트럼프 열성 지지자를 같은 그룹에 넣고 사역하는 목사와 비슷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정치의 표면이 아니라 그 아래를 보셨다. 시몬과 마태에게 어떤 일이 생겼는가? 그들이 불편한 감정을 어떤 식으로든 표현하거나 소속 정당을 바꿨는가? 그렇지 않다. 성경은 단지 그들이 구주를 따랐다고만 말한다. 트위터가 아니라 성도에게 직접 설교할 때, 우리는 예수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는 새로운 세 가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1. 두려움에서 사랑으로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 독설을 퍼붓는 트위터를 목격하면서 나는 최악의 사람들을 가정하기 시작했다. 내 마음이 가상 문화에 갈수록 길들어졌고, 나와 생각이 다른 성도에게 아예 선제적인 태도로 냉정해졌다. 어리석게도 나는 내가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익명이라는 핸들 뒤에 숨은 온라인 속 낯선 사람을 구분하지 못했다. 내가 아는 사람들도 온라인 속 적대자들처럼 나를 대할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설교하려고 할 때면 공포를 느꼈다. 행여라도 나와 내 메시지를 모두 다 거부할까 봐 두려웠다.고맙게도 하나님이 선언하셨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요일 4:18).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완전하게 사랑하신다. 이 진리는 잘하고 싶은 덫에서 나를 자유롭게 했다. 그리고 성도를 완전히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하도록 만들었다. 덧없는 이슈의 반대편에 서 있는 적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사랑받는, 주님의 피로 구속받은 양 무리로 바라보도록 만들었다. 이런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됨으로써, 나는 이제 논쟁에서 이기려고 하지 말고 더 사랑하라고 설교한다. 진리는 내 설교의 어조와 강조 포인트 및 목적까지도 바꾼다. 2. 논쟁이 되는 문제에서 새롭게 만나는 복음으로온라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때 생기는 문제 중 하나는 설교마저도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에게 맡겨진 양 떼의 필요가 아니라, 가상 세계가 주도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건 농담이 아니다. 이 문제가 주제가 될 수도 있다. 실로 목회자에게는 위험한 현실이다. 온라인에서 사는 설교자는 교인들이 진짜로 필요로 하는 것을 모를 수 있다. 이런 현실은 교인들에게도 위험하다. 많은 교인이 교회의 리더만큼 온라인 속 문화 충돌을 즐긴다. 자신에게 물어보라. 은혜받았다는 말을 가장 많이 들은 설교가 논쟁이 되는 문제에 관한 긴 불평을 쏟아놓았을 때인지, 아니면 복음을 신선하게 선포했을 때인지. 목회자여, 이 점을 확신하라.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서는 안 되고, 충분한 권위가 있고, 또한 사역을 위해 하나님의 백성을 준비시키는 데 충분하다면, 오바댜가 에돔에 대해 말한 내용은 이런저런 사람들이 온라인 토론방에서 떠드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훨씬 더 중요하다. 9.11일이나 팬데믹의 첫날처럼, 반드시 한 손에는 성경을 또 다른 손에는 신문을 들고 설교해야 하는 순간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조금 떨어진 곳에 앉은 미망인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이 멀고 다른 먼 데서 열리는 학교 이사회에서 발생하는 일보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더 중요하다. 우리는 교인이 들어야 할 내용, 바로 오늘 그들의 영혼과 관련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해야 한다.3. 두려움과 분노에서 진짜 순종으로연구에 따르면, 소셜 미디어는 정신 건강에 악영향을 끼친다. 미친 듯이 스크롤을 할 때 사람들은 불안감에 짓눌린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편재(遍在)의 능력을 주신 적이 없다. 이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속성이다. 인간과 공유될 수 없는 하나님의 속성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굳이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슬픔을 다 알기 원하지 않으신다. 멀리서 벌어지는 비극을 볼 때면, 도울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도와야 한다는 간절함에 우리는 쉽게 슬픔에 압도된다. 멀리 떨어진 세상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관해서 주로 설교하는 경우에 두 가지 악을 낳는다. 첫째, 이미 불안에 빠진 교인의 두려움을 증폭하게 된다. 둘째,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교인을 오도한다. 끊임없는 분노 말고는 구체적으로 적용할 길이 없을 때 특히 그렇다. 따라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개개인이 또는 단체로 다룰 수 있는 지역 문제에 대해 설교하는 것이 훨씬 낫다. 우리 교회가 전국의 대학 캠퍼스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바꿀 수는 없지만, 교회 주변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을 가정으로 초대할 수는 있다.바로 이 자리에 있는 내 마음에, 우리 가정과 지역 사회에 설교를 집중한다면, 그리고 지금 여기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보여줌으로써 설교를 지역화할 수 있다면, 우리는 구체적인 차이를 만들 수 있다. 보편적인 진리를 지역 문제에 적용해서 설교하자. 그리고 (서로 정치성이 다를 수도 있는) 교인이 복음이라는 공통된 소식을 가지고 서로 손을 잡고 배고픈 이들을 먹이고, 헐벗은 이들을 입히고, 병든 이들을 방문할 수 있도록 기도하자. 나는 예수님처럼 되고 싶다. 우리 주님처럼 목양하고 싶다. 여러분도 같은 마음일 것이다. 지금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으신 예수님은 트위터를 스크롤하고 계시지 않는다. 인터넷 논객들과 악의에 찬 논쟁을 벌이려고 준비하지도 않으신다. 주님은 말씀을 선포하는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고 또한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성령을 통해서 직접 교회에 임하신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과 메시지를 바로 전하는 신실한 대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원제: I Was Preaching to My Twitter Fee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온라인중독
온라인설교
디지털세상
지역교회
지역성
설교
그리스도인의 슬기로운 ‘K-드라마’ 문화생활
by 서나영
2023-01-26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 위하여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SIEW)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섭니다.바야흐로 ‘K-드라마’ 열풍의 시대다. 한국 드라마는 이제 더 이상 우리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전 세계인의 주요 문화 코드로 자리를 잡았다. ‘오징어게임’을 시작으로 최근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까지 다양한 장르의 한국 드라마가 흥행에 성공했다. 작품성이 높다고 평가받은 K-드라마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몰입감이다. 이 말은 곧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신앙과는 관계없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면 누구나 몰입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순간에도 한국의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드라마에 몰입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은 K-드라마를 보는 주님의 백성에게 어떤 말씀을 하고 계실까? 교회는 그들에게 어떤 가이드를 주어야 할까?대중예술은 신앙인이 일상에서 영향을 받는 가장 큰 문화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드라마와 관계된 신앙의 삶에 대해 거의 들을 수 없다. 이러한 상황은 현대의 기독교가 그토록 피하고 싶어 하는 ‘이원론’에 빠진 사고가 더욱더 팽배하도록 방치한다. 그 무서운 결과는 신앙인의 삶을 교묘하게 ‘세속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아직도 한국의 교계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는 둔감증을 앓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문화예술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활발하게 참여하는 (적어도 내가 만난) 다음세대들은 이 영역에서도 성경적 진리를 갈구한다. 교회에는 더 지혜롭고 구체적인 복음의 언어로 “그리스도인의 문화생활”에 대해 가르쳐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렇다면 왜 교회는 이 영역에 무관심한 것일까? 문화와 개혁주의 기독교 사이에 오간 오랜 담론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몇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지만, 여기서는 수많은 신학적 이유는 뒤로 하고 현재의 예술의 도드라지는 특성을 생각해 보자. 고전 시대부터 지금까지 예술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리얼리즘(realism)이다. 특별히 이 시대의 K-드라마는 인간과 사회의 추한 모습들까지 자세하고도 생생하게 그리는 데서 탁월하다. 몰입감을 극대화하는 것이 높은 예술성의 기준이 되어 버린 지금, 표현 방법에서 도덕과 윤리 등의 선한 가치를 생각하는 것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옛 전통의 인간이 지켜왔던 가치들을 더 이상 소중히 여기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적나라한 부분까지 자세히 볼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교회는 당연히 이러한 예술 장르와의 담론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면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킨 ‘오징어게임’은 한국의 다양한 사회문제를 들추어낸다. 이 드라마는 자본주의가 낳은 빈부격차, 또 그로 인한 생명 경시 풍조를 중심으로 인간의 각종 추함과 잔인함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그뿐 아니라 기독교의 위선적 타락을 비중 있게 그린다. 이 드라마에는 세 가지 유형의 사람이 등장하는데, ‘살인과 친자 강간을 일삼는 목사,’ ‘불우한 이웃을 돌보지 않는 전도자,’ ‘쉬지 않고 주님께 기도하지만 이기적이고 파렴치한 자’이다. 그리고 교회들은 이 문제에 침묵했다. 일부는 “보지 말라”고 간단히 권고했고, 일부 기독교 언론은 반기독교 사상을 언급하며 비판하기 바빴다. 일부 젊은 목사들은 양육하는 교인들에게 ‘비판 글’ 링크를 돌리며 “얼마나 나쁜 드라마인지” 다급하게 알렸다. 이러한 대책들이 절대로 틀렸거나 부적절한 반응이라는 말은 아니다. 또한 대부분 교회 강단에서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던 이유는, 피하는 게 가장 지혜롭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권고나 무시와 상관없이 성도들은 이 드라마를 시청하고 있다! ‘오징어게임’을 보지 말라는 교회의 권고는 특히 젊은 세대에게는 전혀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다. 미디어의 파급력은 생각보다 더 크고 강하다는 것을 안다면, 이제는 교회에서 더 정교한 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한국 기독교 역사를 볼 때, 대중문화예술의 분석에는 일관된 접근 방식이 있다. 첫 번째 접근은 드라마의 스토리나 대사에서 ‘기독교 교리와 사상을 침해하는 부분이 있는가’라는 검열에서 시작한다. 어린 시절 교회로 초청된 특별강사가 당시 흥행하고 있는 영화 ‘사랑과 영혼’을 보지 말아야 할 수많은 이유를 나열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지만 그때도 그 영화를 보지 않은 거의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이미 본 영화를 보지 말라고 비판하는 걸 보면서 어린 나이에도 의문점이 있었다. 현재도 영화가 흥행하면 무엇이 반(反)기독교적인지 예리하게 찾아 비판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각성을 촉구한다. 최근 “수리남은 반기독교적 드라마”라는 제목으로 한국기독언론회에서 기사를 낸 바 있다. 예나 지금이나 일관된 접근 방식이다. 두 번째 접근은 비교적 최근 시도되고 있는 접근 방식인데, 스토리에 녹아 있는 기독교적 메시지를 찾는 것이다. 예를 들면, 2021년 한 기독교 일간지에서 어느 신학자는 K-드라마 ‘힘쎈 여자 도봉순’의 대사를 인용하면서 ‘사랑과 용서’라는 기독교적 원리를 끄집어냈다. 일반은총 교리에 입각해 모든 콘텐츠에서 기독교적 메세지를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보통 드라마나 영화에는 다중세계관이 섞여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 작품 안에서 반기독교적 세계관도, 기독교적 메시지도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는 인간의 존엄성, 희생과 사랑 등 사회적 선함을 추구하는 기독교적 메시지가 있지만, 레즈비언의 사랑과 결혼을 옹호하는 입장도 볼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 세계 청중의 “마음의 방향”이 그리스도를 향해 순례의 길을 걷는 같은 방향이라 해도, 같은 작품 속에 나쁘고 위험한 것이 더 보이기도 하고, 좋은 것이 더 커 보이기도 한다. 이렇듯 예술을 기독교 세계관으로 읽어내는 작업은 복잡하고 생각할 것이 많아서 많은 인내가 필요한 작업이다. 개개인의 주관성과 작품의 개별적 특성이 만나 보편적 결론에 이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그러함에도 K-드라마를 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원초적인 성경적 접근 방식을 소개하려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인 성경이 그 자체로 엄청난 수준의 문학예술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가? 수많은 장르의 아름다운 문학 기법과 시와 노래와 판타지와 비유가 등장한다. 한 접근 방식의 예로, 리얼리즘을 생각해 보자. 그리스도인의 드라마 시청에서 주목하여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스토리보다는 내용을 표현하는 사실주의적 방식이다. 분명히 ‘인간의 전적 타락’은 성경적 사실이다. 그런데 일부 드라마에서는 모든 추한 형태의 인간 타락과 악을 명시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악의 전체 범위를 돋보기로 확대하여 스펙터클하게 묘사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묘사의 방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리얼리즘은 성경도 사용하고 있는 중요한 예술적 방법이다. 성경은 인간 타락의 전체적인 범위를 다양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리얼리즘이라는 방법론을 지지하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겠다. 예를 들면, 성경은 성적 부도덕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소돔의 동성애 이야기(창세기 19장); 디나 강간 사건(창세기 34장); 다말과 오난의 부적절한 성교(창세기 38:1-10); 삼손의 행위(사사기 16장); 기브아의 첩 집단강간 사건(사사기 19장); 다윗과 밧세바의 간음(사무엘하 11장); 암논과 다말의 근친상간(사무엘하 13장) 등등이 묘사된다. 또한 성경은 폭력의 장면도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사사기 3장의 에훗의 에글론 암살사건을 비롯해 구약 신약에 다수의 스토리가 있다. 성경은 사실주의 기법을 사용하여 우리가 알아야 할 것, 곧 인간 상태의 죄성과 타락한 세상의 비참함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리얼리즘을 지지하는 성경과 드라마라는 예술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그 목적이다. 성경은 악에 대한 고발을 보여주기 위해 묘사하는데, 반면 일부 드라마는 악을 묘사하여 몰입감을 높이는 데 더 큰 목적을 둘 때가 많다. 성경은 인간의 삶과 경험에 대한 설명에서 타락의 모습을 우세하게 표현하지 않는다. 즉, 성경은 인간의 타락이 삶의 전부이거나 추함과 악에 대한 대안이 없다는 인상을 청중에게 남기지 않는다. 또한 성경은 성적 부도덕에 대해 따라오는 추악한 세부 묘사를 하지 않는다. 성적 부도덕을 표현할 때, 그 내용을 예술적으로 축약하여 악함이 돋보이거나 선정적으로 비치게 하지 않는다. 성적인 부분을 묘사하는 수많은 K-드라마와는 접근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는 의미다. 제일 중요한 것은, 성경은 묘사하고 있는 악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반면 대부분의 현대 K-드라마는 부도덕이나 부분적 악을 인간 행동의 정상적이고 불가피한 부분으로 묘사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직접 보여주신 예술 작품의 가장 좋은 예다. 인간의 모든 삶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며 아름답고 의미와 장르와 기법이 충만하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성경의 예술적 방식을 인식하고 K-드라마를 볼 때,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정욕적인 생각과 행동을 불러일으키는 외설적 표현이 보이고, 욕설과 주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언어들이 들리길 바란다. 또한 노골적이고 절제되지 않은 폭력과 모든 악의 묘사방식이, 성경의 방식과 비교되어 감상 되길 바란다. 이러한 작은 사고의 전환이 시작되기를 교회가 적극적으로 돕기를 바란다. K-드라마를 피할 수 없게 된 젊은 세대들이 영적으로 무장하고 지혜로워지기를 바라며, For His Glory!
드라마
대중예술
대중문화
다중세계관
리얼리즘
성경의리얼리즘
처음
이전
36
페이지
37
페이지
38
페이지
39
페이지
열린
40
페이지
다음
맨끝